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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야경
▲ 당신에게 실크로드- 서라벌 코드, 경주 안압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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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외계인을 믿으세요?

낯선 사람을 알아갈 때, 저마다  판단기준이 있다. 종교, 혈액형, 별자리, 정치성향 등. 내 경우엔 가끔 "외계인을 믿느냐?"고 물어본다. 외계인을 믿는다고 하면 이 사람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싶어 안심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외계인을 믿진 않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라면, 조금 수위조절은 하지만 여전히 즐겁게 대화한다. 하지만 외계인 소리를 하자마자 얼굴에 '나이도 많은 여자가 철이 없구나, 저 집 부모님 고생하시겠네, 쯧쯧'이라고 뜨는 경우는 나도 정색을 하고 나이에 맞는 대화를 이어나가려 애쓴다.

외계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평소 히스토리 HD <고대의 외계인(Ancient Aliens)>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간단명료하다. '고대에 외계인이 있었고 인류의 모든 선진 문명은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지식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나 우수한 문명은 모두 '외계인이 했다' 그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권선징악 스토리처럼 간단명료함이 주는 쾌감이 있어서 좋아한다.

주로 피라미드나 버뮤다 삼각지대가 단골로 나오는 프로그램인데, 어느 날은 천마총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아일랜드의 뉴그레인지나 한국의 천마총과 같은 거대 고분은 고대의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큰 무덤들은 시간여행을 하거나 다른 차원으로 가는 통로였을 거라고 한다. 심지어 천마의 그림을 보여주며 하늘을 나는 말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기술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웃으면서 넘겼는데, 막상 천마총으로 향하려니 마음이 설렌다. 아, 이러다 또 혀 차는 소리 들을라.

천마총의 말

피라미드보다 4000년 앞선 석기시대 거대 고분
▲ 아일랜드 뉴그레인지 피라미드보다 4000년 앞선 석기시대 거대 고분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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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으로 가는 길은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봄이다. 이렇게 화창한 날, 남의 무덤에 들어가는 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생명의 빛이 사라진 무덤 안, 하지만 그 죽음이 주는 무게감조차 초등학생들은 가볍게 극복해 버렸다. 수학여행 시즌인가 보다. 하긴, 죽음이 어려울 나이겠는가. 학교앞에서 판매하는 괴담집처럼 재밌을 거다.

대부분의 한국사 지식은 동아전과에서 배웠다. 전과의 자투리 페이지에 항상 간단한 설화나 민담이 실려 있었다. 어느 날 흰 수탉이 울고 어둠이 물러난 땅에 금궤짝이 등장했다. 석탈해는 금궤짝 안에 들어있던 사내아이를 김알지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미추왕이 되고, 김씨 일족들이 이곳 대릉원에 묻혔다. 이곳 천마총에는 '김알지의 후손' 중 하나였을 시신이 뼈만 남은 몸으로 그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제155호 고분,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까
▲ 천마총 입구 제155호 고분,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까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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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천마도 복제를 보고 있으니 의문이 든다. 이 천마는 기원전 140년전 한무제가 그토록 원한 페르가나의 천마와 같은 천마일까?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 박사는 페르가나 천마는 아라비아산 종마와 연관이 있는 걸로 보인다고 했다. 새하얀 아라비아산 말들은 달릴 때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장관을 이루며, 보통 말은 꼬리를 아래로 늘어트리지만 아라비아말들은 꼬리를 하늘로 감아올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경주 천마총의 천마를 떠올려 보라며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아라비아 말일까? 김알지는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스키타이의 피를 이어받은 무리들이 북방에서 말을 타고 철제무기를 들고 남하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저 말은 꼬리를 하늘로 감아올리는 아라비아 말일 것이다. 그리고 초원의 사람들이 이곳에 오며 삶의 방식도, 믿음도, 함께 따라왔을 것이다. 천마총 금관의 나무는 신에게 향하는 계단이고, 사슴 뿔은 생명을 상징한다. 유목민의 샤머니즘이다.

국보 207호, "고대의 외계인"에 따르면 천마는 시간여행을 상징한다
▲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고대의 외계인"에 따르면 천마는 시간여행을 상징한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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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88호, 3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있다
▲ 천마총 금관 국보 제188호, 3개의 나뭇가지모양 장식과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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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에서 시간여행은 없었다. 초등학생들이 빛의 속도로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천마총을 나서자 가슴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실크로드 여행의 시작점은 이곳 경주다. 동쪽 끝에서부터 시작해 서쪽 끝인 로마까지 갈 예정이다. 공간적으로는 6400km가 넘고, 시간적으로는 2천 년을 넘나든다. 천마총을 나선 지금, 이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에 발을 들인 건지도 모른다.

서라벌 코드

대로변엔 황금으로 치장한 마차가 달리고, 시장에는 이국의 상인들이 높은 목소리로 흥정을 하던 서라벌. 서역에서 들어온 물건과 풍습은 당시 유행의 첨단을 좇던 신라인을 매혹 시켰다. 오죽하면 신라 흥덕왕은 '사치와 호화를 일삼는 백성들이 진귀한 외래품만 선호하고 토산품을 배척하니 문란하고 풍속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며 외래품 금지령을 내렸을까. 금지령은 꽤 세밀해서 "목수건을 짤 때 비취모를 사용할 수 없고, 머리빗과 모자에 슬슬전을 금하며, 말안장에 자단과 침향을 사용하지 못하며, 수레의 깔개로 구수 탑등을 쓰지 못한다"고 했다.

