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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에게 물려준 나의 첫 만년필 'LAMY 사파리'
 동기에게 물려준 나의 첫 만년필 'LAMY 사파리'
ⓒ 전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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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만년필을 쓰기 시작한 건 2007년, 스무 살 재수 시절이었다. 필기구에 욕심이 많아 '펜텔' 샤프니 '제브라' 볼펜이니 이것저것 사들였다. 여러 필기구를 떠도는 역마살(?)이 끝난 건 만년필 덕분이었다. 시작은 3만 원짜리 '라미(LAMY) 사파리' 만년필이었다. 단가는 볼펜보다 훨씬 비쌌지만 더 진하게 잘 써졌고 사용할수록 내 필기습관대로 촉이 변해갔다.

며칠 쓰고 버려지는 볼펜들보다 만년필에 더 애착이 생겼고 비싼 가격 덕분에 쉽사리 다른 필기구로 바꿀 수도 없었다. 나의 첫 만년필은 대학교 수시 논술시험에서도 빛을 발했고, 대학에 와서 군대 가기 전 1년 동안 함께했다. 군대에 가면서 친한 동기에게 쓰던 만년필을 선물했는데 그 친구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군대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맞은 내게 어머니는 새로운 만년필을 선물했다. 사실은 내가 인터넷 주문을 하고 어머니가 돈을 냈다. '펠리칸(Pelikan)'이라는 독일 브랜드의 만년필인데 들어가는 잉크량이 많아 '고시생 전용 만년필'로 불린다.

그때만 해도 전역 후에 행정고시를 볼 생각이어서 만년필이 꼭 필요하다며 어머니를 졸랐다. 10만 원이 좀 넘는 만년필을 선물하면서 어머니는 "비싼 펜으로 시험 치면 저절로 답이 써지냐"며 우스개로 핀잔을 주기도 하셨다.

경계 근무를 설 때 나는 종종 노트와 만년필을 들고 나가서 글을 끼적였다. 물론 경계를 소홀해서는 안 되지만 사병들은 모두 각자 2시간의 근무시간 동안 심심함을 버텨낼 거리를 준비했다. 어떤 선임은 벽에 낙서를 하거나 스도쿠를 했고, 어느 후임은 꾸벅꾸벅 졸거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만의 손 글씨와 내 습관대로 변해가는 만년필

6년째 쓰고있는 'Pelikan M200'
 6년째 쓰고있는 'Pelikan M200'
ⓒ 전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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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웠다. 부대가 강원도 철원 근처에 있었는데 TV에는 "올해 철원, 시베리아보다 추워"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날도 새벽에 몇 겹의 옷과 장갑을 껴입고 초소로 나갔다. 초소의 온도계는 영하 30도를 가리켰다.

추위와 지겨움을 이겨내려 주머니에 있는 작은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지만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만년필의 잉크가 얼어붙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경계 근무를 설 때는 모나미 볼펜을 들고 나갔다. 볼펜 잉크는 영하 30도에도 얼지 않았다.

2011년에 복학을 하자 강의실은 노트북 타자소리로 가득 찼다. 새내기 시절만 해도 수업시간에 필기를 노트북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3년 만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노트북을 가져오는 학생들의 비율은 높아만 갔고, 휴대폰이나 아이패드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 필기를 하는 얼리어답터도 나왔다.

한 교수님은 노트북만 바라보며 부지런히 타자를 치는 학생들을 보며 자신이 기자회견을 하는 느낌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앉은 동기는 타자 소리가 너무 거슬린다며 투덜거렸다.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복학생인 나는 묵묵히 만년필로 필기를 했다. 물론 나도 몇 번 노트북을 가져와 강의를 받아 적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노트북으로 타자를 치면 훨씬 속도가 빨라서 교수님의 거의 모든 말을 받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중요하지 않은 내용도 많고 잘 읽히지 않았다. 만년필로 쓰면 느리지만 필기할 때 한 번 걸러내서 중요한 내용만 적게 된다. 손으로 쓴 글씨와 나만의 표시들은 시험기간에 다시 공부할 때에도 교수님의 뉘앙스와 써놓은 문장의 의미를 기억해내기 쉽도록 했다.

불편하고 돈도 들지만 나는 여전히 만년필을 사랑한다

만년필로 필기한 수업노트
 만년필로 필기한 수업노트
ⓒ 전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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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년필은 불편하다. 일단 돈이 든다. 만년필 자체는 한번 사면 몇 년이고 쓸 수 있지만 2만 원 하는 잉크를 1년에 한 번 정도 구매해야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잉크를 채워주어야 한다. 잉크 채우는 일을 조금만 소홀하면 필기를 하다가 잉크가 다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게다가 번지기까지 한다.

만년필로 써놓은 글씨들은 물에 너무 약해서 작은 물방울만 튀어도 쉽게 번진다. 재채기를 해서 침이 튀거나, 물을 마시다가 흐르거나 손에 물이 묻은 줄 모르고 잡았다가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종이 선택도 까다롭다. 질이 좋지 않은 종이에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글씨가 퍼져서 나온다. 노트를 선택할 때도 만년필 글씨가 잘 써지는지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만년필로 쓰는 것을 사랑한다. 학교 과제를 한다거나 빠르게 문서를 작성해야 할 때는 노트북을 쓰지만 아직 여전히 손 글씨로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념일을 맞아 편지를 쓸 때 컴퓨터로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년필로 쓴 글씨에는 나만의 서체와 질감과 향기가 묻어나온다. 모든 중요한 시험들은 아직 손 글씨로 글을 쓰게 한다. 대입 논술시험이 그랬고, 대학교의 시험이나 취직을 위한 시험도 그렇다.

나는 시험 전날에는 중요한 의식을 치른다. 만년필에 남아 있는 잉크를 비워내고 새로운 잉크를 최대한 가득 채워놓는다. 잉크통에 만년필 촉을 탁탁 털어내고 남아 있는 잉크를 휴지로 닦은 후에 만년필 뚜껑을 닫는다.

준비가 된 만년필을 필통에 넣으면 다음 날 시험을 위한 의식이 끝난다. 6년째 쓰고 있는 이 만년필과 함께라면 어떤 중요한 시험도 잘해낼 수 있으리라 주문을 건다. 나에게 만년필은 재수 시절부터 복학과 취업준비까지 질곡의 시간을 함께해온 좋은 친구다.


태그:#만년필, #라미, #펠리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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