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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영정.
 조광조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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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연산군 치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조광조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을 가슴에 품었다. 이 때문에 과거시험 대신 혁명운동에 관심을 가진 그는 26세 때인 1507년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하다가 실패했다.

조선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인데다가 명문가의 일원이라는 배경 덕분에 사형을 피하고 훈방된 조광조는 그때부터 시험공부에 매진하여 스물아홉 살 때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서른네 살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이때가 연산군이 쫓겨난 중종반정 9년 뒤인 1515년이었다.

대과 급제로 중간 간부가 된 조광조는 급제 3개월 만에 보수파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다. 이를 계기로 중종 임금의 주목을 받은 조광조는 공민왕 시대의 신돈 못지않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중종의 후원 하에 대권을 획득한 조광조는 이 권력으로 평소 꿈꿨던 개혁을 추구했다. 대표적인 개혁 조치는 기존의 과거제도를 일종의 논술시험인 현량과로 바꿔 개혁파 선비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시킨 일, 도교 제례 기관인 소격서를 폐지하고 향약 보급을 추진하여 유교질서 건설에 기여한 일, 중종반정 때의 국가유공자인 정국공신의 숫자를 대폭 축소해서 기득권층에게 정치적·경제적 타격을 준 일 등이다.

조광조 개혁과제 완수에 열광한 조선 사회

흔히 조선을 유교 국가라고들 말한다. 조선이 유교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였다. 그는 보수파를 약화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유교질서를 수립하는 데도 열정을 기울였다. 조선은 건국 100여 년 뒤인 조광조 때에 가서야 진정한 의미의 유교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광조가 개혁 과제를 대략적으로 마무리한 때는 중종 14년 11월 11일(양력 1519년 12월 2일)이다. 정국공신의 숫자를 117명에서 29명으로 축소한 정국공신 개정작업이 조광조 개혁의 대미였다. 정국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보수파 인사들은 국가에서 받은 토지와 명예를 반환해야 했다. 이렇게 개혁을 일단락 짓는 데 소요된 시간은 대략 4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조광조는 중종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보수파인 훈구파를 압박하면서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입지를 최대한 확대시켰다. 그가 만들고자 한 사회는 군주의 독단이 아닌 공적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는 왕도(王道)정치 사회였다.

조광조가 개혁 과제들을 하나씩 완수해 나가자, 조선 사회는 열광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선비들은 조광조의 언행을 흉내 냈고, 백성들은 조광조를 도인으로 인식했다. 조광조는 술과 여자를 멀리한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 여기서 술 이야기는 잠시 뒤에 다시 나온다. 과거시험에 갓 합격한 선비가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바꾸어 놓았으니, 그런 열광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인기는 확실히 중종의 인기를 능가했다.

개혁파 8인의 집에 들이닥친 임금이 보낸 체포조

중종의 무덤인 정릉. 성종의 무덤인 선릉과 함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중종의 무덤인 정릉. 성종의 무덤인 선릉과 함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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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국공신 개정작업이 마무리된 지 4일 뒤였다. 개혁의 성공에 대한 기쁨이 조광조 진영에 아직 넘쳐나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도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을 그들의 단잠을 깨우는 일이 중종 14년 11월 15일(1519년 12월 6일) 밤중에 발생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파 8인방의 집에 임금이 보낸 체포조가 들이닥친 것이다. 새벽에 열린 긴급 어전회의(일종의 비상국무회의)의 결과로 개혁파에 대한 일망타진이 단행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것은 조광조였다. 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그는 감옥 안에서 술을 들이키며 혼란스러워했다. 중종 14년 12월 16일자(1520년 1월 6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심문을 받을 때도 만취 상태였다. '조광조는 술을 멀리하는 도인'이라는 소문을 의식했다면 간수들이 지켜보는 감옥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겠지만, 그때 그에게는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조광조는 임금을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주상 전하를 직접 만나면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중종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중종에게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1506년에 왕이 될 당시만 해도 중종은 허수아비였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정변에 참여했다. 그래서 인조는 왕권을 행사하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종은 쿠데타가 성사된 뒤에 왕으로 추대된지라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중종반정 주역들이 자신과 부인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까지 감내해야 했다. 중종반정 주역들은 중종의 조강지처인 신씨가 연산군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쿠데타 직후에 이 부부를 이혼시켰다.

