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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군대에 있을 당시 내무반 구석에서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독일인 에리히 레마르크가 쓴 책이다. 레마르크는 이 책에서 전쟁의 참상과 무의미, 전쟁의 광기와 일상사의 문제를 한 미숙한 젊은 독일군인의 심리를 통해 묘사했다.

나 역시 전두환 군사독재 하에서 군 생활을 한 '미숙한 젊은 군인'이었기 때문인지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저자가 주인공인 한 군인의 독백을 통해 말한 아래 구절은 33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내가 이 곳(군대)에서 배운 것은 쇼펜하우어의 4권의 저서보다도 잘 손질된 단추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처음엔 놀랐다. 그 다음엔 분개하였다. 마지막엔 방관적인 태도에서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결국 결정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체념해 버렸다. 즉 중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고 구둣솔이며, 사상이 아니고 조직이며, 자유가 아니고 훈련인 것이다."

나 역시 군복무 당시 상관들의 군화를 빛나게 못 닦았고 민첩하지 못하다고 밤낮 폭력에 시달린 미숙한 젊은 군인이었다. 그래서 레마르크가 막강한 폭력적인 조직의 힘 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져 가는 한 젊은 군인의 생각을 묘사 한 것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다.

하여간 이런 탄식을 했던 그 젊은 군인이 어느 날 전투에서 사망한다. 그러나 전쟁터에 끌려온 이 주인공이 전사한 날 독일군 상황보고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였다. 소우주와 같은 한 젊은이, 어느 집 귀한 아들이 전투에서 소중한 생명을 잃었지만 군 보고에는 "이상 없다"로 기록되는 이 비정상을 통해 레마르크는 전쟁의 비인간성과 광기를 고발 한 것이다.

국정원은 '조작의 대가'인 이승만의 정신적 후손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
ⓒ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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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기를 살아온 우리 삶도 마치 레마르크가 묘사한 광기어린 '군대'와 같이 사상과 자유보다는 훈련과 조직이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지금 조작과 위조로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국정원 감싸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박근혜 정권 역시 '광기에 둘러싸인 정권'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레마르크가 이 책을 쓴 지 100년이 다돼가지만, 지금도 우리사회는 증거조작으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도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비한 비정상이 판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 초대대통령 이승만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오늘의 국정원은 '조작의 대가', 이승만의 정신적 후손들인 것이다.

이승만(1875~1965)은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해 모윤숙(1910~1990)과 미인계를 이용한다. 모윤숙은 해방공간 미군정 치하에서부터 이승만과 밀착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한다. 모윤숙은 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던 인도의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 그가 1948년 3월 12일 표결에서 남한 단독선거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만든다.

훗날 메논은 이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아닌 가슴에 따라 한 결정"이라며 후회했다. 모윤숙 역시 단독정부수립과 이승만을 위해 인도인 메논에게 "속옷을 벗어던지고 논개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분열과 대립을 책동하는 언론의 희생양 김수임

해방공간에서 미인계정치를 거론 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김수임(1911~1950)이다. 김수임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여성이다. 가장 큰 죄목은 1949년의 미군 철수 정보를 북한에 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50년 6월 15일 그녀는 모진 고문 끝에, 민간인 신분임에도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총살되었다.

김수임은 모윤숙과 단짝친구였다. 그래서인지 재판 당시 모윤숙은 김수임을 적극 변호하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유는 당시 좌익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부추겨 분열과 대립을 책동하는 언론 때문이었다. 김수임은 한국전쟁 직전 정치적 혼란기에 빚어진 사회적 집단 히스테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AP통신은 지난 2008년 8월 16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이 해제된 김수임 관련 미국측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이 김수임의 연인이라고 지목한 인물인 존 베어드 당시 미 헌병사령관은 주요기밀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김수임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당시 윌리엄 라이트 미 군사고문단장도 김수임의 자백이 '물고문에 의한 것'임을 증언했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무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종북좌파' 여론몰이와 집단 히스테리가 작동하는 우리의 비정상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탈북한 사람들이 졸지에 국정원과 같은 국가기관의 조작에 의해 간첩으로 둔갑되는 믿을 수 없는 비정상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이승만(1875~1965)과 1살 차이로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처칠은 1933년 독일의 히틀러가 집권하자 나치 독일이 조만간 영국을 공습할 것이라며 영국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지만 당시 평화를 바라던 영국 정계에 의해 무시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예견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고 결국 그는 영국수상에 임명된다.

