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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멀다하고 밖으로 쏘다니는 내가 '모빌 홈'에 산다고 하면 듣는 사람 모두가 한마디씩 꼭 하고 넘긴다.

"워낙 산을 좋아하고 밖으로 나다니시더니 집조차도 모빌 홈이시네요. 호호호."

글쎄, 틀린 말은 아니다. 모빌 홈은 미국의 이동식 주택으로 바퀴가 달려 있어서 필요하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모빌 홈에 사는 이유는 따로 있다. 7~8년 전 미국 주택시장이 하늘 높은 줄 모를 때 거품 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렸다. 수입에 어울리지도 않게 욕심 부려 집을 장만했다. 하지만 아이들 아빠와 이혼을 하게 되면서 손에 쥔 건 집값보다 더 많이 남은 융자금이었다.

새 집 찾아 뛰었지만... 집 구하기 쉽지 않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숏 세일'을 통해 집을 처분했다. 숏 세일은 집값이 떨어져 집을 팔아도 빌린 융자 금액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제도다. 기존의 집 판매대금을 전부 은행에 갚는 조건으로 추가 지불해야 할 융자금을 없애주는, 일종의 '빚 탕감' 제도다.

집을 팔고 났더니 나에게 남은 것은 짐뿐이었다. 창고가 터지기 일보 직전일 정도로 장비들이 넘쳐났다. 산에 다닐 때 쓰는 장비들을 포함해 결혼 생활 20여 년 동안 사서 모아두었던 짐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 짐들을 수납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느라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 조막만한 아파트라도 얻어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넓은 크기의 렌트 하우스를 알아봤다.

그러나 최소한의 비용으로 개인 주택 크기의 집에 살고 싶은 사람이 나 혼자뿐이겠나. 적은 돈이면 작은 크기의 집을 구해야지 언감생심 넓은 집을 원하는 것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계속 흘러 숏 세일로 정리된 집을 비워줘야 하는 기한이 점점 더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도 갈 곳을 구하지 못해 하루가 다르게 마음만 궁색해져 가고 있었다.

모빌 홈 내 깔끔하고 실용적인 구조의 부엌
 모빌 홈 내 깔끔하고 실용적인 구조의 부엌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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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집을 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고속도로 옆 길가에 쭉 하고 늘어선 모빌 홈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자 곧바로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20년도 더 된 예전 일이 떠올랐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도의 초청을 받아 모빌 홈에 살고 있는 한 부부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조립식 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창문 몇 개가 달려 있고 알루미늄 새시로 덧댄 삐걱거리는 대문이 고작인 그런 건물이 아니었다. 내가 방문했던 그 부부의 모빌 홈은 내게 주택 공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평범하고 밋밋한 조립식 건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안에 들어가 내부를 보면 다른 평범한 개인용 주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장이 약간 낮다는 것과 얇은 벽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좋지 않아 냉난방비가 많이 든다는 것 정도만 차이가 났다.

가까이 위치한 옆집과 구분되는 별다른 담장이 없다 보니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불편한 주택구조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나를 초대해 준 부부는 다른 말을 했다. 이 부부는 단 둘이 살았다. 두 사람 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일을 한다. 주말에는 함께 쇼핑을 하거나 연주회를 다니거나 여행을 떠났다. 이처럼 외지 출입이 잦은 두 사람에게, 옆집과 가까이 붙어 있는 집은 오히려 범죄예방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였다.

사실 모빌 홈 단지가 그렇게 귀한 광경은 아니다. 평소 시내 외곽으로 산행을 가든가 캠핑을 가게 되면 늘 보게 된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모빌 홈 단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을까. 하루라도 빨리 이사 나갈 집을 구해야 할 만큼 절실한 내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이 들어 아이들이 떠나게 되고 혼자 남아 살면 어떻게 될까 고민하게 됐다. 운신도 어렵고 하니 모빌 홈 같은 주거 형태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기 수월하고 청소나 관리가 굳이 필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모빌 홈 단지가 눈에 들어오는 데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에 끌리듯 마음이 움직였다. 이전에 방문했던, 단지 내에서 이사가 가능했던 유닛 두 개를 둘러봤다. 그러나 세 번째로 본 집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계약 후 2주 만에 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 벌써 햇수로 5년째다.

비 오고 개인 후의 멋진 풍경.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모빌 홈 단지
▲ 모빌 홈과 여왕궁 비 오고 개인 후의 멋진 풍경.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모빌 홈 단지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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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출 것 다 갖춘 '여왕궁', 남부럽지 않다

지금 집에 대한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음 같아서야 집주인에게 얘기해서 오래된 카펫을 바꾸고 낡은 샤워문도 새로 갈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집안의 모든 집기와 가구들을 다 밖으로 들어내는 수고를 내가 직접 해야 한다. 그 부담 때문에 그저 대충 깨끗이 치우고 사는 데만 마음을 다해 지내고 있다. 그것만 빼면,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정말 좋아한다.

모빌 홈에서 내가 조물락거리며 사는 모습
▲ 모빌 홈과 여왕궁 모빌 홈에서 내가 조물락거리며 사는 모습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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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이면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탓에 전기료가 눈 돌아갈 정도로 많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시원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비좁은 공간으로 아들놈들 친구가 대여섯 명씩 찾아온다. 독서실마냥 붐비지만 누구라도 놀러오고 싶은 집으로 여겨진다. 그 감사함에 비하면 전기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기요금을 감당할 정도는 되는 내 벌이에 대해서도 천지신명께 감사드릴 일이다. 때문에 이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것뿐이 아니다. 지루한 여름이 끝나고 찬바람 부는 가을을 훌쩍 넘으면 짧은 겨울에 들어선다. 정말 몇 달 안 되는 겨울 동안 이따금씩 내리는 세찬 빗발을 즐기는 행복을 남들은 모른다.

이곳 미국 캘리포니아(LA)에는 밤중에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사는 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다. 도시의 끝자락에는 백두산보다 높은 큰 산맥이 있다. 이 도시를 넘어 사막을 향해 가던 비구름이 산맥에 막힌다. 저녁이면 몰려드는 해무와 만나 함께 비가 되어 뿌리는 시간이 보통 한밤중이다.

텃밭과 꽃들이 어우러진 손바닥만한 우리집 뒷뜰
▲ 모빌 홈과 여왕궁 텃밭과 꽃들이 어우러진 손바닥만한 우리집 뒷뜰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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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히 자다가 '후드득'하는 소리에 깬다. 얇은 모빌 홈의 벽 너머로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를 듣는다. 낮고 규칙적인 음률로 지붕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괜스레 심란해져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늘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사막의 바짝 마른 선인장처럼 지낸다. 그러다가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을 지내고 새로이 맞는 청명하고 맑은 공기의 아침이 얼마나 개운하고 깔끔한지...

가끔씩 찾아오는 친구들과 차 한 잔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뒤뜰이 있다. 한여름 내내 까칠한 내 입맛을 달래줄 토마토와 상추를 화분에 심어 가꾸는 공간도 있다. 좋은 햇빛 아래 빨래를 널어 말릴 곳도 있다. 그 엄청난 양의 장비들을 보관할 수 있는 자그마한 창고까지 차고 앞에 자리 잡았다. 또 하나, 햇수로 5년 동안 단 한 푼의 월세도 올려 받지 않은 착한 집주인까지 있다.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나는, 제 집 가진 모든 이가 부러워하는 '여왕급 세입자'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태그:#모빌홈, #여왕궁, #해무, #텃밭,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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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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