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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 14일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세웠다. 안산 합동분향소에 이어 두 번째 세월호 분향소다. 이날 오후 4시 16분 분향소 개소식을 진행한 대책위는 "팽목항은 많은 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현장"이라며 분향소 설치 이유를 밝혔다.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 14일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세웠다. 안산 합동분향소에 이어 두 번째 세월호 분향소다. 이날 오후 4시 16분 분향소 개소식을 진행한 대책위는 "팽목항은 많은 피해자들에게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현장"이라며 분향소 설치 이유를 밝혔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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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16일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가 침몰한 지 270여 일이 지났다. 아직 팽목항에는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망부석처럼 외롭게 남아 있다.

안산 단원고 3학년 졸업식장에서 살아남은 2학년 학생들의 눈물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떠난 아이들과 대화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온 가족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런데 당사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세월호 참사, 심신 치유하는 일은 아직 첫발도 내딛지 못해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 아니라 가족들과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 국가가 무고한 생명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여기에 더하여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하는 대통령과 위정자들, '기레기' 언론과 극우세력까지 이 더러운 꼴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야만과 지옥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해가 바뀌고 세월호 특별법도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서서히 잊힐 채비를 한다. '세월이 약'이라는 대중 가사처럼 세월호 참사 아니, 세월호 '학살' 사건은 시간을 끌면서 유야무야되어 간다. 유가족에게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던 대통령도 엊그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만날 만큼 만났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 부정선거 논란의 정점에서 터진 세월호 참사는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전 국민적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집권 여당은 책임을 회피했고 야당의 헛발짓 때문에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국가는 왜 목숨을 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쫓기던 유병언이 백골이 되어 나타나고, 이후 청와대 '십상시', '찌라시' 사건이 터졌으며 최근에는 화재, 살인 등 숱한 사건 사고에 묻혀가고 있다.

작년 11월 7일 진상규명 특별법, 금년 1월 12일 세월호 피해 구제와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법적인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정치 사회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특별법을 통과 시킨 새누리당이 임명한 진상규명 위원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진상규명을 할 수 없는 인사들이 추천되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로 아픔을 당한 사람의 심신을 치유하는 일은 아직 첫발도 내딛지 못했다. 반면 그동안 진실규명을 위해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은 연행과 구속, 추가 소환 그리고 엄청난 벌금과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 참석 후 세 차례 조사 받아

세월호 침몰 당시 매우 급하게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어야 할 청와대와 7시간 동안 대통령의 부재는 아직도 명쾌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나도 세월호 참사에 마음이 아파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꾸준히 집회에 갔다. 그러던 중, 세 차례나 피(혐)의자 신세가 됐다.

첫째는 작년 5월 17일 열린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촉구하는 시국대회와 시내 행진 참여다. 시국 대회는 종로를 따라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했지만 '세월호 학살 박근혜 퇴진 노동자 행동' 깃발로 모인 대오는 종로 3가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계동 현대빌딩 앞에서 경찰이 막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의 핵심으로 청와대와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위한 대규모 집회였고, 청와대 가장 가까운 곳까지 행진을 했다. 경찰은 즉각 해산을 명했고, 동시에 인도 위로 올라가 뿔뿔이 흩어지는 대오를 급습해 대규모 연행을 시도했다.

나는 연행은 면했지만, 넘어져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 이튿날 깁스와 목발을 한 채,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5개월이나 지난 뒤에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작년 연말에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겹쳐 출석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작년 6월 28일 시국대회와 맞물려 민주노총이 주최한 노동자궐기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행진 대오가 종각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면서 경찰 벽에 가로막혔다. 이후 경찰이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원래 1박 2일 투쟁으로 기획되었으나 거리 행진이 줄어들었고 민주노총이 총궐기를 주장했지만, 물대포를 쏘자마자 해산하는 바람에 '궐기'라고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행진이 종료되었다.

그 와중에 가장 선두에서 있던 나는 경찰에 연행됐다.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어 그 다음날 저녁까지 갇혀 있었다. 이 유치장에서 만났던 2012년 대선 부정 박근혜 퇴진과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며 2년이 넘도록 1인 시위 등 투쟁하고 있는 한 시민을 만났는데, 그는 당시 3차례 연행된 상태였고 이후 구속되었다. 검찰이 3진 아웃 방침을 밝힌 뒤였다.

세 번째는 8·15 대회 때다. 수사권·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8·15 범국민대회가 시청광장에서 열렸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대회, 청와대를 향한 10만의 함성'을 내걸고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아래 가족대책위),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아래 일반인대책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아래 국민대책위)가 공동주최했다.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작년 연말부터 출석요구서 날아와

유가족의 연설과 김장훈, 이승환의 공연 등이 끝나고 청계천 방향으로 행진했고, 마지막은 종각에서 경찰에 막혔다.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채증되어 역시 작년 연말부터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14일 오전 종로경찰서에서 작년 5월 17일 건과 8월 15일 도로교통법 위반 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해가 바뀌어도 세월호 진상을 밝히라는 수많은 사람들은 경찰에 연행당하고 소환당하고 재판받고 벌금폭탄을 받고 있다.

유병언 일가와 비정규직 선장 등 선원들에게만 모든 책임이 전가되었고 정부관료들은 그 누구도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때 단 한 명도 구하지 못(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라는 국민에게 도로교통법이니, 집시법이니 하는 온갖 법의 잣대로 처벌을 하고 있다.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정부가 왜 그랬냐, 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느냐고 항의하는 국민들은 색출이라도 하듯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잡아들이고 있다.

나도 14일에 세월호 관련 3건의 조사를 마무리했다. 검찰의 추가 조사가 있거나 한 뒤 벌금이 나올 것이고 다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당사자는 대통령이다. 이 말에 대해 책임지고 해명해 달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벌당하고 있다. 국가의 법질서는 무엇인가?

나는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또, 지문을 채취당하고 손도장을 꾹꾹 찍은 경찰 조서가 검찰과 법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치욕으로만 생각하지 않겠다. 이것조차 투쟁의 과정으로 생각할 것이다. 세월호 투쟁의 역사적 기록으로 삼으려 한다.

진도 앞바다에서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음모에 의해 타살당하고 수장된 아름답고 해맑은 영혼을 위로하는 길은 우리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일이다. 평생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는 이런 야만적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태그:#세월호, #청와대, #법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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