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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박물관 서수형 토기

국립 경주박물관에 가보면 여러 형태의 서수형 토기와 토우들을 볼 수 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국보 제195호인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 長頸壺)화 보물 제636호인 미추왕릉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다.

'서수(瑞獸)'는 상서로운 짐승을 뜻하고 있는데, 토기에 나타난 이 짐승은 길상(吉祥)을 뜻하는 동물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서수는 상서로운 짐승을 뜻하고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미추왕릉 서수형토기 서수는 상서로운 짐승을 뜻하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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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동 미추왕릉 3호 무덤에서 출토된 서수형 토기는 나팔 모양의 다리에 사각형의 투창이 뚫려 있는 모습이다. 이 서수의 모습은 말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크게 벌린 입과 길게 내민 혀, 꾸불꾸불한 꼬리, 날카로운 지느러미 등을 보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과 여러 동물의 모습이 토우로 조각되어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토우장식장경호 사람과 여러 동물의 모습이 토우로 조각되어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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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형 토기와 함께 5~6세기에 제작된 토우장식장경호는 경주시 노동동 11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목과 어깨 부위에 토우가 장식되어 있다.

이 장경호에 붙어 있는 토우들의 모습을 보면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배부른 임산부가 가야금을 타는 모습, 토끼와 뱀, 개구리, 거북 등 주술적인 의미의 다양한 장식이 있다. 이러한 토우들의 모습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산과 같은 의미를 상징한다고 한다.

옥천 만의총 서수형 토기

그런데 경주의 토우장식장경호와 미추왕릉 서수형토기를 접목시켜 놓은 듯한 토기가 지난 2008년 해남 만의총 1호분 고분에서 발굴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만의총 서수형토기는 남근을 노출한 토우가 말위에 타고 있는 모습이다. 보기에 따라 용의 모습 같기도 하다.

신라계통의 서수형 토기다.
▲ 만의총 서수형 토기 신라계통의 서수형 토기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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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는 그동안 신라시대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었지만, 동신대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만의총 1호분에서 출토된 서수형토기(瑞獸形土器)는 남근(男根)을 노출하고 있는 모습이다. 남근을 노출한  토우가 경주 지역 외에서 출토된 것은 만의총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가야,일본의 국제적 성격의 유물이 들어있다.
▲ 만의총 1호분의 출토유물들 신라,가야,일본의 국제적 성격의 유물이 들어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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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만의총 1호분 고분에서는 철검·철촉을 비롯 무구류, 청동거울·금은제 장식·왜(일본)계의 조개팔찌 등 장신구류, 가야·신라 토기를 포함해 1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서수형 토기는 이들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주로 경주나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이 서수형 토기가 서남해의 끝에 위치한 해남땅에서 발견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유재란의 의병무덤 만의총

해남 만의총은 본래 정유재란과 관계가 있는 의병들의 무덤이었다. 만의총은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들을 모아 무덤을 만든 분묘였던 것이다.

성산벌로 불리는 넓은 들판의 이 지역에는 현재 3기의 무덤(고분)이 남아 있는데 이 무덤들이 모두 의병들의 떼무덤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재는 2기가 발굴되어 있지만 나이가 많은 촌로들은 오래전에는 6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해남 만의총은 본래 정유재란시 전투에 참여하여 죽은 의병들을 한곳에 묻은 무덤이었다.
▲ 해남 만의총 1호분 해남 만의총은 본래 정유재란시 전투에 참여하여 죽은 의병들을 한곳에 묻은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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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총이 있는 성산벌은 상당히 넓은 벌판이다. 고대에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이 이루어졌을 법한 지역이다. 정유재란시 남해 바다로부터 상륙한 왜군은 이곳 성산벌에서 의병들과 대혈투를 벌인다. <호남절의록>에는 이 전투에 윤륜(尹綸), 윤신(尹紳)형제를 중심으로 참여한 의병이 왜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성산벌의 대 혈투에 참여한 의병들은 왜군과 싸우다 수백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때 싸우다 숨진 의병들을 한곳에 묻어 만의총(萬義塚)이라 한 것이다. 현재도 후손들은 만의총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10월 10일 의병들의 혼을 달래는 제를 올리고 있다.

