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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이 흐린 날씨 속에 웅장하게 서 있다. 건물 오른쪽 도로로 50m가량만 들어서면 당시 도청으로 사용되었던 경상감영이 우측에 있고, 거기서 다시 왼쪽 맞은편에 헌병대(구 대구병무청 건물), 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등이 있었다.
 장진홍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이 흐린 날씨 속에 웅장하게 서 있다. 건물 오른쪽 도로로 50m가량만 들어서면 당시 도청으로 사용되었던 경상감영이 우측에 있고, 거기서 다시 왼쪽 맞은편에 헌병대(구 대구병무청 건물), 우편국(현 중앙우체국) 등이 있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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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5일, 흐린 날씨에도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은 웅장한 위용을 뽐내며 잘 서 있었다. 폭탄을 맞은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여느 날이면 하루 종일 북적댔던 대구 시내 중앙통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행인조차 거의 없었다. '국경일'을 '휴일'로 알고 모두들 시외로 야유를 나간 것인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드문드문 보이는 거리의 태극기뿐인 듯 느껴졌다.

조선은행, 식산은행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으로, 현재로 말하면 한국은행이다. 그런가 하면 식산은행은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 강화를 위해 일본이 설립한 은행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실질적 관리를 했던 식산은행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경제 침략에 큰 역할을 했다. 식산은행의 주요 업무는 농촌 수탈에 자금을 대 주고 식민지 산업을 지원하는 일이었고, 은행의 일반 업무도 보았다.
1927년 10월 어느 날, 오늘의 필자처럼 장진홍 의사도 이 건물 주위를 답사했을 터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한산한 것이 아니라 거리는 인파로 들끓었으리라. 불과 50M 인근에 경북도청(경상감영 자리)이 버티고 있고, 현 중앙우체국 자리에 대구우편국과 대구전신전화국이, 그리고 현 대구근대역사관 자리에 식산은행 대구지점이,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대구경찰서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 조선은행 대구지점 주변은 정치과 경제 그리고 정보통신이 밀집된 대구 최대의 중심가였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는 여관 사환 박노선에게 "내가 어제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으니 이 벌꿀 상자들을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벌꿀 선물로 위장된 네 상자에는 장진홍 의사가 직접 제조한 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박노선은 별 의심 없이 상자들을 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그는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아 "선물 배달 왔습니다" 하며 벌꿀 상자를 건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다가와 나무상자를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폭발 직전이었다.

장진홍 의사 사형 판결 동아일보1930년 2월 18일자 보도기사(한자에 붉은색 토가 달린 것은 대구근대역사관 게시물을 촬영한 때문임)
 장진홍 의사 사형 판결 동아일보1930년 2월 18일자 보도기사(한자에 붉은색 토가 달린 것은 대구근대역사관 게시물을 촬영한 때문임)
ⓒ 대구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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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흥삼과 길촌결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한 은행원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곧 바로 경찰에 신고된 것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그런데 옮긴 지 1, 2분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

'제2의 거사' 도모하며 장진홍 의사 도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있는 장진홍 의사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있는 장진홍 의사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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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이 의거는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래도 장진홍 의사는 신속히 몸을 피해 일경의 체포를 벗어났다. 의사는 수사망이 점점 압축되어 오자 1928년 2월 일본까지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장진홍 의사는 숨어 지내기만 하지 않고 2차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결국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1929년 2월 19일 대구로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의사는 모든 일을 혼자서 도모했다고 대응했다. 물론 재판 결과는 두고볼 것도 없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열린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의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1930년 음력 6월 5일 밤, 의사는 감옥 안에서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자"고 결심했다. 의사의 나이 아직 새파랗게 젊은 35세였다.

지난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군들이 대구 남구 미군부대 위 하늘에 쏘아올린 불꽃 축포
 지난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군들이 대구 남구 미군부대 위 하늘에 쏘아올린 불꽃 축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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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은 미국 국경일, 8월 15일은?

지난 7월 4일, 대구 남구 일원의 하늘은 불꽃놀이로 가득했다. 건국 겸 독립 기념일을 맞아 미군들이 쏘아올린 것이었다. 폭죽이 하늘을 부수는 소리는 남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윽고 신천을 건너 수성구까지 뒤흔들었다. 장진홍 의사의 폭탄에 박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건물의 유리창들이 파편이 되어 대구역까지 날아갔 듯이. 미국 독립기념일에 아무 관심이 없던 나도 그래서 7월 4일이 미국의 중요 국경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다.

오늘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기념일이다. 하지만 모두들 '휴일'을 맞아 놀러들 간 것인지 대구 시내는 평상시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그리고 지금은 밤, 여름 내내 '돗자리 음악회'인가를 한다면서 신천변을 뒤흔들어대던 폭죽소리들도 오늘은 웬일인지 기척이 없다.

8월 15일은 일제강점기를 극복한 우리나라 '독립기념일'이다. 그런데 '국민의 공복'들이 일하는 관청은 이 날을 국민 축제, 시민 축제로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저 천편일률적인 관제 행사뿐이다.

심지어 8월 15일을 '독립' 아닌 '건국' 기념일로 삼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단군 이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나라에 갑작스레 웬 건국기념일? 이런 상황을 안다면, 지하의 장진홍 의사도 도저히 참지 못해 폭탄을 우리에게 던질 것이다.


태그:#장진홍, #독립기념일, #건국기념일, #조선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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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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