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의 지하철 3개의 노선을 1시간 동안 타는 20대 후반의 직장인 여성입니다. 지하철 출퇴근 시 특별한 일이 있을까 했는데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마주하니 지하철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바라보게 됐습니다. - 기자 말

10월 초의 어느 날, 오늘도 출근하러 가는 길. 첫 번째 지하철을 탈 때부터 불안했다. 마음은 바쁜데 에스컬레이터는 고장이 나서 앞 사람의 발을 뚫어져라 보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갔다. 지하철 '승강장 진입 중'이라는 안내 멘트를 확인한 순간 환승이 가장 빠른 제일 끝 칸으로 뛰어갔다. 제법 괜찮은 자리를 선점하여 가방을 앞으로 메고 웅크리던 자세에서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세로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첫 지하철을 평소보다 늦게 탔지만 두 번째 지하철로 무사히 환승하면서 '다음 세 번째 지하철에서 아무일이 없으면 지각은 안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해하면서 손목시계를 보지는 않았다.

두 번째 지하철은 7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고속터미널역.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 나가는 이 순간 부터는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행운을 맞기도 한다.

고속터미널역에 도착과 함께 지하철 문이 열리니 문 가까이에 있던 나는 내리려는 사람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아 맨발에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신발에 내 발이 밟혔다. "악!" 소리와 함께 다시 지하철을 탄 뒤 살펴보니 내 발에서는 피가 뚝뚝뚝 나고 있었고, 나는 황급히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지혈을 했다.

다행히 피는 멈추었지만 통증은 계속됐다. 출근길에 춥다고 운동화 신고 가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 한  채 왜 샌들을 신었는지, 누가 밟았는지도 모르니 사과도 못 받고, 다른 사람들은 안 다쳤는데 왜 나만 다쳤는지….

지하철 전광판 고장이 가져온 풍경

짜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렇게 마지막 세 번째 지하철로 환승하려고 발에 힘을 주며 뛰려는데…. 처음 마주하는 풍경을 만났다. 내 옆의 사람들도, 앞에 저 만치 가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뛰지 않고 걷게 만든 이유는? 바로 지하철이 언제 오는지 알려주는 전광판에 '조정중' 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 동안 사람들이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뛰었던 이유는 친절하게 지하철이 언제 들어온다는 문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불친절함이 사람들의 여유로운 발걸음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하철 전광판의 '조정중' 글자를 보고 어떤 사람은 개의치 않고 뛰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발을 다쳤지만 못 뛸 정도도 아니고 이미 첫 지하철을 늦게 타서 지금이라도 시간을 줄이려면 뛰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걸으니 나도 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서 가고 있었다. 저기 옷가게가 있었는데 망했네? 저기 교복 입은 학생은 어디 학교 일까? 저기 할아버지는 이 이른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걸까? 저 여자는 나와 같은 곳에서 내리는 사람인데 나와 같은 지하철을 타고 왔나 보네? 처음 알았네…. 환승 통로를 걸어가는 시간이 3분 남짓 이었을 텐데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됐다.

3의 법칙을 아십니까. 이미지는 지식채널ⓔ에서 방영한 '3의 법칙' 갈무리.
 3의 법칙을 아십니까. 이미지는 지식채널ⓔ에서 방영한 '3의 법칙' 갈무리.
ⓒ 지식채널ⓔ

관련사진보기


혹시 '3의 법칙'을 아시는가. '지식채널 EBS'에서 방송했던 내용이다. 대략은 이렇다. 한 청년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관심이 없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쳐 간다. 두 청년이 하늘을 보고 있다. 약간은 관심을 보이나 이내 무신경하게 역시 지나쳐 간다. 세 청년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길을 가던 사람들 다수가 함께 하늘을 쳐다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무엇 때문인가 하며 군중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단지 심리 실험이지만 세 사람이 모이면 조직이 되고 변화를 새로운 문화를, 이슈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기일발의 상황, 이때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남자가 지하철을 밀어보지만 끄덕도 없는 지하철. 이때 또 다른 사람이 가세하고 바로 이어서 세 번째 사람이 힘을 합쳐 미는 순간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합쳐 결국엔 기적이 일어나고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생명을 살렸다.

결국 대다수를 움직여 지하철을 밀어 사람을 구했다는 기적의 지하철 사고, 바로 세상을 바꾸는 힘, '3의 법칙'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겪은 지하철 출근 길 상황은 3의 법칙이 만들어낸 '느림의 미학'이다.

그러나 다음 날 지하철 전광판의 '조정중' 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지하철 도착 시간을 알려주면서 나뿐만 아니라 모두 지하철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출근길 전쟁은 시작되고 있다.


태그:#지하철, #3의 법칙, #느림의 미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