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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학생 농활단이 우리 고장을 찾았다. 늘 그렇듯이 농활단이 오면 여러 농가에 배정돼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시골 농부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해주기도 한다. 이번에도 대학생들은 고추밭도 매고 논두렁 풀도 깎았다. 과수원에도 배정돼 석회보르도액을 뿌리거나 도랑을 치기도 했다.

농활 오는 대학생들, 어디로 모시나

농활 온 대학생들에게 에스에스기(고압농약살포기)를 맡길 수도 없고 트랙터나 포클레인으로 경지정리를 맡길 수도 없다. 왜?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것은 농사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도우러 온 친구들에게 '농사'체험 대신 '공사'체험을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으리으리한 시설하우스에 데려다 중공업 공장체험을 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농사라고 하면 괭이나 낫을 들고 들판에 나가서 구슬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더우면 개울에 들어가 땀을 식히는 게 농사 본래의 모습이다. 요즘은 옛날보다 농활 오는 대학생도 적어졌지만 이런 식의 원형 그대로의 제대로 된 농사체험을 할 수 있는 농가도 많지가 않다.

원예나 화훼 등 과채류는 대부분 시설하우스 속으로 들어가서 들판은 비닐로 뒤덮여 있다. 논두렁 풀을 깎는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없다. 아예 논두렁을 시멘트로 발라버렸거나 제초제를 뿌려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시골서 자란 도시인들은 설마 하면서 믿기지 않아 하겠지만 고추밭 매는 농부는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없다. 품앗이 해가며 콩밭 매고 논 매던 일들은 사라진 지 꽤 오래됐다. 비닐이나 부직포로 풀이 나지 않게 했거나 제초제로 풀을 다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농촌은 옛날 농촌이 아니다. 농촌 쓰레기는 도시보다 더 심각하다. 맹독성 농약병의 분리수거 필요성이나 지구적 환경위기에 대한 인식이 농촌은 박약하다 못해 무감하다. 달관의 경지다.

요즘 한창인 감자밭이나 고구마 밭도 북주기 하는 곳이 있는가? 없다. 심을 때부터 두둑을 크게 만들고 시커먼 비닐을 씌운다.

이렇다 보니 자연 가까이 다가가서 자연과 같이 숨 쉬며 자연의 거침과 유연함을 배우러 온 대학생들에게 마땅히 안내할 곳이 없다. 이런 현상이 당연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농업 인구는 줄고 노령화되니 어쩔 수 없이 기계화와 규모화는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나는 달리 생각한다. 도시팽창과 실업자의 증가, 그리고 농촌의 공동화는 한쪽의 원인이 다른 쪽의 결과를 초래 했다기보다 둘 다 일정한 의도와 목표아래 동시에 진행됐다고 본다.

사라져 버린 '농촌다움'

오래 전에 일본으로 전통농업과 도시농업 연수를 갔었던 적이 있다. 일본의 금싸라기 땅 동경 시내 복판에 수천 평 이상 되는 농지가 여러 개 있었다. 농장 복판에 가 서보니, 도시의 건물들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였다. 도시농업의 현장이었다.

도시농장을 분양받은 시민들이 여기 와서 비로소 아파트 옆집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밀집된 아파트 단지 안에 논을 만들어 한 여름 저녁에 손주 손목을 잡고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러 논가에 모여드는 아파트 주민들 이야기는 감동이기에 앞서 자연과 멀어진 현대문명에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한다.

농기계와 대규모 화학농업은 이웃을 다 빼앗아 가버렸다. 시골에서는 옆집 숟가락 숫자까지 안다는 옛말은 말 그대로 옛말에 불과하다. 선탠이 된 승용차 문을 꼭 닫고 마당까지 들어가는 요즘 시골에서는 옆집에 객지 나간 아들이 여름휴가를 왔는지, 손님이 와 있는지 모른다.