비취모는 인도, 스리랑카 등에 있는 물총새의 깃털이다. 영어로는 킹피셔(Kingfisher). 인도에 있을 때 즐겨마시던 인도산 맥주 이름 중 하나기도 하다. 그리고 슬슬전은 타슈켄트의 푸른보석, 자단과 침향은 남방계에서 나오는 향나무 종류고, 구수나 탑등은 페르시아산 모직 양탄자 종류다. 지금 들어도 신기한 이것들이 이게 다 그 시절에 애용되었다는 거다.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면 당시 사용되었던 신라인의 'it(잇)' 아이템을 볼 수 있다. 황금보검이나 미추왕의 상감유리 구슬, 유리잔과 같은 수입품들이다. 계림로 고분 14호에서 발굴된 황금보검과 같은 형태는 당시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유형했다고 한다. 당시 흑해연안에는 이렇게 금을 세공하여 보석과 유리를 감입하는 기술이 있었다.

보물 제635호, 둔황 막고굴 벽화와 우즈베키스탄 아프랍시압 벽화에서 비슷한 형태의 단검이 발견되었다
▲ 황금보검이라 불리는 경주계림로보검 보물 제635호, 둔황 막고굴 벽화와 우즈베키스탄 아프랍시압 벽화에서 비슷한 형태의 단검이 발견되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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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금보다 유리가 더 귀한 보석이었다. 실제로 5세기 조성 왕릉급 무덤에는 예외 없이 유리잔이 출토됐다. 당시 잘 나가는 집에는 늘 유리잔이 있었다는 거다.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역의 고현정이 이 로만글라스로 연주 하는 장면이 있다. 잘 나가는 미실의 파워를 상징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저 비싼 걸 두드리다 깨지면 어쩌려고
▲ MBC 드라마 "선덕여왕" 연주에 여념이 없는 미실 저 비싼 걸 두드리다 깨지면 어쩌려고
ⓒ 방송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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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인터넷과 국제택배로 해외물건을 '직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낙타를 이용한 교역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유행하던 옷감은 6~7개월 시간이 흘러 이곳까지 닿았다. 실크로드는 이렇게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진 길이기도 했다.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오고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처용도 서라벌의 대표 외국인이다. 그 외에도 미스터리한 외국인은 많았다. 조지 부시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흥덕왕능묘 무인상과 괘릉의 무인상이다.

봄비가 내리는 오후, 외국인을 만나기 위해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를 방문했다. 황량한 입구, 비까지 와서 더욱 인적도 없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능묘가 나온다. 입구에는 돌사자 두 쌍과 무인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 잡고 있다. 눈이 가늘게 찢어진 문인석과 함께 보니 더욱 무인석의 외모가 두드러진다.

옛 사람들은 서역인의 용모를 '심목고비(深目高鼻)'라고 했다. 눈이 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들. 이 무인석도 푹 들어간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는 우뚝하다. 둘둘 걷어 부친 팔뚝엔 힘줄도 서있다. 우람한 체격에 터번을 쓴 용모를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다. 심지어 뒷머리를 보니 곱슬머리다. 과연 어느나라 사람일까? 서라벌 구석구석에는 이렇게 실크로드가 이곳까지 왔다는 증거들이 암호처럼 숨어 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온 첨단유행, 석굴

경주, 실크로드의 마지막 방문지는 석굴암이다. 길을 따라 물건, 사람, 기술, 그리고 문화가 왔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 더 나은 형태로 발전시키는 것. 우리 선조들이 걸어왔던 길이고, 또 석굴암의 이야기기도 하다.

한 번은 모임에서 만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의 석굴암이 대단하다 하는데, 인도에서 아잔타나 엘로라를 보고 오니까 별거 아닌 거 같더라고요." 물론 1.5 km에 걸쳐 29개의 굴이 있는 아잔타나 돌산을 하나 통째로 깎아낸 신전이 있는 엘로라의 규모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석굴암의 관전 포인트는 다른 데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근성과 사고의 전환, 즉 창의력이다.

BC 2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1.5 km에 걸쳐 29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 인도 아우랑가바드 아잔타 석굴 BC 2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1.5 km에 걸쳐 29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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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부터 9세기 사이에 조성. 약 2km에 걸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이 늘어서 있다.
▲ 인도 엘로라 석굴 7세기부터 9세기 사이에 조성. 약 2km에 걸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석굴이 늘어서 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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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명상할 곳이 필요했던 초기불교 승려들. 그렇게 인도에서 생겨난 석굴사원은 실크로드 길을 따라 북쪽으로 퍼져나갔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키질 석굴, 베제클리크 석굴, 막고굴 등 거대 규모의 석굴사원이 지어졌다. 그리고 석굴열품은 신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석굴을 만들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굴을 팔 수 없는 돌의 재질 때문이다. 국토의 90%가 화강암인 나라다. 이 단단한 돌을 석공들이 한 땀 한 땀 쪼아서 불상이나 석탑을 만든다. 석가탑 완공을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몸을 던진 아사녀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거다. 이런 상황이니 화강암을 파서 석굴을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라인의 가공할 창의력은 돌을 파지 않고 쪼기 시작했다.

