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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모르는 대로 흘려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면 달리 보이고, 자세히 보면 더 많이 보인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도 그렇다. 어떤 관객은 눈물콧물 닦아가며 관람하지만, 어떤 관객은 르네 갈리마르(이하 르네)의 절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소(一笑)에 부친다. 단순히 작품에 대한 개개인의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 차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준비했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의 예비 관객들을 위한 눈높이 맞춤별 팁!

극의 이해를 돕는 첫 단추, 버나드 브루시코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프랑스 외교관 버나드 브루시코와 중국 경극 배우 쉬 페이푸의 실화를 소재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차용한 작품이다. 소재가 실화인 만큼, 극의 이해를 위해 실화를 먼저 살펴야한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송(김다현)과의 만남을 통한 르네(이석준)의 의식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는 송(김다현)과의 만남을 통한 르네(이석준)의 의식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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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브루시코는 엄격한 가톨릭 가정환경에서 자란 데다 고등학교 중퇴라는 이력으로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다. 한편 쉬 페이푸는 귀족 가문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년기를 외롭게 보낸 뒤 17살이 되면서 경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사관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훗날 쉬 페이푸가 남자라는 사실을 버나드 브루시코가 처음부터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상반된 진술을 보였으나, 그들이 만나 체포되기까지 20여 년 가까운 시간들을 함께해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어떻게 (쉬 페이푸가) 남자라는 걸 모를 수 있지?"라며 이해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왜 남자라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을까?" 또는 "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 채' 관계를 지속해왔을까?"라는 식의 버나드 브루시코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의문을 갖는 것이 극의 몰입은 물론 관람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훨씬 효과적임을 일러둔다.

처연한 날갯짓에서 발견한 처절한 몸부림

버나드 브루시코에 대한 이해는 극의 공감과 맞닿아있어 필연적이다. 이는 연극 <엠 버터플라이>가 겉보기와 달리 송 릴링(이하 송)과의 만남을 통한 르네의 의식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충격 실화로서 가볍게 치부하기엔 작품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들을 놓치는 게 여간 아쉽지 않다.

 재판정에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송(김다현)의 모습을 부정하며 귀를 막고 도망치려는 르네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극적인 최후가 엿보인다.
 재판정에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송(김다현)의 모습을 부정하며 귀를 막고 도망치려는 르네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극적인 최후가 엿보인다.
ⓒ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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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는 르네와 송의 로맨스, 나아가서는 동서양의 편견에서 오는 시각차와 남녀사이의 권력 균형, 성에 대한 경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들에 대한 논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단단한 연결고리가 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욕망이다. "나를 속인 건 나의 욕망"이라는 극의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현실에서의 결핍은 환상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환상은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다 결국에는 판단력을 흐리고 절망을 안겨준다. 르네 역시 자신의 결핍을 송으로부터 발견하고, 여기에 환상을 덧입힌다. 재판정에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송의 모습을 부정하며 귀를 막고 도망치려 발버둥치는 르네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극적인 최후가 엿보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환상 속의 사랑을 간직하는 편을 택한 르네(이석준)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그러했듯, 자결을 결심한다.
 환상 속의 사랑을 간직하는 편을 택한 르네(이석준)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그러했듯, 자결을 결심한다.
ⓒ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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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르네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대신 환상 속의 사랑을 간직하는 편을 택한다. 남겨진 선택지는 단 하나, 마담 버터플라이가 그러했듯 자결이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이자 유일한 선택지인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르네는 깨진 거울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목에 가져다 댄다. 욕망이 빚어낸 일그러진 환상의 최후가 얼마나 참혹한 지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르네를 한심하다 단정 짓고 비난할 수 없다. 비웃어서도 안 된다. 욕망에 가려진 눈과 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연극 <엠 버터플라이>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아픈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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