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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내는 어디건 파면 문화재가 나온대. 땅을 파면 유물들이 나오니 큰 건물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대."

앞서 걸어가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뒤를 따라가던 사람도 말을 받는다.

"맞아. 강화도가 고려시대 때 한동안 수도였으니 땅을 파면 고려청자가 나오겠다."

별다르게 볼거리가 많지 않아 내심 실망을 하던 사람들이 '고려청자'라는 한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고려궁지를 다시금 둘러보는 눈치였다. 고려 왕조의 궁궐이었던 자리니 운이 좋으면 청자의 파편이라도 하나 발견할지 모른다 싶은지 다들 땅바닥을 부지런히 쳐다보았다.

"땅을 파면 고려청자가 나온대"

땅을 파면 고려청자가 나온다는 말은 예전부터 듣던 소문이었다. 무슨 공사를 하다가 고려청자를 발견했다느니 어디에서 뭐가 나왔다느니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하고는 했지만 구체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쩌면 내게도 그런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게 생기곤 했는데,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고려청자'는 누구에게나 숨길 수 없는 매력적인 환상이다.  

 고려궁지에는 고려 궁궐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고려궁지에는 고려 궁궐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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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곳, 그곳은 바로 강화도다. 국보 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砂蓮華文瓢形注子)'도 강화도에서 출토가 된 것이다. 강화도가 어떤 곳이기에 문화재들이 땅속에 묻혀있는 것일까.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는 한때 우리나라의 수도였다. 역사 이래로 한반도에서 도읍지였던 곳은 여러 군데가 있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고려였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그리고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했던 시절의 강도경(江都京)이 우리나라 통일 국가들의 수도였던 셈이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략 때 큰 피해를 입었던 고려는 이듬해 여름에 강화로 수도를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이후 39년간이나 강화에 머물면서 몽골에 대항해서 나라의 본체(本體)를 지켰다. 그때 개경에서와 똑같은 궁궐을 짓고 생활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 사적 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려궁지'다.

사실 고려궁지는 볼 게 별로 없다. 아니 볼거리는 많지만 고려궁궐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볼거리가 없다. 궁궐이라고 해서 대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터도 넓지 않다. "애걔, 이게 무슨 궁궐터야? 뭐가 이리 작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려궁지는 아직 그 전모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치 땅을 파면 불쑥 고려청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것처럼 강화에서의 고려, 즉 강도(江都) 시절의 고려는 연구해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다.

 강화도에서 출토된 국보 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주박모양주자 (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 리움미술관에 있습니다.
 강화도에서 출토된 국보 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주박모양주자 (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 리움미술관에 있습니다.
ⓒ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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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궁궐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 왕조는 개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래서 정궁인 만월대를 송악산 남쪽 기슭에 두었고 그 외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서울에도 고려 궁궐이 있었다. 지금 청와대가 있는 자리는 옛날에 고려의 이궁이 있었다고 한다. 이궁이란 왕이 항상 거처하는 대궐(정궁)이 아니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거처할 목적으로 마련한 별도의 궁궐을 말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고 현재는 청와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강화도에도 고려의 궁궐이 있었다. 사적 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강화읍 관청리 일대가 바로 고려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강화도는 고려 정부가 39년간이나 머물렀던 임시 수도였다. 한두 해도 아니고 근 사십 년에 걸쳐 수도였으니 궁궐 역시 개성의 정궁에 버금갈 만큼 잘 지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의 고종 편을 보면 "최우가 이령군(二領軍)을 보내어 강화에 궁궐을 창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로 천도하기 전에 군사 2000명을 보내어 궁궐을 짓기 시작해서 몇 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궁궐이니 당연히 전각들도 많았을 것이다. 개성의 정궁을 본 따서 건물을 지어 이름까지도 똑같이 붙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 뒤의 산도 송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강화는 작은 개경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고려궁지에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다. 고려의 궁궐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왔던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궁궐터까지도 비좁고 옹색하기 짝이 없으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여기를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건물들만 있습니다.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건물들만 있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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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는 강화읍의 뒷산격인 북산의 중턱쯤에 자리를 잡고 있다. 평지를 놔두고 왜 높은 곳에 궁궐을 지었을까. 궁궐이라면 사람과 물자들이 많이 드나들었을 텐데 저렇게 언덕바지의 중턱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면 오르내리기에 불편할 것이다. 땅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밑에도 얼마든지 터가 있는데 굳이 그곳에 궁궐을 지은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강도(江都)의 궁궐 자리라고 알려져 있는 현재의 고려궁지에서는 여러 번의 발굴 조사에서도 궁궐이라고 내세울 만한 특별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 궁궐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개성의 정궁을 본 따서 지었다는 그 화려한 궁궐들이 대체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고려궁지 아래에 있는 동네 중에 '궁골(宮谷)'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궁골은 곧 궁궐이 있던 동네라는 뜻이니 그 일대가 곧 고려의 왕궁이 있던 곳은 아니었을까. 사적 제 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려궁지뿐만 아니라 궁골과 그 인근 일대가 다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라고 생각을 하면 고려사에 기록이 되어 있는 고려궁궐이 눈앞에 그려진다. 

