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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미어와 파시미나 스카프는 조직이 얇고 섬세해 모든 자수는 손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스카프 하나에 전부 수를 놓는 데 최소 4개월에서 10개월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캐시미어와 파시미나 스카프는 조직이 얇고 섬세해 모든 자수는 손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스카프 하나에 전부 수를 놓는 데 최소 4개월에서 10개월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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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에서의 삶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풀을 뜯고 우두커니 서 있는 소들의 하루만큼이나 단조롭게 흘러갔다. 레(Leh) 시내의 거리에는 매일 가는 식당, 판공초 투어를 알아보기 위해 들락거리던 여행사, 그리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기념품 가게들이 번갈아 들어서 있었다. 똑같은 거리를 걷고 또 걷다 보니 레 시내 중심가를 가득 메운 가게들 안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유리창에 걸린 고운 빛깔의 스카프에 마음이 며칠째 혹하던 찰나였다.

스카프는 사고 싶은데 믿을 사람은 없고

라다크에서는 호객 행위를 하는 이들이 없었다. 식당도 여행사도, 게스트 하우스도 손님들이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릴 뿐. 지나가는 여행객을 붙잡고 끈질기게 늘어지는 히말라야 아래의 '진짜' 인도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나마 들어오라며 손짓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스카프를 파는 가게의 상인들이었다.

아랍 계통으로 보이는 생김새에 능글능글한 말투까지 똑같은 걸 보니 아마 아랍인이거나 북인도 카슈미르 지역 출신인가 보다.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아랍 상인들 사이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일까, 그들이 잠시만 보고 가라며 손짓을 해도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어디에서 왔어요? 오! 코리아, 내 친한 친구도 한국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돼요.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레 시내의 거리에는 매일 가는 식당, 판공초 투어를 알아보기 위해 들락거리던 여행사, 그리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기념품 가게들이 번갈아 들어서 있었다.
 레 시내의 거리에는 매일 가는 식당, 판공초 투어를 알아보기 위해 들락거리던 여행사, 그리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기념품 가게들이 번갈아 들어서 있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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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이놈의 멘트는 히말라야에서도 계속되는지. 순수한 의도로 차를 대접하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 왔건만 이번엔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 몸에 밴 본능적 예감이 먼저 반응한 것 같다.

시치미를 뚝 떼고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가게에 발을 들이니 전형적인 아랍인의 얼굴을 가진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한 번에 전부 보기도 어려울 만큼의 스카프를 바닥에 쏟아내면서 그 수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퍼붓는다.

"무슨 색이 좋아요? 어떤 것을 찾고 있나요? 캐시미어? 파시미나? 울?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다 가지고 있어요."

머리가 아파왔다. 급격히 피곤해져서 얼른 떠나고 싶었건만 그는 손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첫 마수걸이를 해줄 손님일지도. "이건 백 퍼센트 파시미나예요." 순수 파시미나 스카프라며 200달러라는 가격을 호기롭게 부르던 그는 대답이 없는 내 얼굴을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며 급히 말했다.

카펫과 스카프는 인도 북동부 잠무 카슈미르 지역의 특산품으로 세계 최고의 품질로 손 꼽힌다.
 카펫과 스카프는 인도 북동부 잠무 카슈미르 지역의 특산품으로 세계 최고의 품질로 손 꼽힌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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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특별 가격으로 줄게요."

나는 말없이 가게를 나섰다. 누군가의 선심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나쁜 줄은 알지만 그가 방금 제안한 '스페셜 프라이스(Special price)'가 진짜 가격보다 여전히 한참 높다는 것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캐시미어보다 따뜻한 마음을 팝니다, 파루끄 팩토리

우리가 나오자마자 옆 가게에서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부른다.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걷는데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길 위 상점들에 불이 하나씩 들어왔고, 불이 켜진 간판 아래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부르는 그의 느린 손짓을 바라보다 어느새 상점 앞에 서 있었다. 뭔지 모를 좋은 기분에 이끌리듯 들어선 실내에는 방금 전 들렀던 가게의 사분의 일밖에 안 될 것 같은 좁은 공간을 빼곡하게 메운 스카프들이 보였다.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잇고 계시는 파루끄 할아버지. 그 누구보다 정직하게 물건들을 판매하는 분이었다.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잇고 계시는 파루끄 할아버지. 그 누구보다 정직하게 물건들을 판매하는 분이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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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이름은 파루끄. 지금 하시는 이 스카프 사업은 몇 대째 이어오는 전통 가업이라고 하셨다. 혹독한 겨울을 포함한 7개월을 고향인 스리나가르에서 스카프를 짜는 데 보내고 그렇게 겨우내 완성된 스카프를 육로가 열리는 초여름 라다크에 와서 판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스카프의 색깔이며, 자수가 하도 고와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것저것 물었다. 이건 울이고, 이건 실크고, 이건 캐시미어와 울을 섞은 것이고... 구경하는 것마다 일일이 그 원단을 알려주신다. 그런데 최고 중에서도 최고라는 파시미나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파시미나는 안 보이네요? 이전 가게에서 파시미나라며 스카프를 보여주는데 어찌나 비싸던지. 대체 캐시미어랑 파시미나가 뭐길래 그렇게 비싼 거예요? 사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 쉽사리 살 수가 없어요."

내 질문에 파루끄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웃으셨다.