이웃 사이에 정이 사라지고 공동체마을이 해체된 데에는 기계화와 농약화에 따른 농업방식 변화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농촌의 농촌다움은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직접 대면하는 데 있다. 인간 노동과 자연 사이에 대형 농기계들이 끼어들면 농촌 본연의 맛은 변질된다. 체험학습 온 학생들과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한 도시민들을 기를 쓰고 손발에 흙을 묻히게 하려는 것은 농가 일손은 돕지 못할망정 멀어진 자연과의 거리를 한 순간이라도 단축시켜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가족농의 해 = 소농의 해

유엔은 오래 전부터 매년 국제적으로 긴요한 주제를 가지고 그 해의 대표주제로 삼아 왔는데 작년은 물 협력의 해였고 올해가 '가족농의 해'라고 한다. 가족농이라 하면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해서 짓는 그만 그만한 규모의 농사를 이르는 말이다. 유엔이 나서서 가족농을 강조하는 것은 농촌을 농촌답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기계와 화학약품과 석유이동수단에 의존하는 주류 농사 방법으로는 우리의 농업이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아챘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에서는 사람의 먹을거리 생산능력이 총 인구의 두 배인 120억에 달한다고 한다. 기아인구가 엄청난 현실에서 놀라운 통계수치라 하겠다. 엄청난 생산능력에도 국제 곡물상과 신자유주의 세계교역 방식 때문에 굶주림이 있게 되는데 이처럼 과도한 농업 생산능력은 심각한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을 재촉하고 있다. '국제 가족농의 해' 설정은 유엔차원에서 기존 주류농업의 폐해와 심각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한 분야가 농업이다. 그런데 농업의 주류는 기후변화를 촉진하고 악화시키는 방향의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 악순환에 대한 주의와 자각이 가족농의 해를 만든 것이라 본다.

가족 노동력이라고 하면 얼마 정도의 농지규모일까? 여기에는 농사 동력 중 농기계가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미국의 경우는 80% 이상이 가족농이라고 하나 가구당 농지 면적은 120만 평 규모다. 우리 1농가의 평균 농지 1600평과는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다. 우리는 3~4만 평 농사만 지어도 대농이라 부른다.

가족농은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한다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개념이라 할 수 없다. 대규모 농기계에 대한 제한을 둬야 진정한 농촌다움이 되살아나는 가족농의 취지에 맞을 것이다. 많이 쓰이는 말처럼 '지속가능한 농사'를 통 털어 '가족농=소농'이라 해야 한다.

초국적 대자본의 자본 이동과 경기 동향에 따라 산골 시골마을까지 흔들려버리는 일이 없으려면 가족농이 가장 좋은 전략이 될 것으로 본다. 기후변화나 곡물가 파동 등 글로벌 경영체제에서 일어나는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농사 방식이 가족형 소농이라 하겠다.

지역 민주주의의 산실

가족농은 단순히 하나의 가정단위가 아니다.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농가는 지역 내에 수많은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가지게 된다. 농사는 협업의 성격과 함께 농기구와 노동력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기에 본질적으로 주민간의 소통과 연대를 추구한다.

그래야 농사가 가능하다. 가족형 소농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지역자치의 산실이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자급하는 단위는 가장 튼튼한 삶의 버팀목을 지녔다고 보면 된다.

농촌지역의 빈곤문제와 복지문제도 가족농 차원에서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농 체제는 농업인구를 획기적으로 늘이게 된다. 이들을 모두 공공재의 생산활동가로 이해하고 대대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외국은 이미 기본소득제나 농민 월급제라는 방식으로 다양한 접근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지역자치가 본격화 된지 24년이지만 여전히 익명성의 정치와 대의정치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농촌사회의 가족농 정책은 직접정치와 실명의 사회를 만드는데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가족농과 소농을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업생산 능력과 경제의 규모로 한정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사회의 공동체마을을 현대의 도시문명을 넘어서는 유일한 대안으로 얘기하면서도 이것을 가족형 소농 농촌사회의 복원과 연계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도시문제의 해결은 농촌문제 해결과 맞물려 있다. 전통문화의 복원과 배려와 공생의 사회경제체제는 소농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농 육성의 방안

유엔이 그 해를 무슨 무슨 해로 정하면 우리 정부도 의미 있는 정책방침을 세우고 국정은 물론 지자체의 정책에 반영한다. 협동조합의 해나 물의 해, 에너지의 해에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올해 가족농의 해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할 일이 없다는 투다.