화강암을 하나 하나 다듬어 돔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석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조립식으로 지은 신개념 석굴이다. 사실은 굴이 아니라 돌로 만든 방, 석실이다. '콜롬부스의 달걀'과 같은 사고의 전환이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고, 안 되면 되게 한다는 근성이 뒷받침된 창의력의 승리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세계 유일의 인조석굴, 석굴암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완공에 40년 걸렸다고 하니까.

신라인의 창의력, 돌을 쪼기 시작하다

신라인들은 씽크빅~창의력 대장인가봐
▲ 석굴암 본존불 신라인들은 씽크빅~창의력 대장인가봐
ⓒ http://www.sukgul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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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 넘치는 방법도 대단하지만, 당시의 높은 미적감각은 내부 디자인도 평범하게 지을 수는 없었다. 석굴암의 돔형 지붕은 그 시절 동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다. 실크로드 저쪽 끝 로마에 가면 가장 오래된 돔 건축물이 있다. AD 120년께 지어진 판테온이다. 길의 반대편에서 시작된 건축양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토함산 자락까지 온 거다. 돌을 쪼아서 석굴을 만들고, 멋을 부려 돔형 지붕을 지은 서라벌 사람들. 멋은 여유가 있을 때 부리는 걸 생각해보면, 잘 살았나보다. 진짜.

하지만 이 대단한 석굴암 관람은 실망스러웠다. 석굴암이 있을 자리에 무슨 상자 같은 간이 건축물이 있었다. 석굴암 입구에 유리벽을 설치해놔서 내부 구조 파악은커녕 겨우 본존불만 볼 수 있다. "사진 찍지 마세요." 안내원이 엄하게 한 마디 한다. 억울하다. 사진을 찍을 만한 볼거리도 없다. 석굴암 내부에 못 들어가더라도 근처에 석굴암 관련 정보나 내부 사진,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모형이라도 전시를 해놓았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유네스코 문화재라고 기대를 하고 산을 올라왔을 외국인들 표정도 애매하다.

더 아쉬운 건 초등학생 단체 관람객이었다. 학생들 200여 명이 우르르 올라왔다. 그러더니 본존불 앞을 멈춰 서지도 않고 통로를 따라 지나갔다. 마치 터널을 지나는 기차처럼. 사실 아이들은 멈추고 싶어했다. 하지만 뒤에서 선생님들이 계속 소리쳤다. "멈추지 마. 뒷사람들 생각해. 그냥 지나가."

그냥 지나갈 거면 뭣 하러 여기까지 왔는가. 아이들 스스로도 어이가 없나보다. "우리 여기 왜 온 거야?"라는 소리가 들린다. 인원 배치나 시간 배분을 효율적으로 해서 인솔을 했으면 본존불 얼굴이라도 보고 갔을텐데.

이 석굴을 만들고자 8세기 신라인은 기막힌 창의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많은 정보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석굴암도 못 보여주고 있는지. 지금의 우리는 왜 근성도 창의력도 없어졌을까.

경주를 떠나기 전 우연히 한 식당에 들어섰다. 기사식당에 가서 백반이나 사먹어야지 싶어서 어슬렁거리며 걷던 차였다. '하와다바- 인디안 스낵바'라고 적혀있다. 가정집 같은 아기자기한 내부에 메뉴는 탈리와 같은 인도음식과 짜이, 라씨와 같은 인도 음료다. 가게 주인에게 가게 이름을 물어보니 인도어로 '하와'는 바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바'는 휴게소. 인도에서 버스 여행을 할 때 쉬던 곳이 '다바'였나보다. 바람 따라 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공간, 정감 가는 예쁜 이름이다.

짜이도 갠지스강을 바라보며 마시던 그 짜이 느낌이 난다. 낮은 찻잔에 찰랑찰랑 넘치게 따라 주는 것도. 카페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음악은 티벳 음악이다. 이상한 기분이다. 서라벌의 실크로드를 찾아 왔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티벳 음악을 들으며 인도차를 마시고 있다. 진짜 천마총 방문 이후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공간에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8세기 서라벌. 이곳에선 비단, 도자기, 사향과 같은 진귀한 교역품이 가득했다. 여인들은 콧대 높은 이국의 상인들을 훔쳐보고, 아이들은 앵무새나 공작새 같은 신기한 동물들에 정신이 팔렸을 거다. 귀족 집에선 밤새 가야금과 함께 서역의 사자춤이 공연되고, 어쩌면 페르시아 양탄자 위에 앉아 로만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라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방문한 21세기의 여행자는 향신료가 가득한 인도차를 홀짝홀짝 마셔대며 실크로드에 첫 발을 디뎠다.

다음 목적지는 중국이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경주, #시간여행, #천마총,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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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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