하지만 중종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다. 비록 남의 힘으로 왕이 됐지만 언젠가는 진정한 왕이 되겠다는 것이 그의 욕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때를 기다리며 숨죽여 살았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그렇게 산 지 9년 만에 중종은 조광조라는 대어를 발견했다. 과거에 갓 합격한 신진 관료가 보수파를 맹렬히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한눈에 반했던 것이다. 조광조(1482년 생)가 중종(1488년 생)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기 때문에 중종은 조광조에게서 형 같은 듬직함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조광조를 앞세우면 훈구파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했던 것처럼 조광조에게 개혁의 전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중종이 조광조를 참모 겸 대리인으로 발탁한 것은 훈구파를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도는 상당 부분 성취되었다. 조광조는 온 열성을 다해 훈구파를 공격하고 그 자리에 신진 개혁파 관료들을 심었다. 개혁파가 훈구파를 능가함에 따라 개혁파의 후견인인 중종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갔다.

그런데 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 관계였다. 중종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조광조를 기용했지만, 조광조의 그렇지 않았다. 조광조는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군주의 힘을 빌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광조는 스스로를 중종의 참모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중종이 자신의 수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러자면 임금도 시스템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조광조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서로 다른 꿈을 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언젠가는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가 추진하는 이상사회가 도래할 조짐이 보이면,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운동 와중에 보수파가 몰락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때 어쩌면 그는 조광조의 이상사회가 곧 다가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 그는 조광조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경연(세미나)을 열어 밤늦게까지 자신을 붙들어두는 것을 보면서, 더 이상 조광조를 조종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또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월 24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중종을 상대로 "며칠 전 경연 때 책 읽기를 힘들어 하시던데, 이것은 깊은 궁궐 안에서 마음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꾸짖었다. 평소 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이 모양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경계심을 품곤 했을 것이다. 

중종은 갑, 조광조는 을... 그는 그걸 몰랐다

조선시대의 경연 장소 중 하나였던 창경궁 숭문당.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다.
 조선시대의 경연 장소 중 하나였던 창경궁 숭문당.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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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에서 갑은 중종이고 을은 조광조였다. 중종은 왕이고 조광조는 참모였다. 조광조가 개혁을 진두지휘하기는 했지만, 조광조에게는 군대나 자금력이 없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오로지 중종의 신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 14년 11월 16일자(1519년 12월 7일자) <중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조광조는 오로지 임금만 믿었고 그 임금이 자기편이라고 확신했다.

조광조는 자기보다 어린 중종이 경연에서 항상 자기의 강의를 듣고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잘 수용해줬기 때문에 중종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종도 자기와 같은 뜻을 품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중종도 자기처럼 훈구파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와 동지인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은 을이고 중종은 갑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종은 갑이고 조광조는 을이기 때문에, 중종이 신임을 거두는 순간 조광조는 낙동강 오리 알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가 보수파를 충분히 약화시켜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조광조의 힘이 너무 세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자, 한밤중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조광조를 체포하고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이때가 중종 14년 12월 20일(1520년 1월 10일)이다.

참고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이나 논문에는 조광조의 사망 시점이 1519년 12월 20일로 표기되어 있지만, 정확한 사망 시점은 1520년 1월 10일이다. 중종 14년 12월 20일이 음력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12월 20일을 양력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이다.

조광조 개혁이 실패한 건, 오로지 중종만 믿었기 때문

조광조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원했건만, 중종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중종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중종은 승지(비서)를 보내 "너희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과격했다"는 한마디를 전하려 했지만, 이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서 훈구파를 코너에 몰아붙인 뒤, 훈구파가 아직 죽지 않은 시점에서 훈구파와 손을 잡고 조광조를 공격했다. 이로써 그는 약화된 훈구파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조광조를 기용할 당시의 목표가 성취된 것이다. 중종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기 목표가 성취되었으므로 조광조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개혁이 처음엔 성공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은 그가 오로지 중종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을 뒤엎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독자적인 군대나 자금원을 확보하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광조는 참모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참모라는 한계에 갇혀서는 자기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종의 변심으로 일순간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광조가 실패한 최대 요인은 그가 중종의 참모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참모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참모가 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 다음에는 광해군의 참모인 이이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참모열전, #조광조,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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