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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윤재환의 책 표지
▲ 윤재환의 신부여팔경 이번 여행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윤재환의 책 표지
ⓒ 스펙트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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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부터 모든 것이 텅 비었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라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언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신 지 5년이 흘렀다는 것도 감지됐다.

긴 연휴가 시작됐다. 가족을 위한 짧은 여행을 생각했다. 그나마 떠날 생각을 한 것은 얼마 전 만난 <윤재환의 신부여팔경>이라는 책이 있어서다. 아내와 아이에게 짧은 여행을 제안하자 모두 응낙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부여)에 가기로 했다. 

차를 몰아 우선 수원에 있는 연화장에 들렀다. 5년 전 이때 내가 사랑했던 두 사람을 보낸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이번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한줌의 재가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관련한 의식들이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산화한 것을 기리는 민들레 조형물을 보고,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추모공원을 배회했다. 붉고 하얗게 피어있는 철쭉은 지금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세상에 인과가 없는 것은 없었다. 2009년 봄 그분의 서거와 그 이후에 오히려 혼란해져버린 세상의 질서가 불러온 타나토스의 기운이 이 어린 학생들을 죽음의 문으로 데려갔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리둥절한 고등학생들과 여느 때와 차이없는 상중의 사람들이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었던 부여

중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우리 가족은 부여로 갔다. 부여가 내 눈에 제대로 들어온 적은 없다. 젊은 시절 들러본 적이 있지만 강렬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의자왕이나 낙화암을 떠올렸고, 얼마전 잠시 스치듯 들렸을 때는 새롭게 자리한 대기업의 리조트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하지만 <윤재환의 신부여팔경>을 읽고 나서 나는 부여에 가리라는 마음의 다짐을 했다. 그것도 천천히 음미해 보리라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역사를 유독 좋아하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아내가 같이했다.

책은 여행자들이 부여를 제대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책의 씨줄은 538년(성왕 16년)부터 123년간 백제의 수도시절부터 당대까지 부여가 가진 역사 이야기다. 반면에 날줄은 2002년 필자와 임옥상 화백, 문화재 전문가 김영복 위원, 최부득 설계사 등을 처음으로 시작된 현지 답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결과물들이었다.

'신부여 팔경'은 이런 답사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 필자등이 공감을 얻어 만들어진 내4경과 외4경을 말한다. 금성산 조망, 부소산 산책, 백제탑 석조, 궁남지 연꽃, 무량사 매월당, 장하리 삼층석탑, 대조사 미륵보살, 주암리 은행나무 등으로 산과 탑, 꽃, 인물, 나무로 다양한다.

사실 이 가운데 한곳은 내 마음에 자리한 적이 있다. 스무살 후반 실연의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데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무량사였다. 국문학도였던 나는 그곳에서 매월당 김시습의 신난한 삶을 이야기해줬다. 자신을 알아주던 왕을 잃고, 세상을 한탄하며 살다가 이곳에 들어와 59살에 생을 마감한 그의 이야기는 친구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친구는 다시 내려가는 길에 공중전화에서 다시 그 여인에게 전화를 했고, 결국 결혼도 했다.  

무량사의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듯이 신부여 팔경 어디도 결코 허투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소산 주변과 궁남지, 대조사를 돌아보기로 했다.

망국은 민중의 희생을 부른다

이름과 모순되게 이곳에 핀 것은 꽃보다는 망국의 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 낙화암 벼랑 위에 자리한 백화정 이름과 모순되게 이곳에 핀 것은 꽃보다는 망국의 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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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입구를 들어서자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졌다. 소나무와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숲길은 개미집 마냥 다채로운 길을 갖고 있었다. 입구의 표지를 통해 이곳이 한국의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는 것을 알았다. 산길을 오르내려 백화정(百花亭)에 도착했다. 나무들 사이로 백마강과 주변이 펼쳐졌다. 다시 강쪽으로 내려가 고란사를 봤다.

푸른 빛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암울한 흔적을 지우기 어렵다
▲ 백마강 위에서 본 낙화암 푸른 빛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암울한 흔적을 지우기 어렵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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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서 구드레 나루로 가는 짧은 유람선을 탔다. 강으로 가니 비로소 낙화암의 비극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망국은 필연적으로 민중의 희생을 부른다. 낙화암에 떨어진 숫자나 신분에 상관없이 무너진 국가가 주는 비극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차례 봤다.

