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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는 김현희씨 (우측)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는 김현희씨 (우측)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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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는 한국계 독일 입양인이다. 김씨는 지난 6월 5일부터 15일까지 한국 친부모를 찾기 위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1976년 3월 32일 김씨를 독일로 해외입양 보낸 홀트 입양기관의 기록에는 김씨가 지난 1974년 12월 겨울 영등포경찰서 부근에서 발견됐다. 그후 1975년 5월 27일 홀트 기록에는 김씨가 영등포경찰서에서 '성로원'이라는 아동보호시설에 입소한 것으로 돼 있고, 생일은 1971년 5월 25일로 돼 있다.

그러나 김씨가 지난 한국 방문 기간 동안 한국 경찰로부터 새로 받은 기록에 따르면 김씨의 출생일과 아동보호시설 입소일은 홀트 입양기관의 기록과 달랐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974년 12월 31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성로원이라는 아동보호시설에 입소한 것으로 돼 있었다. 홀트 입양기록에는 지난 1975년 5월 27일에 김씨가 성로원에 입소한 것으로 돼 있으니 약 5개월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 경찰 기록에는 김씨가 1971년 2월 25일 생으로 기록돼 있어서 홀트 기록(1971년 5월 25일)과는 무려 3개월이나 차이가 난다.

어른들의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두 개의 기록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또 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 두 개나 있는지 김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김씨는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결정적인 '기록'이 왜 상이한지 답답해했다.

미국의 참사보도 전문기자인 캐서린 조이스는 그녀의 저서 <구원과 밀매 : 복음주의 기독교의 선의와 국제간 아동 입양의 현실>에서 입양인의 '기록 불일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실제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복지 제도와 시설이 부족해서 아동복지라고는 고아원밖에 없는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부모들이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면서 멀쩡한 아이가 '고아'가 되기도 한다. 또한 교회 입양운동이 복음주의 신자에게 구원할 아이들을 찾아 나서라고 열심히 권하다보니 이에 따라 더 많은 '고아'가 양산되었다.

가족이 전혀 없는 것처럼 위장된 아이들, '날조된 고아' 또는 '서류상 고아'라고 부르는 신상기록이 세탁된 아이들이 그렇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면서 다른 시장만큼이나 이윤 추구가 가능한 입양산업의 수요자가 된 것이다."(본문 15쪽)

캐서린은 정부의 인색한 복지 정책과 교회 입양운동 그리고 입양기관의 이윤 추구가 아동들의 소중한 기록을 날조·세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는 김현희씨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는 김현희씨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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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는 지난 6월 초 한국에 방문하자마자 친부모를 찾고자 자비를 들여 자신의 정보를 기재해놓은 물티슈를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6월 5일부터 15일까지, 1974년 12월 자신이 발견됐다는 영등포경찰서 주변으로 갔다.

그리고 김씨는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눠주며 친부모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러한 김씨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허사로 끝났다. 지난 15일 김씨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다음은 독일에서 지금도 한국 친부모를 찾고 있는 김현희씨와 지난 며칠간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영등포경찰서 부근에서 빨간색 모자를 쓰고 있었던 아이

김형희씨에 대한 경찰 기록. 생일이 1971년 2월 25일로 되어 있다.
 김형희씨에 대한 경찰 기록. 생일이 1971년 2월 25일로 되어 있다.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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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장소는? 한국 이름은 본명인가?
"한국 이름 '김현희'는 한국의 아동보호시설 '성로원' 원장님이 내가 입소할 당시 지어주신 것이다. 내 출생일은 1971년 2월 25일(경찰 기록)과 1971년 5월 25일(홀트 기록)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겠다. 내가 영등포경찰서 부근에서 발견되고 성로원이라는 아동보호시설에 입소한 날짜도 1974년 12월 31일(경찰기록)과 1975년 5월 27일(홀트기록)로 두 개나 있다. 나에 관해 각기 다른 두 가지 기록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 1974년(혹은 75년) 당시 입고 있던 복장과 신체 특징은?
"경찰 기록에 따르면 아동보호시설 입소 시 나는 빡빡머리에, 빨간색 모자를 쓰고 있었고, 자주색 상의에 빨간색 점이 있는 초록색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  독일로 입양 보내지기 전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나 알고 있는 게 있나.
"기억나는 것은 없다. 단지 기록에 의하면 1974년 12월 아니면 1975년 5월에 내가 영등포경찰서 부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돼 있다. 그후 1976년 3월 23일 홀트를 통해 독일로 입양 보내졌다."

- 입양 보내지기 전, 한국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나.
"없다. 단 1976년 3월 독일로 해외입양된 뒤 거의 매일 밤, 한 1년 정도, 군인들이 우리집을 둘러싸고 있는 똑같은 꿈을 많이 꿨다."

- 신체 특징이 있다면?
"왼쪽 귀에 점이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김현희씨가 나누어준 물티슈.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김현희씨가 나누어준 물티슈.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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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한국을 세 번째로 다녀갔다. 처음 한국에 방문한 것은 언제인가. 방문 목적은? 또 한국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첫 방문은 지난 1998년 7월 10일부터 31일까지였다. 입양 보내진 뒤 22년 만에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다. 당시에 홀트와 성로원을 방문해 친부모를 수소문했지만 실패했다. 안동, 제주, 속초, 설악산 등 한국의 여러 곳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과 한국인들이 너무 궁금했다. 독일로 입양 보내지기 전, 내가 1년 정도 지내던 성로원에서 많은 '고아'들을 봤는데 가슴이 아팠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한국인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연하게 한국에 와서 내가 있던 곳을 방문하면 친부모에 대해 뜻하지 않게 어떤 기억이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했다. 무려 3주를 한국에서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입양 전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던 기억이다.