이 만의총이 발굴을 하게 된 것은 후손들과 보존회가 발굴을 요청하면서부터였다. 만의총을 발굴하면 선조의병들의 유물이나 유골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보면 만의총은 5~6세기 무렵에 조성된 고분으로 밝혀졌다. 이곳에서는 서수형 토기를 비롯 1천여 점의 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이를 보면 성산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고대에 상당한 규모의 군장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5,6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었던 것이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만의총은 넓은 성산벌의 벌판에 3기가 분포하고 있다.
▲ 만의총 1호분 전경 만의총은 넓은 성산벌의 벌판에 3기가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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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싱겁게 고분의 성격이 밝혀지긴 하였지만 이 고분의 상층부 토양에서는 하단부의 토양층과는 다른 인성분을 가진 토양층이 발견되었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동신대박물관 측은 이를 의병들이 묻힌 것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여 기존 고대의 무덤위에 다시 무덤을 쓴 형태가 아닌가 보고 있다.

고분 상층부의 다른 토양층에서 인성분이 발견되어 의병들이 합장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고분 상층부의 색이 다른 토양층 고분 상층부의 다른 토양층에서 인성분이 발견되어 의병들이 합장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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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을 연결하는 국제교류

만의총 1호분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뿐만 아니라 왜를 연결하는 4국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를 보면 만의총이 있는 해남지역은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국제적인 유물을 소장하게 한 피장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연히 그 주인공에 대해 궁금증이 든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통일신라말 서남해를 거점으로 동아시아의 해상을 장악하였던 장보고가 떠오른다.

실제로 이 피장자가 이러한 해상활동을 하였는지, 죽을 때 자신이 수집한 유물들을 묻게 하였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러한 문화적 교류의 한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임은 확실한 것 같다.

이곳 서남해역은 한중일을 연결하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고대에서부터 많은 문화적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우리나라 서남해역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러한 문화적 교류의 거점역할을 하였고 서남해역의 고분을 비롯한 패총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국제적 성격의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제적 성격의 유적 중에 지난 1986년부터 발굴한 해남 군곡패총에서는 중국 신(新)나라때 사용된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 이 화천은 경남 사천과 김해, 일본의 대마도, 큐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어 고대 해상루트의 중심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지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은 고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 해남 방산 전방후원형 고분 이지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은 고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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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분묘형태인 전방후원형 고분이 영산강 유역을 비롯해 해남의 방산고분과 용두리 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일본과의 밀접한 교류현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해남 현산초등학교터에서 발견된 가야계 토기를 비롯한 여러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신라나 가야계통으로 알려져 이들 지역과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교류는 이처럼 다양한 유물의 발굴과 성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 가야계통의 유물들이 이지역 여러곳에서 출토되었다.
▲ 해남 현산초등학교터 가야계통 유물 신라, 가야계통의 유물들이 이지역 여러곳에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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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형 토기의 원형

만의총 서수형 토기의 모습은 매우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토우는 과장된 크기의 남근이 표현되어 있다. 서수형 토기나 토우는 성적인 묘사를 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신라시대의 풍속으로 알려져 왔다.

원시신앙의 형태로 볼 때 남근은 다산을 강조한다고 한다. 고대 국가의 형태로 발전해 가는 시기가 다소 늦었던 신라를 놓고 볼 때 신라는 왕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그 권력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 왕족 간에도 결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서수형 토기에 나타나는 모습도 다소 근친상간적인 이러한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장보고의 해상무역 활동처럼 고대의 해상무역 활동을 상상해 보면 고대인들은 한중일의 중간 기착지인 서남해안에 머무르면서 돈과 식량을 비롯한 여러 무역품을 교환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이곳은 중개무역의 거점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서남해 연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교류속에서 나타나는 무덤의 양상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서남해역을 연결하며 백제, 가야, 신라, 일본으로 연결되는 이러한 해상 루트의 무역활동 속에서 만의총 고분의 국제적 유물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태그:#만의총, #서수형 토기, #국제교류, #신라 토우, #미추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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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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