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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을 향하여 들어선 마을
▲ 시산도 마을 전경 동쪽을 향하여 들어선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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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식이 최고인 부자 섬, 시산도

시산도는 고흥반도 최남단에 있는 섬 중의 하나이다. 22년 전에 하룻밤을 지낸 인연이 되어 그 뒤에 3번은 더 온 정다운 섬이다. 녹동에서 여객선을 타면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지만 하루에 한 번 육지와 이어지기 때문에 들어오면 반드시 일박을 해야 하는 먼 섬이다. 시산도는 아직도 차도선이 아닌 일반 여객선이 사람을 싣고 다닌 고흥군내 섬중에서 가장 교통이 불편한 섬이다. 시산도에서 아침 7시30분에 출발하여 1시간 만에 녹동항에 도착하고 그 배가 다시 오후 3시에 녹동을 출발하여 시산에 들어간다.

따라서 육지에서 시산에 들어가 일을 볼 사람은 당일로 갔다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사선을 빌려서 타고 나오는 것 말고는 없다. 육지와 매우 가까운 섬 시산도는 교통은 아직도 대하민국 섬에서 꼴치 수준에 가깝다. 연육된 거금도 오천포구 바로 앞에 있는 시산도는 4km, 거금도를 통하여 시간과 거리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고 하루에 두 번 이상 다닐 수 있는데도 아직까지 진전이 없다.  

녹동에서 여객선을 타고 들어오는데 젊은 선장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였다. 20여년 전에 어민들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하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인연이 닿아서 알게 되었다. 선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벌써 배가 시산도 관문인 샛구무에 닿았다. 샛구무는 섬 동쪽에 위치하여 해가 뜨는 마을이다. 샛구무 마을과 함께 반대쪽에 발전소가 있는 서쪽에 있는 섯금 마을이 하나 있다. 서쪽의 섯금 마을은 교통이 불편하고 겨울에는 북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사람들이 뭍으로 빠져나가면서 이제는 몇 가구만 남아 있다.

오전 7시반에 갔다가 3시에 돌아온다.
▲ 고흥 녹동항 - 시산도 행 일반여객선 오전 7시반에 갔다가 3시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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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구무 선착장 주위의 물량장은 제법 넓다. 고깃배는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고 어장 관리선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배들이 이중삼중으로 정박해있다. 모두가 김 양식 어장 관리선들이다. 양쪽에 긴 방파제가 있고 유달리 등대가 많은 곳이다. 거기에다 두 개의 무인도가 시산항을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방파제는 하늘에서 바라보면 마치 갈매기가 날아가는 그런 형태다.

여기서 마을을 바라보면 낮으마한 산 아래에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마을은 섬 동쪽의 시산 나루터 주변에 분포한다. 물량장에는 화물 차량들이 몇 대 있는데 다량의 김양식을 할 때 크레인으로 김양식 도구를 싣고 여기저기로 옮기는 역할과 녹동에서 온 짐을 선착장에서 집까지 운반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육지 처럼 그 흔한 식당이나 술집과 민박집도 없는 마을이다. 최근에 건축된 마을회관 2층에 콘도형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어 5∼6명 정도가 숙식할 수 있는 방이 3개 있다. 면적 3.65㎢, 해안선 길이 24㎞, 고흥 녹동과는 10km, 이 섬의 최고점으로 해발 179m의 봉화산이다.

일행 7명이 해넘이를 감상하고 있다.
▲ 섯금 마을에서 해 지는 장면 일행 7명이 해넘이를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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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도(詩山島)'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정조 때로 제주도에서 양선도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구전으로 전해온다. 음력 3월 3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산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양목장에 소속된 시산도의 목장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말 12필을 방목하였며 여수 돌산군에 속했다가 해방 이후에야 고흥군으로 편입되었다. 시산도는 제법 커다란 물양장 가운데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으로 마을표지석이 있다.

상당히 큰 돌에 새겨진 글귀는 '詩山 어서오십시오'다. 보기 드물게 시 시(詩)자를 쓰고 있었다. 표지석 아래에는 마을 유래가 새겨져 있다. 본래 시산도는 앞에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면 마을 지형이 마치 '활' 모양으로 생겼고 간조 시에 보면 화살 모양의 돌무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듯이 보여 시산(示山), 시산(矢山), 시산(詩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제 때 시산(矢山)으로 굳어졌다가, 한 출향인의 제안으로 1995년 군의회의 의결을 거쳐 '시산(詩山)'이란 시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해서 문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문원지방'이란 뜻으로 '시산도(詩山島)'로 개명했다는 내용이다.

