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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에게 로비를 하면 '관료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렵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관료들에게 로비를 벌이면 '재계가 움직이지 않는 한 어렵다'라고 핑계 댄다. 재계에 로비를 하면 '정계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렵다'라고 둘러댄다. 할 수 없이 다시 정치가에게로 가면 '최종적으로 보자면 주권자인 모든 국민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변명한다.(p58)

사회운동 이론의 하나인 '쟁점관심 사이클'을 통해 후쿠시마 원전이후 원전을 없애기 위해서는 '원전이 없어도 일본은 문제없다'라는 이슈를 퍼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사회를 바꾸려면> 표지 사회운동 이론의 하나인 '쟁점관심 사이클'을 통해 후쿠시마 원전이후 원전을 없애기 위해서는 '원전이 없어도 일본은 문제없다'라는 이슈를 퍼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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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제목은 이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회는 어떻게 그리고 왜 구성되었고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어 왔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일본의 사회학자가 있다. 저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종합정책학과 교수이기도 한 오구마 에이지다.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는 내용. 저자가 덧붙이는 설명이 설득력을 갖는다. 모든 유권자인 몇천 명 또는 많아야 만여 명이 한 곳에 모여 축제와도 같이 활기찬 토론을 거친 다음 결론을 돌출한다는 것이다.

그저 거수를 통해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는 단순한 집회는 아니라는 거다. 여자와 노예들의 경우 선거권이 없긴 했으나 같이 모여 자신들의 대표인 가장의 의견을 따랐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대원칙에 위배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추론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연 민주적인 사회인가 라고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의 사회는 국민이 대표를 뽑아 정치를 하게 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왕정의 종말이 부르주아의 태동을 알렸듯이 전복된 체제마다 국민들 앞에 나타난 대표들은 과연 누구를 대변했던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영국의 보수당은 기득권층을, 노동당을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대단히 노골적인 편가르기처럼 보이는데 영국은 의회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의 상원은 각 주(state)마다 2명의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의 경우 인구비례로 선출된다. 상원은 각 주의 대표이고 하원은 국민의 대표가 된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과연 우리를 대표해서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다. '루소는 대의민주주의 아래에서 인민이 자유로운 것은 선거 기간 동안뿐이고, 그 뒤에는 오로지 노예일 뿐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사회가 고대에서 근대로 다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집단에서 좀 더 작은 집단으로 그리고 개인으로 분산되고 고립되어 왔다는 진단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대가족을 이루고 이웃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사회가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현대의 도시를 생각하면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 인위적으로 조직을 꾸리고 의식주를 공동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을공동체가 시민들의 호응을 얻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자살론>의 저자 뒤르켐은 '자살이란 사회적 질병이 개인의 행동으로 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계급간의 갈등이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더욱 심해져 물신숭배로 이어지면서 플라톤이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고 목적이어야 한다'는 경고는 무시된다.

저자는 먼저 쟁점 관심 사이클, 정보의 2단 흐름, 이노베이터 이론, 모럴이코노미, 프레이밍이나 구축 이론 등과 같은 사회운동 이론들을 소개한다. 이론은 이론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다원화되고 다양화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층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매스미디어 등과 같은 공기(公器)를 이용해 국민들에게 지배이데올로기에 맞는 정책이나 이론을 시나브로 주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을 두고 공당이 이름을 바꾸고 의원이 이합집산을 하고 있는 중인데도 국민들은 때가 되면 이들을 대표로 뽑는다. 조금만 생각하고 연구해도 그들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p.428)

저자의 맺음말이다.

덧붙이는 글 | <사회를 바꾸려면> 2014년 5월 12일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동아시아



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동아시아(2014)


태그:#사회를바꾸려면, #오구마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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