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함께합니다. 그가 품는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너무나 아파서 가슴이 막막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오며, 작기만 했던 가능성은 어느덧 기대 이상으로 실현됐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중심에는 '사람은 상처 받고 고통만 당하기엔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 24년(1991~2014년) 동안 조카와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의 경험이, 어떻게 풍성한 열매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자 말

아버지는 1997년 9월, 오빠는 1998년 2월에 6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오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혼한 올케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이제 남은 식구는 어머니와 지적장애 3급의 조카 그리고 나뿐이었습니다.

32세였던 나는 7년을 교제해오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장남으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혼을 재촉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친과 조카를 두고 결혼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헤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의 막막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도 막막했고, 그동안 어려울 때 의지가 되며 도움을 받았던 그 사람과의 헤어짐은 참으로 나를 외롭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그동안 충분히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면서 인연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시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 갑작스러운 '위암 3기 말' 판정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오빠가 남겨준 조카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오빠가 남겨준 조카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그 후로 나는 한없이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표정을 그때그때 살피면서 하루하루 보내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내 얼굴에서 힘들거나 지친 기색이 보이면 어머니는 앞선 걱정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집 밖에서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현관문 앞에서는 깊은 호흡을 하며 그런 감정들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다녀왔습니다"를 외치며 집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가장으로 버티면서 그리고 조카를 돌보고 지도하면서 쌓였던 아픔들을 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끔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는 혼자서 차를 몰고 관악산 중턱에 올랐습니다. 자동차를 댈 수 있는 그곳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 그동안 쌓인 외로움·괴로움·어려움을 안고 마음껏 울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한 지 약 7년쯤 되었을 때, 나의 몸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밤에 잠을 충분히 잤다 싶었는데도 계속 졸음이 오고 피곤했습니다. 음식은 소화도 안 되고, 특히 새벽 1시에서 5시 사이에 속이 불편하고 쓰린 증상이 계속됐습니다. 2005년 6월, 병원에서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았을 때 '위암 3기 말'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위암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라는 생각보다는 '앞으로 엄마와 조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양쪽 모두 인공관절 무릎 수술을 하신 71세 어머니, 16세의 지적장애 3급인 조카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게 자리했습니다. 저는 침착하게 앞으로 살아가며 버텨야 할 길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했습니다.

일단 수술을 할 것인지 아니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살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검사 결과는 3기 말이지만, 수술을 해보면 4기일 수도 있다고 주치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조카를 계속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수술을 받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오래전 보험설계일을 하던 선배 언니의 권유로 보험을 들어둔 것입니다. 보험을 몇 개 들어달라고 하기에,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람에 조카 것까지 모두 4개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필요성을 잘 못 느꼈지만, 거기에 암보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용 덕분에 무사히 수술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수술을 해보니 조직검사 결과보다 진행이 덜 된 2기 정도의 암이었습니다. 수술 후 퇴원을 하고 일을 하면서 항암제를 6번 맞았습니다.

주치의는, 제가 아직 젊고(당시 39세) 앞으로 활동해야 하는 점을 고려해서 최근에 개발된 항암제를 권했습니다. 왼쪽 가슴 위에 케모포트(항암주사를 위해 가슴 부위에 삽입하는 관)를 사용해서 2주에 한 번씩 항암제를 맞았습니다. 그 후로도 케모포트를 6개월 동안 몸에 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약 10개월쯤 되었을 때, 왼쪽 가슴에 염증이 발생했습니다. 그 염증 수술을 받고 또 7개월쯤 되었을 때, 가슴에 염증이 재발하여 한 번의 수술을 더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을 때마다 병원에 입원했고, 입원 기간을 제외하면 일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머리 검은 사람은 거두고 볼 일입니다

그런 생활 중에도 내 마음과 정신의 중심이 되어준 원칙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상처받고 고통만 당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과 "머리 검은 사람은 거두고 볼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진돗개 두 마리(사랑이와 슬기)와 말하는 앵무새를 약 11년 동안 키웠습니다. 그래도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사람을 돌보고 지켜주는 일이었습니다. 저의 신념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왔습니다.

조카 덕이와 함께 1992년 4월부터 함께 살면서 갑작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덕이는 빈혈과 간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고 없이 학교나 학원 길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여 1품을 따는데 보통 9개월 정도 걸린답니다. 덕이는 2년이 걸렸습니다. 1부터 50까지 숫자를 쓰고 읽는 것을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글은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지만, 운동이나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태권도 4단입니다. 몸이 허약했던 탓에 수시로 쓰러지는 간질증상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없어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는 한국을 대표로 일본에서 열리는 장애인청소년마라톤대회 5km에 참석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마라톤 전 구간을 완주했고, 2009년 경기도청소년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서는 청년부 2위를 했습니다.

조카가 몸이 허약했고 공부도 잘 못했습니다. 또래 아이들로부터 욕설을 듣고 학대를 받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조카의 등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린 흔적이 있었습니다. 조카의 목에는 면 티셔츠의 목 부분을 따라서 둥근 모양의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은 엉덩이까지 흘러내려 있었습니다. 아무 말을 못 할 정도로 화가 나고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아픈 경험을 통해 얻게 된 결과는 예상을 뛰어 넘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피곤했었는지 퇴근 후 거실에 누웠습니다. 잠깐 쉴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 잠들어 버리고 말았지요. 깨어 보니 제 머리 위와 머리 좌우에 큰 쿠션과 베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덕이가 그렇게 놓았던 것이었죠.

제가 평소에 덕이의 머리맡, 왼쪽과 오른쪽에 놓아주었던 베개들이었습니다. 덕이가 자면서 자꾸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뒀던 것이지요. 덕이는 지적장애로 감정소통이나 공감이 쉽지 않았음에도, 내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방법 그대로 따라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하면 되겠구나'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덕이에게 '잠들기 전 5분 교육'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덕이에게 감사할 일과 칭찬할 만한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줬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약 3개월쯤 지났을까요. 덕이의 입에서 저에 대해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요. 정말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덕이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성장에 필요한 과정별로 구체적인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나날들이 계속되면서 조카의 표정이 밝게 변하고, 또래들에게 받는 학대도 잘 극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래에게 받았던 아픔들을 통해, 조카는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채 열심히 운동하게 됐습니다. 덕이는 자신의 친구들이, 친구끼리 서로 괴롭히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서 자신을 괴롭힌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배움의 필요성과 앎의 중요성을 덕이가 직접 체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어느덧, 저는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또 어떤 놀라운 일이 있으려고 이런 일이 발생하나.'

어느새 '위기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모아서, 마음을 치료하는 심리상담소를 개소했습니다. 이는 평소에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고 노력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에도 저에게 흔들리지 않는 강한 애정을 지니기에 충분한 용기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8월, '청소년의 희망적 사고의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청소년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20살 때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보육원에서 봉사를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2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틈틈이 조카의 학업과 재능을 키우기 위해 살피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이룬 의미 있는 결과였습니다.

지금은 지적장애를 지닌 조카임에도, 직장에서 정직원이 되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충실히 일합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랑에 대한 정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상대가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하여도 그 사람에 대한 강한 애정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찌 기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나요.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