일행 중 한 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시산도 표지석 일행 중 한 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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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는 마을표지석을 세울 때 헌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새긴 '헌성비'가 있고 마을표지석 뒤에는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글귀와 함께 하단에 '시산팔경'이 새겨져 있다.  앞에는 '공원조성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기념비에 의하면 이곳이 원래 '용의 터'였다고 한다. 먼 옛날 남해 용왕이 용궁을 나와 사해를 두루 살피고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가히 하늘 아래와 바다 가운데 길한 당이 바로 여기로구나!"하고 궁인들과 함께 오랫동안 머물며 즐거운 생활을 했다고 하는 이곳을 '용의 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1815년에 크고 작은 두 개의 선착장을 쌓은 이후로 190년 동안 선류장으로 사용했으나 2000년 무렵부터 국가어항으로 시산항이 개발되면서 선착장과 선창안(선류장)은 매립되어버렸다. 기념비 뒤에는 나옹선사의 시 '청산은 나를 보고'가 새겨져 있다.

시산도의 주업은 김양식인데 넓디넓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라서 최적의 장소를 자랑하여 고흥군 관내에서 최고의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 되었다. 시산도는 다른 섬들 처럼 매우 가난한 마을이었다. 1973년도에는 214가구, 1,445명이 살아가는데 농토가 턱없이 부족하여 물과 식량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마을이었다. 오직 바다에서 나오는 김, 톳, 미역, 파래, 고기를 말려서 풍선을 타고 노를 저어 육지에 나가서 머리에 이고 지고 도부질을 하였다. 귀한 식량으로 바꿔서 살았고, 겨울에는 고구마를 삶아서 점심을 대신 먹었다.

김양식을 위한 배
▲ 바다에서 돌아온 어민 김양식을 위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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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도가 부자 마을이 된 것은 김양식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김양식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대부분 소규모 지주식 김양식을 했는데 시산도는 바다의 수심이 깊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고대구리(소형기선저인망) 어업이 성행한 섬이었다. 그러다가 70년도에 완도에서 지주식이 부류식으로 기술 개발되어 바다가 좋은 시산도가 급속도로 고흥군 관내에서 일약 최고의 마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시산도에 오면 일년 내내 김양식 위해 발대 만드는 일로 분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 앞 방파제에는 김양식 두구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 넓은 물량장이 좁아서 다른데로 싣고가서 일을 할 정도이다. 젊은이들은 대나무를 가지런히 한쪽에 쌓는 일을 반복한다.

"1년 내내 김양식에 매달려 김발을 바다에 담갔다가 뺐다가 채취하고 씻어내고 고치고. 요것만 만지고 살고 있단게."  "여기는 물 흐름이 좋아서. 김색깔이 반짝반짝 보석보여." 그렇다. 어느 주민의 말 처럼 시산은 인근 해역에서 가장 김양식이 활발한 곳이다. 앞 바다는 다른 어장 사람들이 탐을 낼 정도로 김양식에 적합한 바다라고 한다. 세상 어느 김도 시산김 빛깔을 따라갈 수 없다 한다. 그러나 김의 소득 많아도 감가삼각비를 따지고 보면 남는 것이 없고 빛을 많이 진 사람도 많다고 한다. 물자와 인건비, 유기산, 유류대가 비싸고, 이상기온으로 인해 날씨가 덥거나 너무 추우면 김에 병충해가 생겨서 썩는 현상이 나타나 결국 빚을 지고 만다. 이곳 사람들은 빚 없는 사람 얼마 없을 정도로 해마다 재투자를 하는 바람에 실속이 없어진 것은 물가는 계속 올라가도 김 값은 20년 전하고 똑같다. 그때도 5,000원, 지금도 5,000원이다. 물론 대량 생산을 하지만 많이 나면 그만큼 값은 떨어진다. 
어민들은 턱없이 비싼 유기산 때문에 현실화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시산도의 40여 김양식 가구는 가구당 약 300~500여책을 시설하여 총 64억원의 생산고를 올려 가구당 평균 1억5천만원의 조수익을 올렸으며 시설 투자비 40%를 제외하더라도 평균 1억여원의 획기적인 순소득을 올렸지만 최근 김값 하락과 소비감소 등으로 양식어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깨끗하게 만들어 가을에 바다에 넣는다.
▲ 철거된 김양식 도구를 씻고 있다. 깨끗하게 만들어 가을에 바다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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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도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 바닷가에서 일하는 어느 주민 시산도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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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웃자, 웃자