하지만 그 교훈을 타산지석 삼지 못하는 것도 그 동안 지긋지긋하게 봐왔다. 세월호에서 안타깝게 피지 못한 수많은 아이들이 피지 못한 꽃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오버랩돼 풍경을 보는 것도 가슴 아렸다.

용이 된 백제 무왕이 당나라의 장수에게 낚였다는 비극적 전설이 있는 곳이다
▲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 용이 된 백제 무왕이 당나라의 장수에게 낚였다는 비극적 전설이 있는 곳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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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정치는 두고두고 역사의 조롱거리가 된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전설까지 조롱거리였다. 고란사 아래에는 멀지 않은 곳에 붉은 글씨로 조룡대(釣龍臺)라는 표식이 있었다. 나당연합군의 배가 백마강에 진입하자 무왕의 혼령이 용으로 심한 풍랑을 일어 당군을 괴롭혔다. 이에 소정방은 조룡대에서 낚시로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이 있다. 

아름다운 호수지만 무리한 토목공사의 폐해를 말해준다
▲ 무왕과 의자왕이 만들었다는 궁남지 아름다운 호수지만 무리한 토목공사의 폐해를 말해준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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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을 나와 다음에는 궁남지로 향했다. 여름철이 아니라 연꽃이 만발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호수로 된 궁남지의 전경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윤재환의 글에는 없지만 아이는 왕들이 이 연못을 만들다고 돈을 많이 써서 백제가 어려워졌다는 말을 했다.

망국까지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왕부터 의자왕까지 이곳에 적지 않은 재정을 들인 것도 명확하니,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거대한 토목사업이라고 해서 힐난만 할 수 없지만, 그 자원이 한 나라의 미래 동력을 위해 쓰여야할 시기에 엉뚱한 곳에 쓰여 어히려 돈을 잡아먹는 상황이라면 그 비극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거대한 미륵상은 왜 세워졌을까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미륵 신앙을 볼 수 있다
▲ 대조사 미륵보살상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미륵 신앙을 볼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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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를 나와 한참을 달려 대조사에 이르렀다. 역시 윤재환이 신부여팔경에서 유일하게 꼽은 미륵보살이었기에 관심이 갔다.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을 본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은근히 두 개를 비교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낮지 않은 산에 거대한 미륵상을 세운 이들을 생각했다. 미륵은 상생이든 하생이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대중들의 염원이 만든 믿음의 신이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세월호 희생자들이 구천가는 길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 대조사 미륵보살상 가는 길에 수국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세월호 희생자들이 구천가는 길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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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입상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미륵전 앞 용화보전 계단 옆에 핀 수국이었다. 수국은 배고픈 이들에게는 쌀밥으로 보여 비극적인 색채가 짙은 꽃이다. 그런 수국이 만개해 보는 이들을 슬프게 했다. 더욱이 남해안 차가운 바닷속에서 숨을 거둔 이들이 여전히 구천을 향해 걷고 있는 길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 가족은 산을 내려와 다시 속으로 향했다.

사고가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사람은 아이에게 말했다.

"너는 저런 사고가 나면 혼자서 판단해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아이는 "알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난 후 아이는 아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어른들이 하라고 하면 할 것 같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아이에게 조차 어떤 믿음을 줄 수 없는 시대를 산다는 것이 다시금 참담했다.

윤재환의 책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화가들과 만화가들이 느끼는 부여 문화 읽기다. 박재동 화백이나 이희재 화백, 김광성 화백 등 민중의 코드에서 문화 코드를 읽어 내는 것으로 부여 문화가 가진 가장 아늑한 정서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번 답사길에 가장 인상적으로 들어온 그림은 302페이지 이희재 화백이 그린 '백마강'이라는 그림이었다. 그림에서는 회색의 정자에서 회색의 강으로 궁녀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지금도 떨어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부여는 그런 역사의 이야기로 다시 이땅에 미륵이 도래하는 행복한 곳으로 만들라고 말하고 있었다.


태그:#부여, #백제, #부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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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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