두 번째 방문은 지난 2010년 3월 8일부터 4월 4일까지였다. 그때 나는 독일에서 막 태어난 딸을 둔 엄마였다. 젖먹이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딸과 함께 다시 성로원을 방문해 원장님을 만났지만, 역시 친부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 두 번째 성로원 방문 때 감회가 있었을 것 같다. 최초 방문과 비교해봤을 때 시차가 무려 12년이다.
"첫 방문과 비교했을 때 두 번째 방문한 성로원은 변해 있었다. 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쳤다. 아이들이 나와 딸의 손을 잡고 놀고 싶어해 무척 안타까웠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 같았다. 아이들이 내게 안기고 싶어했는데 내가 팔이 두 개밖에 없어서 한 번에 아이 둘만 안았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한국을 방문하면서 받은 인상이 있다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독일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금 싱글맘으로 남자친구와 동거하면서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독일 사회에서는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싱글맘들이 많은 어려움과 차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독일 형제들은 있나?
"5살 연상인 독일인 오빠가 있고 조카가 둘이 있다. 지난 1976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오빠의 행동을 모두 따라했다, 오빠는 내가 독일생활에 빨리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래서 지금도 오빠와는 사이가 아주 좋다. 게다가 양부모님은 나와 오빠를 차별하지 않고 가족으로 받아들이셨다."

- 딸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09년 3월 31일 딸을 낳았다. 딸 이름을 내 한국 성을 따 '김'으로 지었다. 딸의 이름인 '김'을 통해서 내 과거인 '한국의 뿌리'를 상기할 수 있어서 좋다. 언젠가 딸이 한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면 좋겠다. 또 한국 친척들도…." 

- 독일에서 해외입양인으로 살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10대 때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왔다. 오빠와 양부모, 독일 친척들은 모두 나와 다르게 생겨서 아주 고민이 많았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10대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태어난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내가 뭘 잘못했기에 친부모님은 나를 버리셨나'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물론 인종차별도 많이 당했다. 독일에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직도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 나아지겠지...

입양 직후 김현희씨
 입양 직후 김현희씨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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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나?
"포기보다는 '내일은 오늘보다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매 순간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리고 내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이 잘못된 것이지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야'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 친부모를 찾기로 마음먹은 동기가 있었나?
"마음 한구석에서 늘 '언젠가는 친부모님을 찾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딸을 임신하면서부터다. 임신했을 때 의사가 '집안에 유전되는 병이 없는지'를 물었는데 친부모에 대하 아는 게 없으니 답변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친부모님을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훗날 딸에게도 내 뿌리와 한국의 조부모님에 대해 잘 이야기해줘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친부모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다.

한 독일 입양인 친구가 한국 친엄마를 찾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그 친구 한국 친엄마는 딸과 재회하고나서 얼마 뒤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래도 그 친구가 한국 친엄마를 찾은 게 무척 부러웠다. 내 나이도 마흔이 넘었으니 한국 친부모님도 연로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꼭 만나뵙고 싶다. 그래서 내가 입양 보내지기 전까지의 삶에 대해 묻고 싶었다. 궁금한 게 무척 많다."

- 친부모님이 가장 그리울 때는 언제인가.
"내 입양 부모님과 논쟁할 때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양부모님과 논쟁할 때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친부모님은 이럴 때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또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친부모님이 그리워진다. 특히 딸이 태어났을 때 '친부모님이 옆에 계셨으면…'이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엄마, 저는 해피엔딩을 믿어요... 보고 싶어요"

김현희씨의 어린 시절. 왼쪽 사진은 1976년 4월에, 오른쪽 사진은 같은해 10월에 찍은 사진.
 김현희씨의 어린 시절. 왼쪽 사진은 1976년 4월에, 오른쪽 사진은 같은해 10월에 찍은 사진.
ⓒ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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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엄마, 보고 싶어요. 잘 계신지요? 제 딸이 한국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제 과거와 뿌리가 궁금할 뿐입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으시지요? 저는 오랫동안 인생의 해피엔딩이란 것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딸을 낳아 키우면서 해피엔딩을 믿게 됐어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한국 친척들을 찾을 겁니다.

부모님을 찾아서 서로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서로 연락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전에는 제 인생이 '미완성'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저는 항상 부모님이 궁금했어요. 어떻게 생기셨을까, 어떤 성격이실까, 나와는 얼마나 닮으셨을까.

제가 딸을 키우면서 친엄마와 상상 속 '대화'를 많이 합니다. 저를 임신하고 출산하셨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양육을 포기하셨을 때는 언제인가요? 그때 엄마 나이는요? 제가 영등포경찰서에서 발견된 게 4살 때니까 그때까지 제가 친척집에 살았나요?

엄마, 아빠, 또 모든 한국 친척 분들을 보고 싶어요. 제가 엄마를 닮았나요? 엄마도 저처럼 안경을 쓰시나요? 아빠는 어떤 분이신가요? 제가 자라난 곳은 어디인가요? 저는 행복한 아이였나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나요?

엄마, '김'이라는 이름의 손녀가 있어요. 제가 독일로 입양 보내졌을 때 나이가 지금 제 딸 나이와 같아요. 전 지금 딸과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부모님을 만나면 딸과 한국말로 인사드리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한국말은 정말 어려워요! 엄마를 만나면 내 인생은 정말 '해피엔딩'이 될 것입니다. 엄마, 사랑해요! 딸 김현희 올림."

* 김현희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 바랍니다.
첨부파일
P1190477 (1).JPG

덧붙이는 글 | 사진설명 : 지난 6월 중순 영등포경찰서 주변에서 자신의 부모 세대로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물티슈를 나누어 주고 있는 김현희씨 (우측)



태그:#김현희, #입양, #김성수, #뿌리의집, #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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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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