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의 불행한 만남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와 이정범 감독의 <우는 남자>는 비슷한 듯 다른 영화다. 두 감독 모두 잔인한 장면으로 유명한 만큼 어느 영화가 더 잔인하니, 덜 잔인하니 하는 문제로 영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각각 2012년과 2014년에 개봉한 두 영화에는 모두 모성을 상징하는 한 여자와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남자가 나온다. <피에타>에서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킬러 이강도(이정진)와 아들을 잃은 엄마이자 이강도 앞에 엄마로 나서며 이강도를 혼란에 빠트리는 여자(조민수)가 등장한다.

<우는 남자>에서도 엄마에게 버림받은 킬러 곤(장동건)과 딸을 잃은 엄마 최모경(김민희)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다. 두 영화의 소재와 캐릭터는 비슷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주제와 배경은 아주 다르다.

<피에타>와 <우는 남자> 두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불행한 만남을 보여준다.

▲ <피에타>와 <우는 남자> 두 영화는 엄마와 아들의 불행한 만남을 보여준다. ⓒ 김기덕필름, 다이스필름


비슷한 점은 모성을 잃고 상처 받은 아들이 모성을 떠올리게 하는 엄마같은 대상을 앞에 두고 혼란에 빠지며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떠오른다.

전국 1등을 강요하는 엄마를 끝내 살해한 고3 아들의 이야기, 엄마에게 버림받고 여성들을 향한 원망 속에 자라며 여중생을 잔인하게 살인한 김길태 사건. 비뚤어진 모성으로 인해 벌어진 이 사건들에 대해 누구도 쉽게 손가락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혹시 <우는 남자>와 <피에타>도 그런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상처와 회한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으나, 영화가 그려내는 배경을 살펴보면 두 영화는 단지 모성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자본이 몸집을 불려가는 현장이다.

<우는 남자>가 말하지 못하는 것과 <피에타>가 말하는 것

두 영화는 잔인함으로 치자면 누굴 더 탓할 것도 없이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한 영화는 대중 영화로, 다른 한 영화는 대중들이 회피하는 영화로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잔인해서 보기 싫다고들 하지만 사실 잔인한 것으로 치자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나 한국의 액션 영화들이 더 잔인한 경우가 많다. <우는 남자>에도 헐리우드 전쟁 영화 급의 총기류가 등장하고, 영화 중반부터는 지루해질 정도로 총격전을 끌어가며 피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를 잔인해서 보지 못한다기보다는 그 잔인성을 불러온 인간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피에타>의 한 장면 청계천 공구 상가 일대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 <피에타>의 한 장면 청계천 공구 상가 일대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 김기덕필름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즐길 수 없는 영화인 것은 사실성 때문이다. 청계천 공구 거리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피에타>가 보여주는 사실성은 섬뜩함을 자아낸다. 공구 상가들이 자본 앞에서 어떤 비참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헐리우드식의 오버 액션이 아닌 사실적 묘사로 인해 그들이 처한 삶의 고통은 '나의 공포' 또는 '이웃의 공포'로 다가온다. 기름때가 끈적이는 한 뼘 공간에 앉아 작은 부품들을 찍어내는 상가들의 내부는 그 어떤 노동 환경보다도 우울하고 어둡다. 4년 전, 아크릴 액자를 맞춤 제작하는 소규모 상가들이 밀집해있는 을지로 일대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두 세 명의 남자들이 아크릴 액자를 자르고 다듬고 포장하는 모든 공정을 열평 남짓한 어두운 공간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휴식 공간이라고는 없는 작은 상가들을 돌아볼 때 거친 노동과 피곤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피에타>는 그때 그 상가들보다 더 좁고 어두운 곳에서 생산의 고통를 보여준다. 사장인 동시에 노동자인 이들은 밀려오는 재개발을 버티지 못하고 사채를 끌어 쓰다가 이강도(이정진)에게 돈 대신 몸을 내놓는 신세가 되는 장면들은 자본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는 남자>에서도 검은 자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는 남자>가 상업 영화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야기의 주 배경이 자본을 굴리는 화려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최모경이 일하는 '벤츄라 홀딩스'는 통유리 고층빌딩에서 수백억의 돈을 숫자놀음으로 돌리는 곳이다. <피에타>의 이정진이 사채업자의 자본을 지키기 위해 공구 상가를 돌아다니며 상인들의 팔과 다리를 잘랐다면 <우는 남자>의 김민희는 공격적 M&A로 기업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그 보상으로 빨간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해 상패를 받고 노래를 부른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환상은 <피에타>에서보다 <우는 남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이 있지만 성공한 엘리트우먼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대목들에서 최모경(김민희)의 슬픔은 진부한 방식으로 포장되고,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 역시 진부함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116분을 채운다. <우는 남자>의 총격전과 곤(장동건)의 아픈 과거와 최모경(김민희)의 슬픔은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작 <아저씨>에 비해 이야기의 개연성이 촘촘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자본가의 속성과 두 사람의 아픔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모성에 집중했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자본은 단지 상업 영화로서 보여주고 싶은 무대-배우들의 액션을 돋보이게 하는 무대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는 남자>가 자본가의 이야기로 보인다.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을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를 보여주고 다만 관객의 동정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곤(장동건)과 최모경(김민희)의 아픔을 양념처럼 뿌리는데, 이것이 관객들에게는 자본에 대한 반성을 방해하고 한 남자와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인식하게 만든다. 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영화라니! 영화 산업의 거대한 자본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싶어한다. 영화는 단지 이야기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관객은 반성하지 않는 자본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농익은 눈물과 웃음에 같이 울고 웃을 뿐이다.

<우는 남자>의 한장면 검은 자본의 무대 위에서 만난 최모경(김민희)과 곤(장동건). 김민희의 연기가 영화를 살렸다.

▲ <우는 남자>의 한장면 검은 자본의 무대 위에서 만난 최모경(김민희)과 곤(장동건). 김민희의 연기가 영화를 살렸다. ⓒ 다이스필름


참회의 길을 묻다

김기덕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액자 구조로 <피에타>를 완성한다. 장미선(조민수)의 아들을 자살로 몰고 간 이강도(이정진)는 장미선의 아들이 되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의 길을 나선다.

<피에타>를 본 뒤로 마지막 장면을 종종 떠올린다. 참회의 방법으로 이정진은 도로에 피를 흘리며 차에 매달려 다닌다. 그 길은 흡사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매고 올라가는 그 피의 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우는 남자>에서 곤이 선택하는 참회의 방식과는 다르다. 곤의 참회가 단말마적인 참회, 충동적인 참회라면 이정진의 참회는 헐리우드식 액션으로는 느낄 수 없는 고행으로서의 참회이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마다 눈물을 아낀다. 관객으로부터 동정심을 자아내지 않는다. 대신 참혹한 풍경과 고통에 갇힌 인간의 폭력을 자주 보여주는데 관객은 이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피에타(Pietà)'의 원래 뜻은 '비탄'이다. 비탄의 이유는 모성 때문이 아니라 자본 때문이다. 모성의 상실과 모성의 복수는 자본이 만들어낸 비탄이다. 그런데 참회의 길을 나서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너무 끔찍하지 않나. 자본에 농락당하며 버림받은 인간이 자본을 대신해 참회에 나서는 모습. 예수가 자신을 버린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진 것처럼,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자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버림받는 동시에 참회하는 인간으로.

우는 남자 피에타 김기덕 이정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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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와 시, 소설을 좋아했다. 지금은 워킹맘으로 양육과 일 두마리 토끼를 잡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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