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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아레데 다리의 모습.
과거에는 연어를 잡는 어부들을 위한 다리였지만 현재는 관광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캐릭아레데 다리의 모습. 과거에는 연어를 잡는 어부들을 위한 다리였지만 현재는 관광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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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가장 북쪽 해안 도로변에는 캐릭아레드 로프(Carrick-a-Rede Rope)라는 다리가 있다. 과거 연어를 잡는 어부들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다리였지만 현재는 관광 목적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이름처럼 나무판자와 밧줄로 만들어진 이 다리의 길이는 20미터, 바다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약 30미터의 규모를 자랑한다.

북아일랜드의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라는 여행가이드 사이트에서는 이 다리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10대 다리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가장 실망한 여행지 중 하나'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0미터의 다리를 건너기 위해 5.8파운드(한화로 약 만 원)의 입장료를 내야 하니 관광객의 입장에선 비싼 입장료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엔 나 역시 다리 하나를 건너는 데 6파운드 가량을 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냥 멀리서 보이는 모습만 사진으로 남기려 했다. 그때 남편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 우리가 평생 이곳에 또 언제 와 보겠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그래. 내가 언제 또 이 다리를 건너리. 설령 또 이곳을 방문한다고 해도 내가 또 다리를 건널까?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이곳에 다시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자신을 위로하며 우리는 캐릭아레드 로프 다리로 향했다.

20미터 길이 다리 건너는 데 '만 원' 투척한 이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제주도의 올레길과 같은 해안도로를 걸으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제주도의 올레길과 같은 해안도로를 걸으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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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를 내고 다리에 관한 팸플릿을 읽으면서 제주도의 올레길 같은 긴 등산로를 한참 걸어갔다. 다리까지 가는 산책로는 유모차를 밀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잘 닦여져 있어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기에도 괜찮았다.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돈을 내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는 것 이상으로 주변의 자연경관은 장관이었다. 탁 트인 해안절벽 아래로 부딪히는 파도를 보고 있으니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고민과 걱정이 파도와 함께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바닷가 중간 중간 떠 있는 작은 섬들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압축됐다. 흐린 날씨에도 이렇게 좋은데 해가 뜨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럴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아일랜드 날씨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런 멋진 풍경을 지나칠 수는 없지. 카메라를 꺼내 가장 좋은 구도에 놓고 사진을 수차례 찍어봤지만 사진기가 안 좋은 것인지, 사진을 찍은 기술이 부족한 것인지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없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만큼 풍경이 사진 속에는 담기지 않아 못내 안타깝다.

그렇게 천천히 우리는 바닷가 산책로를 30~40분 가량 걸었고 드디어 돈값을 못한다는 다리 앞에 도착했다. 다리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사진으로는 담기 힘들었던 해안절벽과 파도의 풍경들
 사진으로는 담기 힘들었던 해안절벽과 파도의 풍경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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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 갔다가 오세요. 난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자기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다리를 안 건너면 여기 들어온 의미가 없지."
"엄마, 내가 도와줄까? 내 손잡고 걸으면 하나도 안 무서워."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0미터라고 했던가? 그 이상이 되면 높이에 대한 느낌이 비슷하다고 했는데... 30미터 높이의 다리 앞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는 신세가 돼 버렸다. 다리가 꽤 견고하게 설계돼 있었고, 다리 길이도 생각보다 짧은데도 너무 무서워 순간 '내가 여기 왜 온 것인가?'하는 후회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4살짜리 아들은 나보다 더 거침없이 다리를 건넌다. 혼자 건너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려 아빠와 함께 손을 잡고 건넌다. 다리를 건너는 것이 재밌는지, 아직 공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다리를 건너면서 흔들고 쿵쿵 뛰기까지 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멀미가 나고 현기증이 났다.

반대쪽에서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드는 남편과 아들.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믿고 온몸에 힘을 준 뒤 손으로 다리 난관을 꽉 잡은 채 20미터도 채 안 되는 짧은 다리를 건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결코 짧지는 않았다.

(위) 캐릭아레데 다리 앞에서 상주하고 계시는 아저씨. 다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한 번에 10명 이상 건널 수 없기 때문에 인원수를 제한해서 건너게 한다.
(아래) 다리 앞에서 건너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모습. 짧아보이는 다리였지만 결코 짧지 않은 순간이었다.
 (위) 캐릭아레데 다리 앞에서 상주하고 계시는 아저씨. 다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한 번에 10명 이상 건널 수 없기 때문에 인원수를 제한해서 건너게 한다. (아래) 다리 앞에서 건너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고 있던 모습. 짧아보이는 다리였지만 결코 짧지 않은 순간이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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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깨달음

떨어질 확률도 거의 없는 그 다리가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아마 다리를 건너는 자체가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높은 곳에 다리가 있으니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 다리 밑에는 거친 파도가 불고 있고 행여라도 내가 떨어지면 저 무서운 파도가 나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생각, 저 파도 밑으로 떨어지면 나는순식간에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인생도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나?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온갖 변수를 미리 떠올리며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타협하고 포기했던가...

여행지에서 만난 자연은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또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내가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드넓은 자연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우물 속에 갇힌 채 과거의 모습을 반성하지 못하고 옹졸하고 편협한 내 시각을 버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그렇게 무사히 다리를 건넜고 다리 너머에서 또 한 번의 멋진 풍경을 감상했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절대 볼 수 없었던 꽃, 풀들과 바다의 모습에 또 한 번 감탄을 하며 그렇게 여행을 계속했다. 비록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다리를 한 번 더 건너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처음 공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시간 남짓의 여행은 내게 작은 희망을 준 시간이었다. 적은 입장료를 내고 더 큰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던 시간, 다음에 이 곳에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내 발을 내딛으리라.

다듬어지지 않은 산책로가 해안절벽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산책로가 해안절벽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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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캐릭아레데 다리에 관한 정보 사이트: http://www.nationaltrust.org.uk/carrick-a-rede/



태그:#아일랜드, #북아일랜드, #해안절벽, #캐릭아레데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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