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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은행나무와 풍차 800년 묵은 은행나무와 풍차, 빗살무늬 담은 징검돌마냥 하멜과 병영을 잇고 있다
▲ 병영 은행나무와 풍차 800년 묵은 은행나무와 풍차, 빗살무늬 담은 징검돌마냥 하멜과 병영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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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마을 빗살무늬흙돌담 초가집에서 나와 400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 고인돌에 한 사내가 걸터앉았다. '눈이 파랗고 코가 높고 머리가 노랗고 수염이 짧고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여인들이나 입는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것이 우리 풍습과 크게 다른' 20대 중반의 사내가 수인산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고 있었다. 사내는 다름 아닌 병영에 7년 동안 억류된 하멜.

하멜 일행이 병영에 호송된 것은 1656년, 조선 땅을 밟은 지 3년만이고 이곳에 1663년까지 머물렀다. 조선인과 생김새가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은 그들의 병영생활은 오죽했을까, 유달리 추었던 시절, 흉년까지 겹쳐 궁핍한 나날을 보냈다. 병영성에서 허드렛일을 하였고 나막신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구걸까지 해가며 끼니를 때웠다.

병영(兵營)이 있어 생긴 이름, 병영마을

병영마을 정경  500년 묵은 비자나무 곁에서 바라다본 병영마을 정경. 동쪽 수인산과 북쪽 성자산이 둘러싸고 있는 병영은 분지로 천연의 요새, 멀리 병영성문과 은행나무, 병영교회가 한눈에 들어온다
▲ 병영마을 정경 500년 묵은 비자나무 곁에서 바라다본 병영마을 정경. 동쪽 수인산과 북쪽 성자산이 둘러싸고 있는 병영은 분지로 천연의 요새, 멀리 병영성문과 은행나무, 병영교회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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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병영에 압송된 것은 일찍이 병영에 전라도 병마도절제사영(병영)이 설치되었던 점과 무관치 않다. 1417년(태종17년), 광산현(광주시 광산구)에 있던 병영을 당시 영암에 속해있던 도강현(현 병영)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 후 도강현 이름도 아예 병영이 되었다. 1895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폐영(廢營)되기까지 500년을 유지하였다. 병영마을은 군이 주둔하여 번성한 군사고을인 셈이다.

병영성(兵營城)은 이방원의 심복으로 초대 병마절도사였던 마천목이 쌓았는데 그가 꿈을 꾼대로 눈이 녹은 경계를 따라 쌓았다 하여 '설성(雪城)'이라 한다. 강진에 가려면 일부러 병영에 들러 값싸고 맛좋은 설성식당에서 한정식을 먹고 가는데 이 설성식당도 설성에서 나왔다. 맛이 달달하고 깔끔한 강진 쌀로 만든 이 곳 막걸리도 설성 막걸리다.

병영성이 축조되면서 징발자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폐영 당시 1889개의 가옥과 5973명이 살고 있었다 하니 잘 나갈 때는 얼마나 큰 고을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사람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군수물자와 생필품 수요가 급증하자 물자가 전국에서 조달되었다. 이때 물자의 유통을 담당하며 생겨난 상인이 병영상인이다.

병영상인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확보하여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과 함께 전남 5일장에 병영상인이 없으면 장이 서지 못한다는 얘기도 생겨났다. 개성상인(송상), 의주상인(만상), 강경상인(경상), 동래상인(내상)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병영상인은 생소하게 들린다. 최근 병영상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상당한 진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병인상인과 함께 병영이 전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기록이 있다. 소치 허련으로부터 운림산방을 물려받은 미산 허영과 그의 아들 남농 허건은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1916년 돌연 진도의 운림산방을 버리고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갈 형편이 되었던 병영에 이사를 온 것이다.

