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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갑곶나루터의 모습
 강화 갑곶나루터의 모습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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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동이 틀 때 출발했다. 통진(通津) 40리 지점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중략) 통진읍에서 출발해서 갑곶진을 건너 진해문으로 들어갔다. 신시(申時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경에 강화부에 도착하니 (통진에서) 모두 20리였다. 이아(貳衙, 곧 관아)에 처소를 정했다. 유수 조병식과 판관 박제근이 찾아왔다. 이날 밤 강화부에 도착했다는 장계를 봉해서 발송했다."

병자년 정월 칠일(양력 1876년 2월 1일), 한 남자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찬 서리가 내리고 한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추운 겨울이었다. 한겨울 먼동이 틀 무렵에 길을 나섰으니 손은 얼마나 곱았으며 발은 또 얼마나 시렸을까.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러 가는 접견 대관 신헌은 그 추위가 참 아팠을 것이다.

병자년 정월 칠일 그날의 일기

차양막을 드리운 곳이 구로다의 숙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앞에 조선 측 접견사절단이 일렬로 서 있다.
 차양막을 드리운 곳이 구로다의 숙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앞에 조선 측 접견사절단이 일렬로 서 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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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양천까지 30리를 걸었다. 한강도 건너야 했으니 먼동이 틀 무렵에 출발했어도 양천(현 양천구)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양천에서 경기도 김포가 40리이고 김포에서 통진(김포시 통진면)까지가 또 40리 길이니, 통진에 도착하기까지 총 100여 리를 걸었던 셈이다.

통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강화로 들어오니 신시 경이었다. 총 130리 길이었다. 하루 해 안에 도착했지만 오는 길이 그렇게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일본 대표단과의 조약 체결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를 무단으로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초지진을 수비하던 병사가 대포를 쏘아 운요호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자 일본도 반격에 나서 초지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영종진(현 영종도)으로 가서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때 있었던 일을 조선에서는 '운요호 사건'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 부른다.

이듬해인 1876년 1월 30일, 일본은 군함과 수송선 여러 척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의 책임을 물으며 수호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당황했다. 근대적인 외교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조선으로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조약에 대해 대응할 방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을 때 접견 대관이었던 신헌.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을 때 접견 대관이었던 신헌.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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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접견 대관을 맡은 사람이 바로 신헌이다. 신헌은 병조판서, 총융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등의 국방 요직을 두루 역임한 무장이었다. 그는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1874년(고종11년)에는 진무사 겸 강화유수에 제수되기도 했으니 강화도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장(武將)이었지만 서예와 문장에 능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유장(儒將)'이라고 불렀다. 

그는 두 해 전에 떠났던 강화도를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접견 대관으로 가는 길이다. 비록 강화가 서울에서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해도 연로한 그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을 테다. 그때 신헌의 나이가 75세였으니 자리에 연연할 나이도 아니었다.

아무리 문무에 모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외교 업무는 무관보다는 전문 문관이 적임자일 것이다. 그런데도 무장이었던 신헌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의 어떤 점이 눈에 띄어 강화도 조약의 책임자를 맡게 된 것일까.

개화파, 척화파 모두의 신임을 받았던 신헌

신헌이 강화도 조약의 책임자가 된 데는 박규수의 천거가 있었다. 박규수는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목격했다. 그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등의 초기 개화파들이 성장했으니 그는 개화운동의 씨를 뿌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박규수가 신헌을 협상의 적임자로 천거했던 것은 신헌이 외국을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론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헌은 여러 차례 청나라로 연행을 다녀오면서 급변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대해서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박규수가 신헌을 천거했다.

신헌은 완고한 척화파였던 흥선대원군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당시는 안동 김씨가 득세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지 기반을 얻기 어려웠던 대원군은 무관의 지위를 높여주고 등용해서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또 신헌의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는 대원군과 먼 친척관계였다. 추사로부터 묵란 치는 법 등을 배우기도 했던 대원군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신헌을 추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신헌은 양쪽 모두로부터 지지와 신임을 받아 강화도 조약의 전권 대관으로 천거가 되었다. 신헌은 왕의 신임까지도 받고 있었다. 왕은 그에게 비지(批旨)를 내렸다. 

"경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해서 일찍부터 중한 명망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조정의 논의가 모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고, 음기응변을 위해서는 전담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록 국경을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고례를 원용해서 참조했던 것이다. (중략) 나는 공을 장성(長城)과 같이 믿으니 경은 반드시 나의 지극한 뜻을 체행하라."