우리 농정은 꾸준히 (시장)개방화와 (대)규모화, 기계화를 추진해 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농업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농정과 대척점에 있는 '가족농의 해'에 정부는 할 일이 없어 보인다.

농업 위기의 돌파구로 가족농의 해를 지정 한 것이니만큼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농업의 위기는 생존의 위기며 문명의 위기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과 2013년 유엔의 보고서는 다급하게 기존 농업에 경고를 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국제 통상 조약들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종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 고유문화를 없애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환경농업에 대한 지원과 지지 만큼 가족형 소농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동안 농업생산 부문은 농업법인이나 영농조합 등 기업농 형태에 지원을 집중해왔다. 유통과 가공에도 대기업의 참여를 방치하거나 유도하기까지 했다. 작년의 농부팜 한농의 유리온실 사태가 그것이다.

중소상인의 골목상권을 초대형 마트로부터 보호 하듯이 가족형 소농의 고유분야를 설정하고 철저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 소농이 우리의 문명을 지키는 숭고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가족농가의 소규모 가공에 대해서는 현재의 '식품위생법'이나 '농업의 6차 산업화법'뿐 아니라 '폐기물 관리법' 등에서 별도로 다룰 필요도 있다.

또한 가족형 소농 개념을 잘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농촌다운 농촌을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서 정리해야 한다. 농사의 규모와 석유동력의 비중, 인간 노동력 비율 등이 고르게 적용돼 한국 실정에 맞는 가족형 소농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가족형 소농 지원에서 농기계 의존율에 제한을 두는 문제는 농촌의 일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 노동력 비중이 최소한 얼마 이상 차지해야 한다면 이런 농민들은 준 공무원 급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공익 노동을 높이 사야 한다. 농촌문화가 체험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삶 자체가 되도록 하는 정책이라 하겠다.

둘째, 자각된 청년들을 소농으로 안내 할 필요가 있다. 요즘 머리가 깨인 청년들은 컴퓨터 앞에서 하는 일보다 몸을 쓰는 일,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일의 고귀함을 안다. 그런 청년들을 양성하고 농촌의 소농 영역으로 적극 이끌 필요가 있다.

셋째, 당연한 얘기지만 농업 총생산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단위나 동일 경제권 단위에서 농업 인구의 재 산출과 재배치도 필요하다. 여기까지 얘기가 나가다 보면 이건 대대적인 혁명에 해당한다.

그렇다. 농업 생산의 가족농 강화, 토종종자의 보존과 보급, 토양의 보호와 농지 보존 등은 이 시대의 혁명적 과제다.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먹거리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 핵심은 지역먹거리 체제의 확고한 정립이다. 먹거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우려는 공포에 가깝다. 먹거리가 오로지 시장기능에 맡겨져 음식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풍조는 매우 위험하다.

공공재는 사유화를 제한하듯이 먹거리도 공기나 통신이나 철도처럼 공공재로 봐야 한다. 장거리 유통에 따른 식품 신선도 유지의 편법들이 무분별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족형 소농은 지역농산물 체제와 연동 될 때 더욱 빛을 낼 것이다.

2010년 유엔보고서가 단언하고 있다. 세계인민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유기재배나 자연재배의 소농방식 뿐이라고. 유전자변형이나 기계화, 화학농법을 어서 멀리해야 한다고. 세계 무역 조약들도 이런 방향으로 개혁돼야 한다. 현재 한국정부의 마구잡이식 FTA나 TPP 추진은 큰 재앙을 부를 것이다.


태그:#소농, #대산농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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