수인정미소와 병영마을 담 삼대 째 내려오는 수인정미소에 남농의 집이 있었다 전해지는데 어릴 적 한골목에서 해작거리는 남농의 모습이 아련하다. 수인정미소에서 마을 끝 적벽청류로 나가는 골목은 그 깊이 깊다
▲ 수인정미소와 병영마을 담 삼대 째 내려오는 수인정미소에 남농의 집이 있었다 전해지는데 어릴 적 한골목에서 해작거리는 남농의 모습이 아련하다. 수인정미소에서 마을 끝 적벽청류로 나가는 골목은 그 깊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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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목포로 떠나기까지 7년간 성동리 40번지(현 수인정미소 자리)에서 살았고 남농은 3학년까지 병영공립보통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다녔다는 건데 진도와 가까운 광주를 놔두고 병영을 택한 것이 무척 흥미롭다. 

병영마을의 빗살무늬 흙돌담

하멜이 앉아 쉬던 은행나무도 이제 800살이 되었다. 100년도 더 된 병영교회가 은행나무 옆에 자리 잡았고 3대째 내려온다고 자랑하는 수인정미소의 방아 찧는 소리는 이따금씩 마을의 정적을 깨곤 한다. 사전지식 없이 가면 생뚱맞게 보이는 네덜란드풍차와 하멜 기념관이 있으나 뭐니 해도 눈에 띄는 것은 빗살무늬 담. 마을사람들 모두 하멜이 전수하여 쌓은 담이라 하며 '하멜식 담'이라 부르고 있다.

병영마을 빗살무늬 담 하멜이 전수하여 쌓았다는데 근거는 확실치 않다. 다만 다른 마을과 쌓는 방법이 다르고 하멜이 7년간 거주한 점을 들어 추정할 뿐이다
▲ 병영마을 빗살무늬 담 하멜이 전수하여 쌓았다는데 근거는 확실치 않다. 다만 다른 마을과 쌓는 방법이 다르고 하멜이 7년간 거주한 점을 들어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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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담 세부 각도는 15도, 무늬는 빗살무늬, 줄마다 방향을 달리하여 쌓았다. 살 발린 물고기 가시 같기도 하고 열지어선 병사 같기도 하다
▲ 빗살무늬 담 세부 각도는 15도, 무늬는 빗살무늬, 줄마다 방향을 달리하여 쌓았다. 살 발린 물고기 가시 같기도 하고 열지어선 병사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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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담은 일전에 네덜란드 대사가 병영에 들러 네덜란드 방식으로 쌓은 담이라 확인해 주긴 했다. 하지만 하멜이 전수한 담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담이기에 이런 '추정'은 가능하다. 

돌이 비낀 각도는 15도, 무늬는 빗살무늬. 주먹만 한 돌을 한 줄은 오른쪽, 다음 줄은 왼쪽으로 번갈아 쌓았다. 보기에도 올지다. 살 발라놓은 생선가시 같기도 하고 열 맞춰선 병사 같기도 한데 병영성 이웃 담답게 군살 없이 말끔하게 손질되어 있다. 담이 지붕까지 올라 있는 집들은 마치 갑옷입고 있는 병사처럼 보인다.

병영마을 한골목 병영마을골목은 넓고 깊다하여 한골목이라 한다. 하멜에게는 어쩌면 한 맺힌 한(恨)골목이 아닌가 싶다
▲ 병영마을 한골목 병영마을골목은 넓고 깊다하여 한골목이라 한다. 하멜에게는 어쩌면 한 맺힌 한(恨)골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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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마을 한골목 담  병영마을 담은 2미터이상으로 높다. 병영(兵營)이 있었고 상업이 발달한 점과 무관치 않다
▲ 병영마을 한골목 담 병영마을 담은 2미터이상으로 높다. 병영(兵營)이 있었고 상업이 발달한 점과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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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골목은 넓고 길어 한골목이라 부른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성남리, 박동리, 동성리, 남성리, 지로리 등 10개 마을사람들이 이 골목에서 하나가 된다하여 한골목이라 했는지, 혹은 미로처럼 뻗어간 골목 담이 집안까지 다 훑고나와 하나의 담으로 이루어졌다하여 한골목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하멜에게는 어쩌면 고향을 등져 한이 맺힌 곳, '한(恨)골목'이 아닌가 싶다.

