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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여행지, 우유니 소금사막을 보고 떠나는 길이라서 그랬을까. 저녁 8시,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뒤에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매우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난 뒤였다.

남미에서 최빈국에 속하는 볼리비아의 고속도로는 수도 라파즈로 가는 길임에도 절반 가량이 비포장 도로였다. 술에 취한 것마냥 흔들리는 버스에서 길가의 돌멩이 하나 밟는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받는 초현실 승차감이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 라파즈

언제나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라파즈의 버스터미널
 언제나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라파즈의 버스터미널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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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2시간 뒤인 아침 8시,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에 멍한 상태였지만 우리는 가방 끈을 고쳐 메며 긴장한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와 더불어 '강도'의 대명사라는 라파즈. 아니나 다를까 터미널을 빠져나오니 총을 들쳐 멘 군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좁은 도로에는 차들이 무질서하게 엉켜다니고 독한 매연으로 시야가 금세 누래지는 거리를 보고 있으니,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숙소부터 들러 짐을 내려놓고 샤워를 끝내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 라파즈의 고도는 해발 3660m. 공식적으로는 라파즈에서 두어시간 떨어진 포토시(Potosi, 해발 4000m)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도시다. 하지만 라파즈는 수도, 즉 대도시 중에 가장 고도가 높은 상징성을 가진다. 조금만 급하게 걸어도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어야 하니 이곳 사람들은 걸음을 빨리 하는 일이 없다.

몇 해 전에는 국제축구연맹에서 건강을 이유로 볼리비아에서 국제경기를 금지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당시의 볼리비아 대통령은 해발 6000m 높이의 산 정상에서 축구 시합을 열어 항의를 표했다지만 숨이나 쉴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높은 중절모에 보따리를 멘, 전통의상을 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높은 중절모에 보따리를 멘, 전통의상을 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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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을 걸어 다녀본 결과, 우리는 라파즈가 유달리 위험한 곳임은 아니라고 결정을 내렸다. 여행객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언제나 느긋한 시민들과 비둘기라도 튀어나올 듯이 높이 솟은 모자를 머리 위에 살짝 얹은 채, 언제나 행낭을 메고 다니는 볼리비아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의 모습은 그저 한적한 마을의 풍경과도 같다. 무엇보다 여행자의 물건을 훔쳐 들고 뛰어서 달아날 수나 있을지.

한편 볼리비아의 특별함은 싼 물가에 있다. 15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작은 콜라 한 병과 얼굴만한 크기로 썰어진 수박 한 조각이면 매연이 가득한 거리도 즐거운 여행지가 된다. 그렇게 한 낮을 거리에서 보내고 돌아온 숙소에서는 여행자들끼리의 수다가 한참이다. 그 틈에 슬그머니 끼여 맥주 잔을 부딪히며 한참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여행자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왔다고? 거기는 기름이 그렇게 싸다며? 렌터카로 여행하고 싶은데 어때?"
"기름을 가득 채워도 50센트에 불과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너는 대체 목숨이 몇 개지?"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하는 나에게 그 친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 친구. 니가 만약 보통의 인간이라고 생각되면, 이번 생에는 베네수엘라를 피하는 것이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맙소사. 적어도 이번 생에는 베네수엘라 미녀와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가난할수록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라파즈의 모습은 역시나 한 나라의 수도 치고는 너무나 낡았다. 곱게 늙은 배우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세월과 풍파에 시달리며 잔뜩 주름이 진 농부의 얼굴처럼. 시내를 따라 길게 뻗은 대로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시선이 닿는 곳곳마다 옹기종기 얽혀 있는 집들이 보인다. 라파즈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000m에 달한다고 하니 대체 4000m 높이에 집을 짓고 산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공중도시 라파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킬리킬리 전망대. 가는 길에 우범지대가 많으니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공중도시 라파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킬리킬리 전망대. 가는 길에 우범지대가 많으니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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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생긴 승합차를 탈까 하다 단돈 천 원에 불과한 택시 요금을 내고 오른 언덕의 이름은 킬리킬리(Killi-Killi). 그곳이야말로 라파즈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수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거대한 산맥의 중턱부터 시작되는 산동네는 도대체 어디가 끝일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협곡의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다.