일본 측 대표였던 구로다 키요타카
 일본 측 대표였던 구로다 키요타카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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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별다를 것이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계산은 여전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개화파와 척화파 모두의 신임을 받았다. 여기에 왕의 깊은 신뢰까지 더했으니 강화도 조약의 접견대신이었던 신헌을 향한 정부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강화로 행차한 그는 매순간 철저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일본 측 대표단들을 접견할 때마다 매번 그들의 용모와 말투를 상세히 관찰했다. 어떤 이에 대해서 "단상, 즉 단정하고 신중하다"고 하거나 또는 "온유하고 박절하지 않은 태도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일본 측 대표단 한 사람 한 사람을 파악해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일을 꾸미려는 의도였다.

일본측의 전권대사인 구로다 키요타카에 대해서도 "사람됨이 외면은 비록 관유하지만 내면은 실로 강맹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하지만 수행원인 모리야마 시게루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 그는 "사람됨이 교휼하고 말투가 울불해서 은밀히 대사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갈등을 빚는 자"였다고 평가했다. 

반간책, 즉 이중간첩을 쓰다

진무영 내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조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강화 군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진무영 내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조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강화 군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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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이 봤을 때 모리야마는 양쪽을 이간질 시키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양쪽 대관이 협상하는 사이에 간섭해서 우리 쪽에 불리하도록 일을 꾸몄다. 그래서 신헌은 그를 배제하고 일을 추진할 궁리를 했다. 구로다에게 반간(反間), 즉 이중간첩을 써서 모리야마의 기세를 꺾고 계략이 나올 여지가 없도록 만들려 했다.

신헌은 일본 측의 통역인 최조를 유도해서 일본 쪽에 내홍(內訌)을 일으키고 기밀을 탐지할 이중간첩으로 이용한다. 최조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동래 왜관에서 자라서 우리나라 물정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래서 그를 은밀히 불러 모리야마와 구로다 사이를 이간질하도록 조종했다.

신헌은 모리야마를 배척하여 우리 측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도록 일을 꾸며나갔다. 즉 조약안에 있는 '대일본(大日本)'의 '대(大)'자나 '황제폐하(皇帝陛下)' 같은 글자를 모두 삭제하고 개항지로 일본 측이 제시한 곳 중 함경도 영흥을 제외시키도록 만들었다.

영흥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로 조선으로 봐서는 성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곳을 개항지로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일본 측과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입술과 혀가 다 헤진 끝에 얻어낸 수락"이었지만 사실은 모리야마를 배척해서 얻은 효과였다.

강화도 조약의 접견대신이었던 신헌이 쓴 <심행일기>
 강화도 조약의 접견대신이었던 신헌이 쓴 <심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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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걸쳐 여러 권이 있지만 반간책(反間策)을 써서 일본 사절단 내부에서 모리야마를 배척하는데 성공했다는 이 일화는 <심행일기>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시각에서 강화도 조약을 기록한 구로다 키요타카의 <사선일기(使鮮日記)>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치열한 외교전 속에서 그는 지략을 써서 소기의 성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협상은 밀고 당기기의 연속이었다. 신헌은 가래가 끓어오르고 답답해지는 '담화(痰火)'로 인해 "신기가 혼미해져 거의 쓰러질 지경"까지 갈 정도로 고심했다. 그는 일본 측과 교섭을 하다가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진행하기 위해 때로는 병을 핑계로 접견을 사절하기도 했다.

일본 측과의 접견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연이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오는 보고들을 취합해야 했으며 일의 진행을 조정에 알리고 또 비답을 받아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도록 애를 써야 했다. 

병자년 정월 이십육일의 일기를 보면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와 장계가 시간대별로 줄을 잇는다. 통진부사를 비롯해서 부평부사 그리고 풍덕부사 및 영종첨사 등이 연이어서 보고를 올린다. 또 강화 유수영에서는 성 안의 왜인들의 동태에 대해 상세히 적어 올린다. 신헌은 이 모든 보고들을 통해 일본 측의 동태를 파악해서 일을 진행시켜 나갔으며 또 날마다 임금에게 치계(馳啓), 즉 보고서를 올렸다.  