마을의 경로당 앞 복지회관 옆에서 시작되는 골목길이다. 입구에 열녀비가 있다. 이 골목길로 들어서면 이내 갈림길이 있고 오른쪽에 시산상회라는 가게가 있다. 담장에 'slow'라는 영문이 여기저기 쓰여 있다. 그만큼 이 골목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편으로 차들이 드나들 때 조심하라는 의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나 왼쪽으로 가나 길은 이어지지만 오른쪽으로 끝까지 가면 집이 가로막고 있다. 한참 가다가 되돌아 나와서는 오른쪽으로 스러져가는 폐가 앞으로 난 골목길을 들어서야 본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골목 끝에 있는 집 바로 아래에 지붕에는 특이한 글이 하얀 페인트로 쓰여 있다. '히' '웃자 웃자'가 그것이다. 황현순(77) 아주머니 아들이 김용현이란 청년이 쓴 글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래 '웃자 웃자' 이 외로운 나그네에게 웃음을 선사했으니 글을 쓴 자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詩)의 섬, 시산도에 와서 지붕을 공책 삼아 쓴 한편 시가 나를 웃겼다.  "웃자 웃자!!"

우리 일행들이 웃으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허름한 지붕 앞 뒤에 히, 웃자 웃자 글씨 모습 우리 일행들이 웃으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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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대부분 누구나 다 일년 내내 일한다.
▲ 김양식 도구를 새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곳은 대부분 누구나 다 일년 내내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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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도를 떠나면서

시산도는 여수에서 완도를 가는 길목에 있는 섬이다. 그래서 이 섬에 오려고 객선을 타고는 한 번 왔지만 탐사선 등대호를 타고는 3번 왔다. 두 번은 시산교회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머물렀고 두번 마을회관에서 지냈다. 시산도의 가장 큰 단점은 교통이다. 명절이나 여름 한철에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그 외에는 낚시꾼들만 이곳을 찿는다. 연륙된 거금도와 불과 5Km 정도 되는 접근성이 뛰어난 섬이지만 오고 싶어도 아직도 교통 체계는 70년대 그대로이기 때문에 아직도 육지와의 거리가 멀기만 하다. 하루속히 거금도와 시산도 사이에 일반선이 아니라 차도선을 보내주어 김양식에 최고로 수입을 올리며 고흥군을 효자 섬 시산도 주민들에게 육지 나들이를 원할이 할 수 있는 선물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이 좋아 시산이요

물이 좋아 시산이라

산 좋고 물 좋다만

님이 없어 외롭구나

샛바람 하늬바람

비린내 나는 정든 내 고향

내 고향 시산도가

나는 정말 못잊겠네

구멍이 이체롭다.
▲ 시산도의 명물 구멍이 이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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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도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딸린 섬으로 면적 3.65㎢, 해안선 길이 24㎞, 이 섬의 최고점으로 해발 179m의 봉화산이다. 인구는 115호에 370명(2013년)이다. 고흥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연륙된 거금도 남동쪽 4㎞ 지점에 위치하며, 녹동항에서 22km 떨어져 있다.

지명유래

마을 앞 송도 섬에서 바라보면 마을 지형이 활(弓)모양으로 생겼고, 간조 때에는 화살모양의 돌무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섬 이름을 시산도(矢山島)라 하였다고 한다. 한자로 示山, 時山, 矢山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섬 이름을 통일하기로 뜻을 모아 마침내 시산도(時山島)라는 이름을 확정했다. 경치가 아름답고 인심이 후해서 문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문원지방이란 뜻이다.

강대호씨는 어느 은행에 재직 중인 여직원이다.
▲ 산도 산행중에 강대호씨는 어느 은행에 재직 중인 여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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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과 동일



태그:#녹동 , #거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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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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