멋있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놀랍다. 어떻게 저런 곳에 집을 짓고 살 생각을 했을까. 아니 어쩌다가 이들은 4000m 높이까지 올라와야 했을까.

수도 라파즈의 꼭대기는 해발 4000m에 달해 6000m 높이의 눈덮힌 와이나 포토시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다.
 수도 라파즈의 꼭대기는 해발 4000m에 달해 6000m 높이의 눈덮힌 와이나 포토시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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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대다수 국가들이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후 발전을 이룬 것과 달리 볼리비아는 유독 긴 식민 시절을 겪어야 했다. 남쪽으로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북쪽으로는 페루와 브라질과 국경을 접한 볼리비아는 강대국들의 견제와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결국 유일한 숨통이었던 서부 해안과 그 주변의 풍부한 평야들을 모두 칠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오로지 내륙으로만 이루어진 국토는 네 개 나라에 의해 갇힌 꼴이 되어 버려 경제적, 정치적으로 소외된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점점 더 비참해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전망이 좋고 넓은 언덕으로 가는 우리네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가난할수록 고립될 수밖에 없는 고지대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개미떼처럼, 도저히 사람이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협곡과 산 꼭대기 능선까지도 집들이 줄지은 것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기분이 든다.
 마치 개미떼처럼, 도저히 사람이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협곡과 산 꼭대기 능선까지도 집들이 줄지은 것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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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킬리의 전망은 그래서 슬프다. 빼곡히 들어선 붉은 판자촌 너머로 이토록 멋들어진 설산이 버티고 있음에도 그 무엇도 이곳에 사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만들다 만 집처럼 붉은 색 벽들 중간 중간 부서진 내부가 그대로 노출된 집들, 숨조차 쉬기 힘든 그곳에서 빨래를 널고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는 여인들. 그 흔한 모습에 그토록 몸이 떨렸던 것은 단순히 고도가 높아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 산이 불을 밝히는 라파즈의 밤.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 산이 불을 밝히는 라파즈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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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어둠이 내렸을 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리로 나와 다시 언덕을 바라보곤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만 다행히도 전기는 들어오나 보다. 어쩐지 돈을 쓰면 쓸수록 미안해지고 숙연해지는 도시, 라파즈. 세계일주가 아니었다면 결코 찾지 않았을 도시지만,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가난이 괜찮은 건 아니다.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밤은 혜성처럼 긴 슬픔의 꼬리를 가진다.

간략여행정보
한 때 남미에서 강도사건이 가장 많은 도시로 악명이 높았던 라파즈이지만, 소금사막을 비롯한 기묘한 자연풍경에 이끌린 관광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치안 유지가 되어 있는 편이다(밤거리를 걷는 것은 여전히 좋은 생각이 아니다).

라파즈에서 걱정할 것은 오히려 장거리 버스와 고산증. 남미의 장거리버스에 잘 적응이 된 사람조차도 볼리비아에 들어서면 차멀미를 호소할 정도로 볼리비아의 도로사정은 썩 좋지 않다. 수도인 라파즈로 가는 길도 예외가 없으니 볼리비아에서는 어디서든지 조금이라도 비싸고 좋은 버스를 탈 필요가 있다.

라파즈의 놀라운 풍경을 낱낱이 볼 수 있는 킬리킬리 전망대의 높이는 4000m에 가까우니 여전히 고산증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킬리킬리 전망대로 가는 방법은 택시가 일반적이며 물가가 싼 볼리비아에서는 수도 라파즈라고 하더라도 택시요금이 3천원을 넘기기 힘들다.

한편, 여행자를 위한 호스텔을 비롯한 편의 시설은 라파즈 버스터미널 근처에 집중되어 있으며 라파즈 시내의 대부분의 장소는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태그:#라파즈, #킬리킬리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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