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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은 영암(靈巖)의 얼굴이다. 사방백리에 큰 산이 없다. 누구 힘 빌릴 것 없이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홀로 우뚝 솟은 신령스런 산, 옹골지고 암팡지다. 북쪽 나주평야에서 보면 통뼈 굵은 골산이요, 남쪽 강진에서 보면 살이 도톰하게 오른 기름진 육산이다. 옛날 옛적 영암에 바닷길이 나있을 때, 달 비낀 월출산은 세계에서 제일 큰 등대, 서해뱃사람에게는 고맙고 반가운 산이었다.

안개에 휩싸여 부유스레한 도갑들녘과 월출산이 영묘하다. 표지석 옆길 따라 죽 가면 도갑사와 죽정마을을 만난다
▲ 월출산과 죽정마을 표지석 안개에 휩싸여 부유스레한 도갑들녘과 월출산이 영묘하다. 표지석 옆길 따라 죽 가면 도갑사와 죽정마을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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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림

고맙고 신령스런 월출산 북서 자락에 구림이 자리 잡았다. 무려 2200여 년 전 일이다. 자연마을로는 역사나 규모면에서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다. 동·서구림리, 도갑리, 모정리를 모두 구림이라 하는데 여기에 죽정, 학암, 서호정, 송정, 취정, 구림 등 열두 마을이 있다. 

백제 적부터 구림 상대포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항이었다. 영암의 자랑, 왕인(王仁)도 이곳에서 일본행 배를 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호강 간척사업과 1970, 80년대 하굿둑 공사로 국제항에서 물구덩이로 전락한 구림 상대포(上臺浦), 이제 상대정(上臺亭)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하고 있다.

작은 물구덩이로 전락한 상대포, 상대정만 남아 옛 일을 기억하고 있다
▲ 상대포와 상대정 작은 물구덩이로 전락한 상대포, 상대정만 남아 옛 일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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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鳩林)은 어디서 온 걸까? 월출산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826~898) 탄생과 관련 있다.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는 구림 성기동(聖基洞) 구시바위(소·돼지 먹이통인 구유바위의 전라도 사투리)에서 빨래하다가 외가 떠내려 오자 이걸 먹고 아이를 가졌다는 건데, 처녀가 애를 뱄으니 보통일은 아니었다.

도선국사 탄생설화가 깃든 바위다. 신령스러운 월출의 기운이 구림에 뻗쳐 이러저러한 전설이 매달려 있는데 도선국사의 탄생설화도 그중 하나다
▲ 국사암 도선국사 탄생설화가 깃든 바위다. 신령스러운 월출의 기운이 구림에 뻗쳐 이러저러한 전설이 매달려 있는데 도선국사의 탄생설화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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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낳은 애기를 마을 숲속 바위에 버리고는 마음에 걸렸는지 3일 후에 가보니 비둘기가 애를 감싸 안으며 잘 보살폈다는 것이다. 이를 신통하게 여겨 다시 거두어 키운 아이가 도선국사라는 것. 이 숲을 비둘기 '구(鳩)'자를 써서 구림이라 하였다.   

죽정마을은 구림 열두 마을 중의 하나

구림 열두 마을 중 하나가 죽정(竹亭)마을이다. 말할 것 없이 오래된 마을이건만, 마을이 생긴 정확한 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죽정마을 선인동에 고인돌이 남아있고 마을에 옛 기와 조각과 댓돌 등이 출토되고 있어 살기 좋은 땅이요, 오래된 마을임은 의심할 여지는 없다.

마을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나무가 많아 멀리서 보면 대나무 정자(죽정)와 같다고 하여 죽정마을로 불리었다. 죽정 음지마을에 죽정서원 터가 전하는데 마을 이름이 이 죽정서원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한편 구림 서호정마을에 죽정서원이 현존하고 있어 이 죽정서원 터와 혼동이 되기도 한다.

죽정서원은 오한공(박성건)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없앤 것을 196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서호정마을 도갑천가에 자리 잡았다.
▲ 죽정서원 정경 죽정서원은 오한공(박성건)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없앤 것을 196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서호정마을 도갑천가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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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 떨며 이른 아침 죽정마을을 찾았다. 월출의 영묘한 기운이 내려앉은 듯 안개 자욱한 죽정의 아침은 부유스름하였다. '죽정마을' 표지석 따라 곧바로 가면 도갑사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죽정마을이다. 죽정마을은 도갑사 아랫마을인 셈이다.

