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6.4지방선거를 앞둔 지난 5월 19일부터 이틀 간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투표 의향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14%가 비투표 의사를 밝혔는데, '투표해도 바뀌는 것이 없어서'(50.3%)를 그 이유로 손꼽았다. 이를 두고, 언론은 우리 사회의 정치 불신 때문이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정치 불신으로 인한 비투표 의향 증가는 우려스럽다. 선관위는 선거철마다 비슷한 내용의 설문조사를 이어왔는데,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비투표 의사자 중 27.5%만이 정치 불신 때문이라고 답했었다.

비투표 유권자들만이 정치 불신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국기기관에 대한 신뢰도 조사가 이뤄질 때마다, 국회와 청와대는 늘 꼴찌를 다툰다. 정치 불신은 투표를 통해 선출한 대표자들에게서 유권자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비롯된다. 투표는 '민주주의 꽃'이라 일컬어지지만, 지금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투표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겨져 왔다. 민의를 현실정치에 반영시키고, 시민이 주권자로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때문에 투표함에 넣어지는 것은 단순히 투표용지가 아니라, 각각의 삶이 머금은 소망이기도 하다. 그 당위성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선거 때마다 투표율을 걱정해야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사회를 바꾸려면> 책표지.
 <사회를 바꾸려면> 책표지.
ⓒ 동아시아

관련사진보기


"'우리의 대표'에서 '우리'가 사라져"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리고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략)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는 과연 바뀌는 것일까?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 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본문 9쪽)

일본의 인문학자 오구마 에이지 교수(게이오대 역사사회학)가 쓴 <사회를 바꾸려면>(전형배 옮김, 동아시아 펴냄)은 지금의 상황에서 곱씹어볼 만한 책이다. 저자는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사회의 현실이 비추듯, 투표에만 매몰된 대의민주주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에서는 2012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 책이 출간되었는데, 반원전 사회운동과 맞물려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2013 일본 신서대상'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일본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직접민주주의를 통한 사회변혁'이라는 핵심 만큼은 우리사회에서도 유효해 보인다.

책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부터 현재의 대의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걸어온 궤적을 되짚는 것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대의민주제가 정착된 이유는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가 민의를 대변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은 '우리의 대표'에서 말하는 '우리'가 사라져가고 있다"(64쪽)라고 꼬집는다. 기득권층이 표를 얻기 쉬운 구조에서라면 귀족정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선거제도가 지닌 한계에 관한 비판은 더 이어진다. 저자는 "단순히 표를 많이 얻는 사람이 '민의'를 대표한다는 것은 이상한 말"(165쪽)이라며 날을 세운다. 시민이 누군가에게 투표했다고 해서 그 대표자의 모든 생각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뽑지 않은 대표자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더불어 '1인 1표'라는 선거제도가 언뜻 평등해보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바람을 그저 '수량'으로 바꿔버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지난 6.4지방선거의 투표율은 56.8%에 그쳤다. 40%가 넘는 나머지 민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단순히 '모두가 투표에 참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사회구성원의 빠짐없는 투표 참여가 어려운 상황에서라면 올바른 답이 아니다. 더불어 투표권이 없는 미성년자, 우리사회에서 생활하지만 투표권을 얻지 못한 외국인, 물리적으로 투표 참여가 제한된 사회적 약자 등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직접민주주의 확대로, 대의제 한계 극복 가능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의제의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데모와 사회운동은 정권과 대립하는 상태라면 '대립하는 목소리'가 되겠지만, 정권이 거기에 응해주면 '대화하는 목소리'가 된다. (본문 251쪽)

저자가 '데모'로 대표되는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한다고 해서,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직접민주주의의 확대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한다.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야말로 사회를 바꾸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직접민주주의는 "정부발표 이외의 정보를 모으거나",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따위의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늘어나면, 그 경험은 시민들을 성장시킨다. 그리고 성장은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결국 사회를 바꾼다. 저자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일본의 탈원전 사회운동을 든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방사선에 관한 정보를 찾고, 안전 불감증에 빠진 정부를 비판하는 데모에 참여하면서, 일본 시민들이 원전 이외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보완적 역할은 우리사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문제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 분야가 넓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언론분야다. 정부의 발표만을 그대로 옮기다가 오보를 잇고,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에게까지 배척을 받을 만큼 엉망이었던 언론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국가재난주관방송임에도 제대로 된 보도를 하지 못했다며 KBS를 대상으로 여론의 화살이 쏟아졌다. 시민들은 KBS 본관 앞에서 보도를 규탄하는 촛불시위에 지속적으로 나섰고, 이러한 움직임은 길환영 사장의 해임에 밑바탕이 됐다.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고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고 한다면, 참가할 수 있는 사회, 참가할 수 있는 자신이 탄생한다. (본문, 438쪽)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그런 걸로 세상이 달리지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치권을 향한 불신, 사회문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이들을 설득하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변화를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에릭 홉스봄의 말처럼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씀, 전형배 옮김, 동아시아 펴냄, 2014년 5월, 1만 9천원.



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동아시아(2014)


태그:#직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사회운동, #데모, #<사회를 바꾸려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