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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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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모르는 처지였다. 더구나 노동법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노조운영에 관한 한 김성길 지부장한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길은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 주로 관계기관에 진정을 하거나 건의, 호소하는 정도였다. 물론 이런 방식이 유효할 때도 있지만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김성길 지부장은 상당한 야심을 품고 지부장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노조를 꾸려나가다 보니 조합원 가입도 시원찮고 관계기관에 건의한 거창한 사업계획도 관철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세운 거창한 계획이란 청계천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기 위한 자금으로 5천만 원 정도를 관계기관에 요청하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건의가 묵살될 조짐이 보이자 김성길은 전테일 친구들인 간부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노동청장실을 들어 엎으라고 부추겼다. 노동청장실을 들어 엎으면 사회여론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들은 지부장의 요구를 가지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그의 말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심각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지부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일이 잘못 풀리면 도리어 책이 잡히면 노조는 결국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결론이었다(당시에는 이런 정도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중과 유리된 싸움을 무모하게 벌여 모험적으로 일을 추진했을 때 결과는 조직 자체를 파괴 시키지 않겠는가 하는 직관에 의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지부장의 지시를 거부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도 지부장을 못하겠다."

김성길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지부장직을 사임했다.

김성길 지부장이 2월 25일 사임하고 임현재가 잠깐 동안 지부장 직무대리를 했다. 노조는 4월 6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지부장에 구건회, 사무장에는 김윤근을 선출했다.

구건회와 김윤근은 김성길이 사임하자 신기효가 소개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구건회는 서울운수노조 지부장을 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신기효는 전태일 선배였다. 전태일이 미싱을 하다가 재단사가 되는 것이 노동자편에 서서 일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재단을 배울 무렵 신기효가 재단사로 있었다. 전태일은 그 사람 밑에서 재단보조로 있었다.

"너희들이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잘하는 사람이 일단 와서 해야지 않겠냐?"

신기효는 전태일 친구들한테 구건회와 김윤근을 소개 시켜 주었다. 이소선은 삼동회 친구 중에서 하나가 지부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최종인이 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최종인은 자신은 법도 잘 모르니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이소선은 최종인을 붙들고 비지땀을 흘리며 설득했다. 아무리 해도 안 돼 길래 아카데미에 있는 다른 선생님들을 동원해서 설득했는데도 최종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구건회가 지부장이 되었다. 노동조합을 이끌어 나가는데 이소선이 보기에 아무래도 이상했다. 조합원을 중심으로 투쟁을 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다. 업주들을 불러다놓고 고양이 쥐 잡듯이 공갈, 협박을 가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물론 때로는 그와 같은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새끼가 뭔데 맨날 사장들 데려다가 저래 가지고 우리 이미지를 버려 놓는 거야."

차츰차츰 노조간부들한테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구건회, 김윤근은 한술 더 떠 이소선한테 보따리를 든 채 사무실에 오지 말라고 했다. 이소선은 여전히 중앙시장에서 중고 옷 장사를 하고 있었다. 조합간부 대부분이 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어서 이소선이 부지런히 장사를 해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소선의 일과는 정해져 있었다. 아침에 노조간부들과 함께 사무실에 출근해서 사무실을 깨끗이 치워놓고 중앙시장 가서 장사를 하려고 보따리를 푼다. 노조가 못 미더우면 낮에 점심시간에 사무실에 갔다 왔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사무실에 가서 조합간부들하고 함께 퇴근해서 곧바로 집으로 간다.

이런 그를 두고 보따리를 가지고 사무실에 오지 말라니! 그를 사무실 출입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자신들이 나서서 이소선 앞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조합원들을 시켰다. 그 말을 들으니 이소선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보따리를 이고 평화시장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의 입에 찝찔한 눈물이 흘러 들어왔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이소선은 쓰러져버렸다.

그날도 그는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평화시장에 있는 노조사무실에 내가 갈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소선은 그 생각만 하다가 눈이 붓도록 울기만 하고 장사를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보따리를 평화시장 사무실 옆 화장실에 놓고 들어갔다. 이소선이 보따리를 밖에다 놓고 들어온 것을 눈치 챈  그들은 노골적으로 이소선을 박대했다. 지부장이 내세운 이유는 이소선이 노사 관계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사무실에 갈 테다. 안 그러면 나는 살 수가 없어.'

이소선은 3층 가게에서 전태일 친구를 불러내었다. 그들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없는 틈을 타서 잠깐씩 노조 간부들을 보고 나왔다. 저녁때는 보따리를 이고 평화시장 밑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퇴근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소선은 너무나 불안했다.

"종인아, 나 거기에 못 오게 하면 나는 죽고 못 산다. 알았지?"
"걱정 마세요. 우리가 좀 배워서 잘 만들어 놓을 때까지 어머니가 좀 참고 계세요. 개새끼들 여기가 어딘데 어머니를 못 오게 하는 거야."

최종인은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에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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