1940년 5월 13일 처칠은 의회에서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연설을 한 뒤 수상에 취임한다. 그리고 6월 4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국민 연설로 독일 폭격에 연일 시달리는 영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준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들은 바닷가에서 싸울 것이다.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구릉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요, 어떤 공포에서도 승리요,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해야 한다.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1년, 처칠은 미국의 참전 없이는 도저히 나치독일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참전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민에 빠진 처칠이 고안해 낸 것이 '미인계'였다.

미인계에 며느리를 이용한 처칠 영국 수상

윈스터 처칠 전 영국 수상
 윈스터 처칠 전 영국 수상
ⓒ 위키피디아 공동자료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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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처칠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자 루스벨트 대통령 측근이자 미국의 유럽 특사 에브럴 해리만(1891~1986)에게 자신의 며느리 파멜라 처칠(1920~1997)을 접근시킨다. 처칠은 해리만을 런던 도체스터 호텔의 만찬에 초대하면서 며느리 파멜라와 동행한다. 만찬 진행 중 갑자기 독일공습이 시작되었다. 파멜라에게 한눈에 반한 해리만은 지하벙커로 피난 가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처칠의 계산대로 된 것이다. 결국 해리만과 파멜라는 런던 공습 중에 사랑을 나누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 후 처칠은 며느리 파멜라를 이용해 수시로 미국에 대한 고급정보를 빼내고 결국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1942년 봄,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휴가차 집에 돌아온 처칠 수상의 아들 란돌프(1911~1968)는 아내의 불륜과 그 불륜을 아버지 처칠 수상이 사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란돌프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 처칠과도 평생 소원해 진다.

지난 1997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파멜라 해리먼
 지난 1997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파멜라 해리먼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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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파멜라 처칠은 당시 영국 특파원이었던 미국 언론인 애드워드 머로(1908~1965)와도 가깝게 지내기 시작해 1943년에는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머로는 미국의 방송기자로 2차대전 당시 현장 라디오 뉴스를 진행해 수 백 만 명의 청취자를 거느렸던 앵커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을 중계한 그의 방송은 실로 대단했다. 머로는 2차 대전 초기 독일공군의 야간공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마이크를 들고 건물 옥상 위에 올라가 공습상황을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이 현장중계는 2차 대전 참전에 부정적이던 미국 내 여론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한편 파멜라 처칠은 195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고 2차 대전 당시 연인이었던 에브럴 해리만과 1970년 결혼한다. 1971년 미국시민으로 귀화한 그녀는 민주당에서 정치적 대모로 활약한다. 그녀는 1981년 무명의 빌 클린턴을 만나 그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이후 클린턴을 대통령에 당선 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운다.

그래서 파멜라는 '빌 클린턴의 엄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파멜라 덕에 대통령에 당선된 클린턴은 파멜라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한다. 1997년 파멜라가 급작스레 사망하자 클린턴은 대통령 전용기를 프랑스로 보내 파멜라의 시신을 미국으로 모셔온 후 국장으로 예우를 갖춘다. 1997년 장례식장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그녀(파멜라)가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그녀의 역할에 찬사를 표했다.

'조작의 대가' 이승만과 '가장 위대한 영국인' 처칠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빠지고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을 때 이승만과 처칠은 둘 다 미인계를 이용해 난국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와중에 이승만은 자신을 위해 몸 바쳐 일하던 김수임을 냉혹하게 처형했다.

반면 처칠은 자기 며느리를 도구로 삼아 2차 대전의 참전을 꺼리던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히틀러를 패망시키고 2차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국가의 존망과 안녕을 위해 며느리를 이용하고 자기 아들의 가정을 파괴한 처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참고로 지난 2002년 10월 영국 방송은 영국인 100만 명을 대상으로 한 달간 여론조사를 벌여 '위대한 영국인 Great Britons' 100명을 선정했다. 그 중 윈스턴 처칠은 전체 응답자의 28.1%의 지지를 얻으며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에 올랐다.


태그:#이승만,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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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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