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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부당한 공권력을 이용해 권력을 지키는 모습. 부조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른들인데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이 받고 있다는 것 역시 비단 브라질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부당한 공권력을 이용해 권력을 지키는 모습. 부조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른들인데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이 받고 있다는 것 역시 비단 브라질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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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2014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이기길 바랐습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일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첫 경기에서 지길 바랐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독일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테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축구팀은 월드컵 내내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독일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어느 6월 아침, 늘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저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차가 막혔습니다. 이유는 바로 월드컵 응원을 위한 도로통제 때문이었습니다. 월드컵 하루 전도 아니고 몇 주 전부터 베를린의 티어가르텐 숲은 철망으로 둘러싸이고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투어 앞 도로는 차단되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며칠 전부터 현대자동차 광고로 뒤덮여 있었고 현대자동차의 신차들은 대형 스크린과 함께 곳곳에 설치됐습니다. 덕분에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이것이 제가 독일이 월드컵에서 지길 바랐던 이유는 아닙니다.

독일 경기 있을 때마다 술 마시고 침 뱉고...

제 마음 속에서 그런 생각이 슬며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독일이 첫 경기를 치르던 그날부터입니다. 베를린은 온통 축구 열기로 가득했지만, 브라질 정부가 국민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저는 씁쓸한 마음에 월드컵에 대한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저를 뒤에서 불러댑니다.

"헤이! 북한사람, 북한사람 정은 김!"

지금껏 독일에서 지내면서 중국사람이냐, 일본사람이냐 심지어 베트남이냐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북한이라니! 뒤를 돌아보니 월드컵 응원을 하러 가는 젊은 남성 5~6명이 저를 보며 낄낄댑니다. 그러더니 이내 "도이칠~란드! 도이칠~란드!(독일, 독일)"를 외쳐대며 월드컵 응원장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뒤쫓아 갈까, 했다가 그들 손에 술이 들려있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사실 독일에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는 잘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의 인지도가 높지요. 한국의 대통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북한의 지도자가 누군지는 모두 알 정도이니까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백인을 보면 미국인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에도 저는 월드컵 응원장과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관계로 독일경기가 있을 때마다 불가피하게 수백, 수 천 만 명의 독일 사람들과 마주쳐야했습니다.

독일이 미국을 1대 0으로 이긴 날, 응원장과 가장 가까운 전철역인 베를린 중앙역은 난장판이 됐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대부분 병맥주를 마시기 때문에 바닥에 깨진 유리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할아버지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맥주병들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베를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인데, 병들을 모아서 슈퍼에 가면 일정정도의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이제 막 맥주를 다 마시고 바닥에 버리려는 청년에게 다가가 "버릴 거면 달라"고 하자 그 청년은 보란 듯이 병을 깨트렸습니다. 그리곤 나팔을 불며 큰소리로 "도이칠란드"를 외치는 무리로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다른 빈 병을 주우러 가는 할아버지의 축 쳐진 어깨를 보니 순간 울컥합니다.

독일 축구 응원군중이 지나간 자리. 깨진 맥주병이 길가에 굴러다닌다.
 독일 축구 응원군중이 지나간 자리. 깨진 맥주병이 길가에 굴러다닌다.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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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응원소리가 쩌렁쩌렁 울립니다. 한데 갑자기 액체가 떨어져 위를 올려다보니 웬 아저씨가 2층에서 침을 뱉고 있습니다. 물론, 월드컵을 응원하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러한 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쉽게 마주 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독일을 응원하는 군중들은 저에게 일종의 공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2002년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쳐댔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한국에 있던 외국인들, 명확히 말하지만 백인이 아닌, 동아시아의 약소국 사람들에게 붉은악마의 응원이 어떻게 느껴졌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대체 왜 국가를 그리도 외쳐대는가

그러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브라질 월드컵 경기장에서 고개를 숙인 한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졌다고 국민에게 사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그저 스포츠일 뿐인데 왜 한국 축구선수들과 감독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할까요?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분명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저는 이번 월드컵의 한국팀 또한 응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외칠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국가는 죽었다는 나라를 차마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월드컵이 진행되는 내내 왜 우리는 축구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도. 독일과 미국이 경기를 하던 날, 미국 SNS에서는 '나치'라는 단어가 급상승 했다지요. 나라간의 화합을 만들어야 할 스포츠는 온데간데없고 축구 하나 때문에 다른 국가에 대한 비난을 서슴없이 합니다. 가뜩이나 나치를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독일사람들이 그 내용을 봤다면 어땠을지 상상이 됩니다. 이번 월드컵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이유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월드컵을 통해 스멀스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한일전에 민족의 자존심을 걸며 흥분하듯, 독일도 프랑스와의 경기에 목을 맬 정도입니다. 프랑스와의 경기가 있는 날, 독일 친구들은 다른 나라에게는 져도 프랑스한테는 이겨야 된다며 왜 그래야하는지 일장연설을 펼칩니다. 결국 '전쟁'과 '식민'이라는 역사적 과거가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테지요.

그리고 7월 4일, 독일과 프랑스의 경기가 어렵게 치러지던 중, 마츠 후멜스(Mats Hummels)가 골을 넣자 집 주변 일대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집니다. 도로 위 차들은 일제히 경적 소리를 내고 사람들은 괴성을 질러댑니다. 심지어 응원 장소가 아니었던 쿠담 거리 도로에 인파가 몰려 순간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TV 중계방송이 브란덴 브루거 투어의 축제분위기 장면을 보여준 후, 바로 뉴스로 넘어갑니다. 첫 소식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소식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모습이 전해집니다. 지구의 한쪽 편에서는 열광하고 다른 한쪽 편에서는 절망이 넘실거립니다. 그나마 독일언론이 축구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소식을 톱으로 전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응원하러 가는 사람들에게서 병을 모으고 있는 모습
 한 할아버지가 응원하러 가는 사람들에게서 병을 모으고 있는 모습
ⓒ 권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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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일 축구팀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트로피를 흔들며 기뻐한 오늘(14일, 한국시각), 독일언론의 대부분 소식은 축구이야기로 뒤덮였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소식은 찾아봐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축구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참혹한 죽음을 덮어버렸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해 3S정책(Sports, Sex, Screen)을 썼던 것이 생각납니다. 많은 이들이 축구에 환호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의 어린 생명들과 희생자들이 까맣게 잊히는 건 아닌지 애가 탑니다. 아르헨티나와의 결승 경기가 끝난 후부터 현재 이 글을 쓰는 새벽 3시까지 쩌렁쩌렁한 폭죽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꽝! 파바박! 퍽!"

하늘이 깨질 것 같은 이 파열음. 이것보다 백배 천배, 아니 상상할 수 없는 폭격소리가 팔레스타인의 하늘에 울려 퍼졌겠죠. 독일 국민들이 기뻐한 오늘, 미안하지만 저는 그들의 승리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태그:#브라질월드컵, #독일,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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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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