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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붕 프로젝트 수업의 취지를 아이들에게 알리는 홍보 포스터
▲ 한지붕 프로젝트 포스터 한지붕 프로젝트 수업의 취지를 아이들에게 알리는 홍보 포스터
ⓒ 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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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은영(가명)이가 ○○여상에 입학원서를 내는 날이다. 첫날 일찍 원서를 내고 싶은 은영이의 마음을 알기에 따라나섰다. 학교는 어떤지 입학담당 선생님도 만나 뵙고, 지원하는 관광경영과의 취업전망은 밝은지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침 8시 반, 학교 앞에서 만났다.

다행히 어제 신신당부한 대로 화장은 연하게, 서클렌즈도 빼고 맑고 깨끗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동생이 셋이나 있는 은영인 한때 노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방황도 했지만, 이제는 동생들 키우느라 힘든 엄마의 마음도 헤아리는 속 깊은 아이다.

3차에 걸친 짧은 앙트십 수업에서 진로지도는 사실 무리인 측면도 있었다. "얘들아, 이쁜 것들 오래 못 간다~"로 시작한 이상한 진로지도.

중학교 시절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들러리'로 살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공부가 다가 아니다. 세상은 변했다. 고등학교 가서는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서 취업하고, 또 그러다 필요하면 대학에 가는 길을 생각해보자고. 준비도 안 된 아이들에게 특성화 고등학교를 밀어 붙일 때만 해도 과연 몇 명이나 내 말에 호응해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은영이는 가장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우리를 믿고 따라준 기특한 아이였다.

6명 거울 공주와의 만남

위클래스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로지도 수업을 하는 장면
▲ 한지붕 진로지도 수업 위클래스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로지도 수업을 하는 장면
ⓒ 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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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학교에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앙트로프로너십(entrepreneurship, 창업가정신)수업을 들으면서 우리 엄마들은 처음으로 주변의 문제에서 기회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적 기업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도 그런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주부이자 엄마인 우리들이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동안 엄마로서 쌓아온 우리들의 경험과 재능에 주목하였고, 그것을 내 자녀가 아닌 다른 친구들에게 확대해보자는 취지로 '한지붕 프로젝트'를 창업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찌 보면 가장 까다로운 아이들, 한창 사춘기를 예민하게 앓아서 누구보다 엄마의 세심한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6명의 상담대상 친구들을 맡아서 9차시에 걸친 맞춤 수업을 준비하였다. 수업 이름은 '깨는 엄마'들의 일명 '깨자' 수업. 아이들과 이모처럼, 친구처럼 그냥 같이 즐겁게 9차시를 놀아보자는 취지에서 수업을 기획하였다.

처음 6명의 거울 공주들을 만나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모두 얼굴이 비슷해서 구분이 힘들 지경이었다. 하얗게 비비크림을 바른 얼굴에 새빨간 입술, 아이라이너와 서클렌즈를 낀 눈동자에 앞머리를 내린 단발머리가 한창 유행인가 보다. 잠시도 손에서 거울을 놓지 못하고 수시로 거울로 미모를 확인해야 하는, 외모 관심 극대치의 수다 공주들.

그래도 말을 걸어보니 또 영락없는 16살 중학생이다. 캐릭터 그리기와 만화, 힙합 음악, 메이크업에 관심 많은 소녀들에게 '전시회에 가고 보태니컬 스케치도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으며 우리랑 좀 문화적으로 놀지 않을래?'라고 꼬드겼더니, 한창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놀기 좋아하는 애들은 냉큼 네~라고 대답한다.

놀 땐 놀더라도 공부도 하고 수행도 챙겨서 이미지 관리 좀 하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카톡방을 열어서 수시로 학교 수행 과제물도 확인하고, 이런 저런 수다도 떨며 우린 6명의 거울 공주들과 4개월간에 걸친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지붕 프로젝트 수업

학교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위클 아이들의 보태니컬 스케치 작품들
▲ 복도에 전시된 아이들 작품들 학교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위클 아이들의 보태니컬 스케치 작품들
ⓒ 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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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미디어고의 방송 실습용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아이들.
▲ 한강 미디어고 스튜디오 탐방 한강 미디어고의 방송 실습용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아이들.
ⓒ 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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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관람으로 첫 수업을 열었다. 야외 수업을 먼저 진행한 이유는 학교 공간을 벗어나 자유롭게 대화하며 친숙함을 높이고, 딱딱하고 지루한 수업이 아닌 놀이의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재미있게 미술관을 즐길 수 있도록 퀴즈 활동지와 선물도 준비했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우리들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주었고, 이모라고 부르면서 엄마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학과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아이들이 노트 필기를 시작하고 화장이 옅어진다는 학교 선생님들의 긍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렇듯 16살은 세심한 보살핌만 따른다면 금방 좋아지고, 또 반대로 금방 나빠질 수도 있는 유연한 시기인 것이다.

보태니컬 수업은 아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힐링효과에 집중력을 높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의상과 시각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수연(가명)이와 은영에겐 너무나 즐거운 수업이었다. 아이들 모두 작품에 정성을 쏟았고, 자신들의 작품이 학교 복도 갤러리에 액자로 걸리자 친구들의 칭찬을 받고 자존감도 조금씩 높아져 갔다.

드디어, 내가 맡은 앙트십 수업 차례였다. 앙트십이 이 친구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고, 곧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시작하는 시기에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줄 수 없을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보니 학습에 대한 의욕과 성적도 바닥인 거울 공주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생활의 연장선이 될 것만 같았다.

앙트십의 핵심은 도전과 변화 아닌가? 비록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지언정 이모들의 진심을 알아줄 거란 아이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용감무쌍하게 "이쁜 것들~ 오래 못 간다~"는 이상한 특성화고 진로지도가 시작되었다.

수연과 은영인 처음부터 특성화고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른 친구들도 약간씩 동요는 있었지만, 다들 교실 수업을 따분해하는 빛이 역력해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진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강미디어 고등학교를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특성화고의 수업 현장과 시설, 학교의 교육방식을 들었다. 훌륭한 스튜디오와 기자재, 실무중심의 취업 교육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신세계였고, 특성화고로 방향을 모색하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마침 설명회 시즌을 맞아 학교로 찾아온 많은 특성화고 선배들이 학교에 대한 홍보를 하면서, 6명의 거울 공주들 중 3명이 자신의 적성과 성적에 맞는 특성화고를 택해 원서를 쓰게 되었다. 담임선생님들께서 추천서를 비롯하여 지원하는 학교에 직접 전화를 걸어 담당 선생님과 통화하시기까지, 입학원서를 진행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도와주셨다.

마침내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3명이 전원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처음 한지붕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학교나 우리 엄마들이나 이런 결과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동행해주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이렇게 자신들의 진로로 연결하여 미래를 열어나가는 힘이 있었다.

아띠 인력거의 이인재 대표는 "열정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그 일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이제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아이들이 아픈 기억이나 힘들었던 중학교 시절을 리셋하고 열정을 가지고 자신들의 앞날을 열어가기를, 어려움을 마주쳐도 도전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며, 전원 합격에 내건 공약대로 맛있는 곱창을 사주어야겠다.


태그:#앙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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