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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이종린 선생. 2004년 국가보안법 철폐 단식 당시.
 생전의 이종린 선생. 2004년 국가보안법 철폐 단식 당시.
ⓒ 오마이뉴스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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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향년 92세로 별세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아래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송석(松石) 이종린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이 지난 7일 오후 7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통일운동 원로들을 비롯해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하고자 모였다.

선생은 1923년 2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강제징용을 당해 일본 오사카의 구축함 제조 공장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학습을 하고, 그 내용을 고국 사람들에게 전달하다 1945년 5월 일본 오사카시 중부군관구 헌병사령부에 구속됐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였다. 그러다 3개월 후인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이 해방되자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 이후 분단된 조국에서 통일을 위해 이후의 생을 통째로 바쳤다. 그리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당해왔다.

선생의 약력에선 항상 '구속'과 '연행'이란 단어가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그는 평생 동안 19회에 걸쳐 구속, 예비검속, 연행 등의 고초를 겪었다. 92년 생애 중 6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미 1946년 조선민주청년동맹, 1947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할 때부터 예비검속 대상이 되어, 아무 혐의가 없음에도 죄를 지을 개연성이 있단 이유로 구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1961년 9월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아래 민자통) 사건'으로 구속당했다.

민자통 사건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평화통일을 주창하던 혁신계 인사들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영장도 없이 구속당한 사건이다. 당시 선생은 군사쿠데타 직전인 5월 13일, 동문인 서윤복 당시 서울운동장 소장(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을 설득해 민자통 주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일조했다. 이 대회엔 5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이 대회에서 그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의 구호가 나왔다.

90 평생 동안 통일 위해 싸우다 19차례 구속과 연행

7일 서울대학병원에서 열린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고(故) 이종린 선생 추도식에서 노래패 희망새가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7일 서울대학병원에서 열린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고(故) 이종린 선생 추도식에서 노래패 희망새가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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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선생은 1980년대 후반 범민족대회 성사 및 1990년대 초반 범민련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94년 범민련 남측본부 서울시연합 초대 의장을 지냈다. 1995년 그는 범민련 결성에 주도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다시 구속당해 1년간 복역했다. 범민련의 핵심 기조인 3자연대, 즉 통일을 위한 남-북-해외동포의 연대를 주장하는 게 정권 입장에선 '적과의 내통'으로 보인 것이다.

팔순을 넘긴 후에도 선생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2004년 8월, 그는 국가보안법상 금품수수,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당했다. 그해 12월,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무기한 단식농성'에 300여 명의 국민단식농성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찬바닥에 오래 앉아 하반신이 휘청거리는 고통 속에서도 단식을 끝까지 결행했다. 2004년 12월 10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선생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결의를 밝혔다.

"14번의 구속영장 발부와 5번의 임의동행 등 야만적인 국보법에 의해 내 인생은 고통스러웠다. 국보법 폐지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천정배 열린우리당 대표의 연내처리 유보발언을 듣고 암담했다. 앞으로 5년을 더 살지 10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내 생명이 사는 길은 국보법을 해체하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04. 12. 15. <지금 여의도는 '국보법 폐지' 단식 물결>

팔순 넘어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위해 겨울날 단식농성

이처럼 90 평생을 탄압과 역경 속에서 자주와 통일을 위해 끝까지 싸워온 이종린 선생을 많은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병환으로 광주에서 요양 중인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은 "선생은 팔순에 이르러 또 한번 국가보안법으로 탄압을 받으실 때 소환과 수사, 재판 등에 일체 불응하시는 투쟁을 통해 분단모순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의 자세가 보다 원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웠다"고 추도사를 보내왔다.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 또한 옥중에서 보내온 추도사를 통해 "통일선봉대 총단장을 맡아 전국을 누비며 투쟁하셨고, 모든 투쟁의 선두에서 의연히 실천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명예의장님은 참으로 행동하는 청년이셨다"고 밝혔다. 선생은 칠순을 바라보던 시점인 1991부터 1993년까지, 연속으로 2~4차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 총단장을 맡아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활동했다.

추도식에 참가한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은 "저는 고 이종린 선생님을 잘 안다 할 수 없다. 가시는 길에서야 그분의 발자취를 짚어본다"고 말을 꺼내며, "통일을 말하면 종북으로 몰고 평화를 외치면 간첩으로 조작하는 부정한 권력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당신이 그랬듯, 우리는 평생을 다해 분단권력과 맞설 것"이라고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밥이 우선인 시절, 아버님은 통일을 외치셨다"

이종린 선생의 장남인 이원구 씨가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 추도사 낭독하는 이종린 선생 장남 이종린 선생의 장남인 이원구 씨가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 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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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도식의 마지막 순서로, 선생의 장남 이원구씨가 부친께 이별의 추도사를 올렸다. 그는 추도사를 낭독하는 내내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밥이 우선인 시절, 아버님은 통일을 외치셨습니다. 비록 지금 이 자리가 통일된 조국은 아니지만, 아버님이 뿌린 통일의 씨앗은 머지않아 발아하여 멋진 꽃송이를 피우리라 믿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면서 조국통일의 그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추도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합동헌화로 이날 추도식은 마무리됐다. 발인은 8일 오전 6시로, 발인식 뒤 장지인 전북 임실군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종린 선생, 그는 험난했던 92년의 삶 내내 분단된 이 땅의 아픔을 한몸에 안고 살았다. 선생의 삶은 그의 호인 송석(松石)처럼, 소나무와 돌을 빼닮은 삶이었다. 아무리 험난한 시련이 닥쳐도 소나무처럼 지고지순한,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신념을 가지고 살다 갔다. 그 신념은 분단된 조국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정신이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을 위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이종린 선생님, 통일 조국에서 부활하소서.


태그:#이종린, #범민련, #민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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