"파시미나를 보여줬다고? 그래 그 가격이 얼마라고 하던가? 레에서 진짜 파시미나 스카프를 가지고 있는 집은 내가 다 알고 있지. 모든 스카프 집이 진품 파시미나를 가진 것은 아니야, 그렇게 흔할 수 없거든. 진짜 파시미나는 웬만해선 진열해두지 않아. 정말 사려고 온 손님에게나 보여주는 법이지. 그리고 진짜 캐시미어나 파시미나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얘기를 믿을 필요가 없어. 진짜를 한 번 만져보면 이후엔 어떤 게 진짜이고 가짜인지 바로 알 수밖에 없으니까."

할아버지가 저 방구석에서 낡은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오셨다.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가문의 이름을 걸 수 있는 물건들만 담긴 보물 상자라고 하셨다. 박스를 열자 스무 장 남짓한 스카프들이 곱게 개어진 채 들어앉아 있었다. 말로만 듣던 백 퍼센트 캐시미어, 파시미나 제품이란다. 선녀의 옷이 이런 촉감이었을까.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스카프는 솜사탕보다 부드럽게 손을 감쌌고, 스카프가 감싼 손에는 금세 따뜻한 온기가 들어섰다. 거짓말도, 조금의 과장도 없이 말 그대로였다.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이 아까 그 아랍인 사내가 파시미나라고 주장하던 200달러짜리 스카프가 가짜였다는 게 확실해졌다. 파시미나는 그 어떤 증명서도 필요 없는, 한 번의 촉감만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보물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속이려 했던 이전 가게의 주인이 무슬림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화가 난 모습이셨다.

"우리 무슬림들은 신 앞에서 한 치 부끄러움도 있어서는 안 돼. 거짓말도 모자라 부정한 이익을 취하려고 하다니,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야. 나는 맹세하건대 한 점 부끄럼 없이 장사를 했어. 사실 외부인들이 파시미나와 가짜를 구분할 방법이 없으니 부르는 게 값일 테지만 나는 언제나 내가 받아야 할 만큼의 가격만을 받아왔어."

그 상자에 있던 스카프 중 유독 시선을 사로잡은 하나가 있어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감히 엄두도 못 낼 물건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 배낭 여행자에게는 몇 주간의 생활비도 될 수 있는 돈이라 그것을 살 수는 없었지만, 자꾸만 미련이 생겨 그것을 놓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할아버지가 조금은 깎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파루끄 할아버지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시며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캐시미어와 울(Wool)이 혼방된 스카프. 울이나 다른 섬유와 함께 짜여진 스카프는 이렇게 촘촘하고 전체적인 자수가 가능하다.
 캐시미어와 울(Wool)이 혼방된 스카프. 울이나 다른 섬유와 함께 짜여진 스카프는 이렇게 촘촘하고 전체적인 자수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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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단다. 그에 걸맞은 품질과 정성 등이 들어가는 법이지.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자신이 파는 물건과 함께 자신의 이름도 파는 거야. 그러니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면 당당하게 백만 달러를 받아야 하고, 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면 만 달러를 받아야 하지. 물건을 그 가치와 맞지 않게 판매하는 건 제 양심을 팔아치우는 일이야.

하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알아두어야 해. 자신에게는 그 물건을 가질 만한 능력이 없으면서 그것을 싸게 가지고 싶어 하는 건 허영이고 욕심이란다. 네가 오늘 만난 그 가게 주인 같은 사람들 때문에 손님들은 특히 관광지에서 장사꾼들을 잘 믿지 않으려 하고 무조건 깎고 보려고 하지. 혹은 그 물건의 진짜 가치를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눈에 불을 켜기도 해. 정말로 갖고 싶다면 그 가치에 맞는 제값을 지불해야 하는 거야."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마음에 두었던 것들 중 비교적 가격이 낮은 스카프 하나를 구매했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가격을 말씀해 주셨고, 나는 거기서 조금의 더함도 보탬도 없이 제값을 지불하고 스카프를 손에 넣었다.

여행자로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어떤 소비보다 올바른 지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비자가 믿고 구매하고 판매자가 자부심을 가지고 판매할 수 있는 바르고 착한 가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랐다. 파루끄 할아버지 같은 판매자와 누군가의 땀과 열정이 깃든 물건을 화폐의 가치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소비가 더 많아지기를 또한 간절히 바랐다.

파시미나 쇼핑 정보 
순수 파시미나 제품은 조직이 얇고 섬세해 많은 자수를 놓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자수가 화려하고 많은 제품이라면 울과 같은 기타 섬유가 함께 섞여 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다만 울 혼방이라고 해서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수를 놓으려면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판매자가 촘촘한 자수가 많이 놓인 스카프를 백 퍼센트 파시미나라고 말한다면 그곳이 믿을 만한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레 시내에서 직접 방문하고 구매한 가게들 중 믿을 만한 가게 두 군데를 소개한다. 다른 가게에서 같은 물건을 흥정해서 더 싸게 살 수도 있겠지만 이 두 곳은 애초에 과도한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정직하게 판매를 하는 가게인 만큼 흥정은 삼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Farooq Arts]
Fort Road, Leh, Ladakh.
+91-9797752919
: 자신 있게 추천하는 곳. 다양한 가격대와 종류의 스카프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정직하게 손님을 대하신다. 흥정보다는 제품의 진품 여부를 믿고 구매하고 싶다면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Ladakh Treasure]
Shop No.2, Hotel Tsokar, Fort Road, Leh, Ladakh.
+91-9622467085
: 잠무 카슈미르 출신의 주인이 운영하는 가게. 가업인 스카프, 카펫, 캐시미어 스웨터 등을 판매하며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학교와 도서관을 짓는 NGO 사업에 쓰고 있다.



태그:#라다크, #레, #캐시미어, #파쉬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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