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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에는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있다는데 그 이름이 '토끼비리'이다. '비리'는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일컫는 말이다. 토끼비리는 토끼가 다닌 벼랑길이라고 하여 토끼비리라고 하는 건데, 왕건이 토끼를 만나 살 길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길을 가다보면 30cm도 채 안 되는 곳도 지나게 된단다. 조선 시대,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길목에서 가장 험한 길이었다고. 삼국시대 성인 고모산성이 있는데 이 성과 토끼비리라는 그 지역 지형을 잘 이용하면 적의 공격을 막으며 공격하기에 좋았다고 한다.

토끼가 다닌 길이라고 하여 토천이라고도 부르는 토끼비리가 없었다면, 아니 그 길을 마침 왕건이 보는 데서 지나간 토끼가 없었다면, 왕건은 그를 쫓는 견훤의 손에 잡혀 죽을 뻔했다. 갈 길을 찾지 못하여 머뭇거리던 왕건이 제때 몸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내심 괜한 상상도 해본다.

길은 여는 것이고 도로는 만드는 것이다

<길이 학교다> 책표지
 <길이 학교다> 책표지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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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길이 참 많다. 길이도 제각각이고 모양도 여러가지며 만드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근데,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런 도로가 우리나라엔 20세기 들어서나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길이 없었다는 말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길은 있으나 도로는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재밌는 것은 길은 여는 것이고 도로는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들이 꾸준히 다니며 남긴 발자국 흔적들을 따라 길을 열었다.

말 그대로, 일부러 길을 만든 게 아니라 자연스레 길을 조금씩 열어간 셈이다. 반면, 도로는 일부러 재료와 품을 들여 만드는 것이고. 서양의 길을 연 로마가 바로 도로 만들기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길이 곧 서양의 길이 되었으니까.

서양의 길은 동양의 길보다 인공적인 것이 특징이다. 동양의 길이 시골 처녀처럼 소박하다면, 서양의 길은 도시 처녀처럼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즐겼던 서양인에게 길은 새로운 곳을 빠른 시일 내에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였다. 따라서 서양에서 길은 성장과 번영, 그리고 발전을 의미한다. 이런 서양의 길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로마의 도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을 만큼 로마는 도로의 나라였다.

...(중략)... 로마는 다른 민족의 문화까지 끌어안는 포용력과 단숨에 먼 지역까지 달려갈 수 있는 고속도로를 바탕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다. 특히 도로는 작은 도시 국가로 출발한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로마의 도로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그리스, 더 나아가 프랑스, 독일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이후 로마의 도로는 북유럽, 스페인,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이어진다. 총 29개 노선으로 이루어진 도로의 길이가 8만km이며, 여기서 갈라져 나온 지선까지 합치면 무려 15만km로 지구를 약 세 바퀴 반 돈 거리이다. 로마는 상대국을 정복한 뒤에 자기 나라와 같은 방식의 도로를 만들었다. 이 길을 따라 로마의 제도와 문화가 빠르게 전파되었고, 식민지로부터 빼앗은 노예와 물자가 로마로 들어왔다.-<길이 학교다>, 36.

지은이 말마따나 로마와 그리스를 통해 서양의 길이 지닌 특징을 말하고 중국을 통해 동양의 길이 지닌 특징을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해보일 수는 있으나, 인공적인 재료와 방법으로 각종 도로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사람과 물자가 자연스레 오가는 흐름을 따라 길이 '생겨나는' 방식은 분명 다르다.

인생길에도 흐름을 따라가는 길도 있으며 특정한 목적과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길이 있다. 그 둘은 때로 어우러지기도 한다. 도로와 길은 그 이름에서 보듯 다르면서 같고 같은 것 같으면서 다르다.

지리 교사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길'을 세 가지 뜻으로 나누어 알려준다. '이동로'를 뜻하는 길,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을 뜻하는 길,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길. 이러한 여러 가지 길의 뜻 중에서 "이동하는 길이 들려주는 이야기, 길에 펼쳐진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역사 그리고 나와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노라고 하였다.

지구 위를 수놓는 수많은 길 중엔 '큰 문이 되는 고개' 또는 '큰 고개'를 뜻하는 대관령 길도 있고, 미국의 동부에 첫발을 디딘 유럽 대륙 이주민들이 서부의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로키산맥도 있다. 때로는 산을 아예 통과하는 터널이라는 길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스위스 남부 알프스 산맥 아래를 뚫어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세계 최장 터널이 고트하르트 터널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인생길을 헤쳐나가듯 길을 넘기도 하고 열기도 하고 심지어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제주 올레길처럼 길과 사람과 이야기가 버무려진 길을 찾아내기도 하고, 사람들이 편하게 가기 위해 길을 열고 도로를 만들어 동물들이 오가는 길을 막기도 한다. 어떤 길은 그래서 생명길이 되기도 하고 어떤 길은 그래서 '로드킬'이 되기도 한다.

길은 자연스레 생긴 길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낸 길도 있다. 수많은 강이 그렇듯 자연이 만들어낸 자연스런 강이 있는 반면, '한반도 대운하'에서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전국 강과 땅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입혀 자연에 생채기를 낸 인공적인 강도 있다.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길이라며 운하를 찬성하는 이들은 지금 곳곳에 생긴 인공구조물들이 얼마나 자연과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는지를 보며 길이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동서양의 길을 묻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길을 묻고 자연과 인간의 길을 물으며, 책은 다양한 길에 담긴 사람과 인생과 역사를, 지구를 돌아보듯 여기저기서 한 움큼씩 집어내었다. 온갖 길을 어떻게 다 찾아내고 알려줄 수 있을까. 그저, 세상 온갖 길을 조금 조금 들여다보며 인생길의 갖가지 뜻과 이야기도 조금 조금 들여다볼 뿐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늘 갈 길을 찾고 갈 길을 묻는다. 묻고 찾고 차곡차곡 걸어가는 길 위에 인생길이 더불어 생긴다. 우리는 늘 길 위에 길을 새긴다. 책은 그렇게 꾸역꾸역 길을 보여주며 사람들이 지나갔고 지나다니는 길을 묻는다. 지나갔고 지나가야할 인생길을 묻듯이.

덧붙이는 글 | <길이 학교다: 산길, 강길, 바닷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든 역사>(조지욱 지음/ 서울: 낮은산/ 2013/ 13,800원)



길이 학교다 - 산길, 강길, 바닷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든 역사

조지욱 지음, 낮은산(2013)


태그:#길이 학교다,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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