숨 가빴던 병자년 정월의 나날들

진해문은 갑곶의 관문으로서 조선 측 접견단뿐만 아니라 구로다의 변리사절단 일행도 강화부성에 진입할 때 이곳을 통과했다.
 진해문은 갑곶의 관문으로서 조선 측 접견단뿐만 아니라 구로다의 변리사절단 일행도 강화부성에 진입할 때 이곳을 통과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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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25일 사시(巳時)경에 이종선(異從船) 두 척이 하류에서 올라와서 수심을 측량하고는 계속해서 올라가 조강 앞바다를 지나갔습니다. 이종선 한 척이 하류에서 올라와 강화 갑곶진에 상륙했습니다." - 통진부사의 보고

"금일 미시(未時) 경에 저들의 종선(從船) 두 척이 통진 지역에서 올라와서 수심을 측정한 후에 그대로 다시 통진 지역으로 내려갔습니다." - 김포군수의 보고

"25일 사시 경에 저들의 종선 두 척이 갑곶항에서 연기를 뿜으면서 올라와 곧장 통진의 조강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 풍덕부사의 보고

강화 유수영에서도 신헌에게 보고를 올렸다. "항산도에 정박 중인 저들의 대선(大船) 일곱 척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며 성 안에 머물고 있는 왜인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

병자년 이월 초엿새의 일기를 끝으로 <심행일기>는 한 달 동안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두 나라가 서로 밀고 당기며 조약의 문구를 조율한 끝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우리가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빠지게 되며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접견 대관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신헌에게 왕은 "저들의 배가 모두 물러갔으니 실로 다행"이라고 하며 그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리고 일본 대표단의 이모저모에 대해 묻는다. 신헌은 일본의 앞선 병기(兵器)와 농기(農器) 그리고 화륜선이나 군대 제도 등에 대해 아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험준한 산천이 있어 수비하기에는 좋지만 병비(兵備)는 매우 허술하다고 하며 부국강병의 방법을 왕에게 아뢴다. 

"우리나라는 군대의 수가 매우 부족하여 정병(精兵)이 많지 않사옵니다. 더군다나 지방에는 규율을 갖춘 군사가 없으니 지혜로운 자라도 장수 노릇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천하의 대세는 각국이 군대를 쓰는(用兵)의 시대인데 우리나라의 형편이 이러하옵니다. 이 사실이 전파가 된다면 각국이 업신여길까 신은 실로 매우 근심이 되옵니다."

신헌, 그가 올린 부국강병을 위한 제언들

진무영 -강화 유수가 군사를 지휘했던 곳으로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 때 일본군이 이 곳에서 협상을 강요했다.
 진무영 -강화 유수가 군사를 지휘했던 곳으로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 때 일본군이 이 곳에서 협상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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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영의 열무당에서 양국 대표단은 회담을 했다.
 진무영의 열무당에서 양국 대표단은 회담을 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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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은 왕에게 이렇게 아뢰며 신속하게 우환을 막을 수 있는 처분을 내려주기를 빈다. 그리하면 군국(軍國), 즉 군대를 통솔하고 나라를 다스리기에 큰 다행일 것이라고 아뢴다. 신헌의 충언을 들은 왕은 "경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고 말하지만 당시 조선은 부국강병을 할 여력이 없었다.

신헌은 왕에게 일본 말과 글을 능숙히 다룰 사람을 하루 속히 키울 것을 주창한다. 수호조규 개래본(改來本) 제3관에서 "사후 양국 간 왕복하는 공문은, 일본은 그 국문을 사용하되 지금부터 10년 간 별도로 한문 번역 1본을 구비하며 조선은 진문(眞文)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 말인즉슨 앞으로 양국 간의 공문에서 일본은 그들의 언어로만 쓰겠다는 말이니, 조속히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을 키울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역원(譯員) 중에서는 저들의 국문과 역어를 해득할 수 있거나 학습한 자가 없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일본어를 정통하게 학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신헌은 말하였다. 저들의 글을 능숙하게 익혀야 저들의 실정에 통달하고 사무를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실로 나라를 걱정하며 앞날을 내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충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 가운데 회담을 하고 조약을 체결하였다. 적을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조선은 일본어에 능통한 통역관 한 사람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의 술수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겠는가.

신헌이 접견 대관으로 강화로 왔던 그때로부터 꼭 140년이 지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간다. 정병(精兵)을 키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신헌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태그:#강화도, #강화나들길, #강화도조약, #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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