담은 성처럼 높아 까치발을 해도 집안을 통 들여다 볼 수 없다. 병마절도사나 군관들이 말  타고 순시할 때 집안이 훤히 내려다보일 것이 염려돼 높이 쌓았다하기도 하고 일찍이 상업이 발달하여 마을남정네들이 장사하러 나가 집을 비우면 아녀자들만 남기 때문에 이렇게 높게 쌓았다 하는 말도 있다. 

병영마을 그슬린 담 병영마을 한골목 담은 1895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폐영(廢營)될 때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쫓고 쫓기는 긴박한 골목이었다. 검게 보이는 담은 그 당시 불에 그슬린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병영마을 그슬린 담 병영마을 한골목 담은 1895년 동학농민군에 의해 폐영(廢營)될 때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쫓고 쫓기는 긴박한 골목이었다. 검게 보이는 담은 그 당시 불에 그슬린 것이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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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마을 여자노인당   마을 한가운데 여자노인당이 자리 잡았다. 여자노인당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눈길이 가는데 알고 보니 전라·경상남도 여러 마을에 있었다
▲ 병영마을 여자노인당 마을 한가운데 여자노인당이 자리 잡았다. 여자노인당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눈길이 가는데 알고 보니 전라·경상남도 여러 마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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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여자노인당. 여탕은 들어봤어도 여자노인당은 처음 보는 것이다. 나중에 찾아본 것인데 주로 전라남도 여러 마을에 여자노인당이 있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한다는 찬하비(攢賀碑, 이 마을 비의 한자는 '讚賀'로 오기한 것으로 보임)에 설립취지를 드러냈는데 '사회정의구현' 대목에서는 너무나 결연하여 웃음이 나왔다.

"우리들은 비록 몸은 늙어서 쇠약하여가나 마음은 날로 새롭게 고쳐나가 가정과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으로서 젊은이들의 본이 되어 고장의 미풍양속을 후손들에게 전승시키고 여생을 즐거움으로 봉사하며 사회정의구현에 함께 앞장서 나가기를 다짐하는 바이다."

수인정미소에서 여자노인당까지 죽 뻗은 한골목, 옆으로 샛골목이 나있다. 샛골목으로 나가야 마을의 속살이 보인다. 속살 중에 제일은 비자나무로 가는 길, 조그만 도랑가에 자리 잡은 담이 참 멋지다.

도랑에 발 담그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을분이 궁금해 하며 담보다 집 앞에 있는 바위를 찍으라고 말한다. 수천 년 묵었다며 자랑스러워하기에 못 이기는 척 하며 한 컷 담았다. 집에서 확인해보니 대문기둥에 새겨진 장미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창덕궁 낙선재 뒤뜰 벽에 그려진 매화그림만 할까마는 촌스러운 듯 정성 담긴 기둥은 미 이상의 미가 담겨 있었다.

굽은 나무가 산소 지킨다고 했던가, 굽어서 마을 지킨 나무가 있다. 동삼인리마을회관 언덕에 자리 잡은 500년 묵은 비자나무다. 병영성을 축조하기 위해 마을 인근 나무를 모조리 베다 썼는데 이 비자나무만은 굽어서 화를 면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마을의 신목으로 나무에 제를 올리고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다. 이 비자나무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이 아름답다.

1660년 전후에는 하멜일행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숨짓던 한(恨)골목이었다. 1895년에는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쫓고 쫓기는 골목이었다. 1920년 전후에는 남농이 해작거리다 늦는 바람에 뜀박질하여 학교에 가던 골목이었다.

병인상인이 600년 동안 분주히 오가던 골목,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노인당과 정미소 앞에 장이 서서 온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골목이었다. 빗살에 낀 때처럼 옛이야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병영마을 담  병영천 상류, 적벽상류로 흘러가는 도랑 곁 담으로 다른 데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 병영마을 담 병영천 상류, 적벽상류로 흘러가는 도랑 곁 담으로 다른 데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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