도갑천 따라 언덕 아래에 자리 잡았다. 마을 앞에 흐르는 도갑천을 중심으로 양죽정, 음죽정으로 나뉜다.
▲ 죽정마을 정경 도갑천 따라 언덕 아래에 자리 잡았다. 마을 앞에 흐르는 도갑천을 중심으로 양죽정, 음죽정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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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서 흘러온 냇물(도갑천)은 마을 앞을 휘돌아가고 마을 뒤 야트막한 언덕은 12폭 병풍 몫을 한다. 언덕에 기대어 옹기종기 들어선 집과 소나무, 대나무, 감나무, 돌담이 어우러져 12폭 그림이 되었다. 흙보다 돌이 많은 마을, 죽정은 냇가와 언덕바지 돌로 쌓은 돌담이 자랑거리다. 마을이 오래된 만큼 돌담도 해묵어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도갑천과 언덕배기에서 난 호박돌로 쌓은 돌담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죽정마을 돌담 도갑천과 언덕배기에서 난 호박돌로 쌓은 돌담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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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정의 자랑, 돌담

부지런 부리기는 마을 할머니도 마찬가지. 치울 것 없어 보이는 마당과 고샅길을 하루만 안 쓸어도 푸석해진다며 구석구석 올지게 쓸고 있었다. 할머니 댁 마당과 고샅이 윤이 나고 기름져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에게 눈인사하며 구림마을에 대해 물어 보니 자랑스레 일장연설, "구림은 열두 마을로 이루어졌는디, 저 우 절에서 흘러온 물을 가운데 두고 여기는 양죽정, 건너는 음죽정여. 저 아래에 구림마을이 있는디 최씨, 박씨, 현씨, 조씨, 임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살제... 왜 구림마을 구갱 안하고 여기서 뭐햐?"라 하신다. 할머니는 마을에 대해 아주 소상히 알고 계셨다.

할머니의 손길로 마당이며 돌담고샅이 정갈하고 윤기가 흐른다
▲ 돌담과 대숲이 어우러진 죽정마을 집 할머니의 손길로 마당이며 돌담고샅이 정갈하고 윤기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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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말투는 재미나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눈인사를 하면 여기 왜 왔냐고 묻기보다는 어디서 왔냐며 여기서 뭐하고 있냐는 거다. 함열 함라마을 어른신도 자전거 타고 지나가면서 "어디를, 뭐하고 댕겨?"라 하고 여기서 만난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우리 동네에 볼게 뭐 있다고 고생스럽게 다니냐는 것이다. 따지듯 여기에 왜 왔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말이다.

20년 전만 해도 농촌마을 중에 대나무마을로 유명한 죽정이었지만 그 많던 대나무가 어디로 갔는지,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이 마을 낯닦음용인지 할머니 댁 뒤뜰과 마을 모퉁이에 대숲을 남겨놓긴 했다. 이 대숲 앞에는 천연덕스럽게 쌓은 밭돌담과 그 돌담 아래 앙증맞게 생긴 나무의자가 주인을 기다리며 볕 쐬고 있는데 담임선생님 기다리며 올망졸망 서있는 까까머리 학생을 보는 것 같다. 

의자 주인, 담임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은 채 까까머리 학생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 같다.
▲ 대숲과 돌담 의자 주인, 담임선생님은 아직 오지 않은 채 까까머리 학생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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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집 굴뚝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가 돌담위로 솟고 있었다. 구림의 아침밥 짓는 밥불 연기, 구림조연(鳩林朝烟)은 구림 모정마을의 '원풍정(願豊亭) 12경'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구림조연은 모정마을에서 멀리 구림을 봤을 때 마을 전체를 뒤덮은 흰 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세태가 변하여 연기도 달라졌다. 땔감이 예전과 다른 지금은 흰 연기 자욱한 풍경은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실오리 같은 밥불 연기라도 돌담위로 솟는 밥 짓는 연기는 향토적 서정을 안기며 거칠고 예민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 

밥불 연기는 상처입고 까칠하고 예민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 돌담과 밥불 연기 밥불 연기는 상처입고 까칠하고 예민해진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 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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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의 담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쌓은 지 오래되어 가운데가 무너져 내린 돌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랫배가 불룩한 담도 있다. 하지만 세대와 세대를 잇고 이웃과 이웃을 이어가려는 듯 오래된 돌담에 덧붙여 새 돌담을 계속 쌓아 가고 있다.

새로 쌓은 돌담은 막 시집 온 새댁처럼 얼굴을 붉혔다. 동짓달 아침 햇발에 불그스레 달아 오른 것이다. 새댁 '친정집'은 여기서 가까운 곳이었으면 좋으련만 어딘지 모르겠다. 얼핏 봐서는  둘글둥글 모나지 않은 것이 구림 양반집 규수 같긴 한데 최소한 상처 입고 자란 채석장이나 물 건너 머나먼 곳에서 온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동짓달 아침 햇발에 얼굴을 불그스레 붉혔다. 가무잡잡한 앞집 돌담과 이무롭게 지내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 새 돌담 동짓달 아침 햇발에 얼굴을 불그스레 붉혔다. 가무잡잡한 앞집 돌담과 이무롭게 지내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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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 터 잡은 지 오래된 가무잡잡한 돌담하고 이무롭게 지내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세월의 때가 한 켜 한 켜 쌓일 때 동짓달 아침 햇발에도 얼굴 붉히지 않고 가무스름하게 보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14.12.29-30 익산, 정읍, 영암, 강진, 창평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음력 동짓달)



태그:#죽정마을, #구림, #월출산, #영암,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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