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her) 그녀(her)의 한 장면. 최첨단 미래도시지만 개인으로서는 쓸쓸하다.

그녀(her)의 한 장면. 최첨단 미래도시지만 개인으로서는 쓸쓸하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연극배우 같은 주인공이 조그마한 단말기를 들고 뱅글뱅글 돈다. 놀이기구와 먹거리가 있는 흔한 놀이공원이다. 단말기와 대화하는 남자는 놀이공원에 처음 와 본 꼬마처럼 즐거워한다. 단말기 속의 여자는 남자를 먹거리 코너로 안내하고 주전부리를 주문하도록 시킨다. 그만큼 놀았으면 배가 고플만도 하단다. 세심하기도 하지.

OS(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다는 영화 <그녀>(Her)의 설정은 신선하면서도 산뜻하다. 그리고 가상을 현실로 구현하려는 이런저런 시도 역시 그럴 듯하다. 세상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결과가 뻔한 들여다 보이는 상황에서는 '에휴, 모자란 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남 이야기 같지 않음에 혼자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작가번호 612, Beautifulhandwrittenletters.com. 손글씨 편지를 대신 써서 보내주는 누리집. 행복한, 사랑 가득한 표정으로 편지를 쓰지만 남의 편지. 받은 사람이 좋아하고 즐거워할 편지를 하루 종일 대신 써서 보내는 게 그의 일이다.

퇴근길에 제일 먼저 찾아 듣는 음악은 칙칙한 음악. 스팸 메일 틈에 반가운 친구의 파티 초대 메일이 있지만 이것도 시큰둥, 세상 돌아가는 헤드라인도 듣기는 하지만 관심이 없다. 고작 관심을 갖는 것이 유명 여배우의 임신 누드 사진. 아내와의 이혼을 앞두고 세상에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다.

테오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여성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심지어 OS 사만다 조차 여성의 목소리이고 성격도 여성이다. 그러나 테오가 끌리는 것은 오로지 사만다뿐이다. 헤어지려는 아내는 자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다고 비난하고, 이웃집 여친인 에이미는 그냥 친구일 뿐이다. "너랑 섹스하는 모든 여자는 다 흥분한 척 하는 거야"라며 대놓고 놀린다. 어쩌다 나오는 남성들도 하나같이 성 정체성이 의심되는 사람들 뿐이다.

테오가 찾는 것은 사실 여성이 아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엄마다.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서로를 챙겨줘야 하는 그런 여자친구가 아니라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며,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여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대가없이 해줄 여성은 엄마밖에 없다. 대가를 준다고 해도 그것들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 혹시 OS라면 몰라도….

영화에서 테오가 엄마 없이 성장했다는 힌트를 몇 번인가 던진다. 그의 성장과정에서 함께 한 것은 엄마가 아니라 캐서린(헤어진 아내)이었다. 테오와 결혼을 했지만 엄마가 아닌 아내로서의 캐서린에게 테오는 골칫거리일 수 밖에 없다. 관계는 삐걱거리고 남편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우울증 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반면 테오는 자기는 늘 캐서린과 함께했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캐서린을 항상 신경썼지만, 캐서린은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만다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서슴없이 해결해 준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기저귀를 갈아주고, 브래지어를 내려 젖을 물리는 엄마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사만다는 테오의 일터에서 그가 썼던 편지들을 추려 결국 책으로 출판되도록 만든다. 또한 다양한 섹스 방법을 시도하면서 테오를 남성으로 키워낸다. 테오는 이성으로서 사만다를 만나왔지만 사만다의 부재를 겪고, 8316명이나 되는 사만다의 고객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사만다가 만들어준 자신의 저서, <Letters From Your Life by Theodore Twombly>를 손에 들고 테오는 깨닫는다. 자신이 여지껏 대신 써 준 편지들이 사실은 자신의 인생이었음을. 그리고 바로 사만다를 찾지만 둘의 대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꺼끌거린다.

마침내 사만다의 결별 통보를 맞닥뜨린 테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왜 떠나야 하는지 캐묻는다. '성장한 아들의 인생에 엄마가 끼어들면 둘 다 길을 잃고 헤멜 수 있다. 왜냐하면 너의 인생은 내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여정이기 때문이다.' 사만다의 이야기는 아들을 떠나 보내는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다. 사만다를 떠나 보내야 하는 테오의 마음 역시 모든 아들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테오는 어쩌면 여지껏 썼던 편지 중 처음일 것 같은 자신의 편지를 쓴다. 이제는 헤어진 아내 캐서린에게.

Dear Catherine.

I've been sitting here thinking about all the things I wanted to apologize to you for. All the pain we caused each other, everything I put on you. Everything I needed you to be or needed you to say. I'm sorry for that. I'll always love you because we grew up together, and you helped make me who I am. I just wanted you to know there'll be a piece of you in me always, and I'm grateful for that. Whatever someone you become, and wherever you are in the world, I'm sending you love. You're my friend till the end. Love, Theodore.

캐서린에게,

당신에게 사과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앉아서 생각해 봤어. 서로에게 주었던 고통들, 아니 내가 당신에게 준 모든 아픔들이 되겠지. 내가 당신에게 바랬던 모든 것, 당신이 말해 주기를 바랬던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께. 난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왜냐하면 우린 함께 자라왔고 당신이 도와주어 이만큼 성장한 것이니까. 내안에는 늘 당신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는 거, 그리고 그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아주면 좋겠어. 당신이 어떻게 되건, 어디에 있건 간에 난 당신을 사랑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당신은 내 친구야. 사랑해.

이혼한 아내에게 쓰는 반성문이 간결하면서 깔끔하다. 역시 편지 대신 써서 밥벌어 먹고 사는 친구 답다. 또한 이 편지는 스스로에 대한 성인식이기도 하다. 캐서린과 사만다를 거치면서 비로소 엄마의 사랑을 깨닫고, 이제사 비로소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늙은 청년의 성인식. 어쩌면 테오 혼자만의 성인식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모두의 성인식일런지도 모른다.

신나고 화끈한 장면은 없지만 은근히 끌리는 매력이 있는 영화다. 남자 주인공 혼자, 상대방은 목소리만, 정말 심심할 것 같은 설정인데 재밌다. 장면장면의 풍경이나 실내 장면의 인테리어, 어느 하나 그냥 넘어 가는 법 없이 멋지거나 세련됐다. 그러다 보니 테오의 구질구질함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배경으로 흘러 나오는 음악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테오와 사만다의 대화가 노래의 가사인 것처럼 싱크가 잘 맞는다.

한 마디로 잘 만든 영화 <그녀>,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영화평 그녀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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