고려궁지 동남쪽에는 '내수골'로 불리는 동네도 있다. 내수(內豎)는 고려 시대에 궁중에서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인데 재예와 용모에 뛰어난 권문세가의 자제나 시문, 경문에 능통한 문과 출신이 임명되었다. 그렇다면 내수골 역시 내수들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동네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또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의 저택도 고려궁지에서 동쪽 방향에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강화읍 요지에는 왕과 실력자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강화읍에는 고려와 연관이 있는 지명들이 더러 있다. 고려궁지에 고려를 나타내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 강화 자체가 고려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마모되고 유실이 되어서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지 한꺼풀만 파고 들어가면 고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려궁지의 뒷산을 강도(江都) 시절에는 송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개경의 고려 궁궐인 만월대는 송악산 아래 있다고 합니다.
 고려궁지의 뒷산을 강도(江都) 시절에는 송악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개경의 고려 궁궐인 만월대는 송악산 아래 있다고 합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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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도(江都) 시절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고 한다. 때문에 그동안의 연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 수년간에 걸쳐 강화읍 일대를 중심으로 강도시대와 관련된 유적의 조사가 증가하면서 강도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고 있으니 앞으로 더 진전된 연구 결과들이 나올 것이다.

강화가 고려를 증언한다

본래 궁궐 담 근처에는 큰 나무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혹시 나쁜 뜻을 품은 자들이 나무를 의지해서 대궐의 담장을 넘는 경우를 경계한 것이기도 하며 또 자객이 나무그늘에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궁궐 담장 안에는 큰 나무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궁궐 문 앞에 나무가 있으면 '한가로울 한(閑)자 모양이 되어 나라가 번창할 수 없다고 여겼으며, 또 담장 안쪽에 나무가 있으면 '곤란할 곤(困)'자가 되므로 궁궐에는 후원 이외에는 나무를 잘 심지 않았다. 그런데 예외인 나무가 있었으니 바로 홰나무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가 그것이다.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해놓은 주례(周禮)에 의하면 회화나무는 삼공(三公) 즉 삼정승이 앉는 자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회화나무는 조정을 상징하는 나무인 셈이다. 회화나무가 있다는 것은 그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고려궁지의 서쪽 담장 곁에는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해 굳건히 서있다.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혹시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나무는 아니었을까. 회화나무인 걸로 봐서 궁궐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아 찾아 보니 수령이 4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이 나무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나무라면 고려를 증언해 줄 텐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려궁지 안에 있는 외규장각 뒤의 빈 터를 발굴 조사중입니다.(2009년 9월 춸영)
 고려궁지 안에 있는 외규장각 뒤의 빈 터를 발굴 조사중입니다.(2009년 9월 춸영)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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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고려궁지를 샅샅이 훑어 보았다. 고려의 흔적을 찾아서 이곳저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외규장각 뒤편의 빈 터는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지 사람의 출입을 막는 팻말이 서있었다. 고려를 찾던 나는 고려궁지와 맞닿아있는 뒷산에도 올라가 보았다.

조심스레 땅을 살펴보았다. 기와의 파편들이 더러 보였고 밑돌로 쓰였음직한 커다란 돌들도 세월의 흔적을 담은 채 풀숲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아래의 한 쪽에는 발굴 조사 때 나온 듯한 돌무더기도 보였다. 고려궁지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강화읍 전체를 다 조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빈 터로 남아있는 곳도 아니고, 몇 백 년에 걸쳐서 사람들이 살아왔고 또 현재에도 살고 있는 곳을 발굴 조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으로만 그때의 고려 수도인 강화를 그려볼 수밖에 없다.

고려가 천도를 했던 당시의 강화에는 30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몰려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강화도의 어디 한군데도 빈 곳이 없이 다 집들이 들어섰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 최고 볼거리였던 팔관회와 연등행사도 개경에서와 똑같이 열었고 또 격구 역시 열렸을 것이다.

격구란 고려 시대에 무신들이 무예를 익히는 방법으로 행하는 놀이를 이르던 말인데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던 격렬한 운동이었다. 말을 타고 하던 경기였으니 상당한 넓이의 경기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격구장은 또 어디였을까. 상상을 해나가다 보니 강화읍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려가 우리를 부른다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읍 모습. 고려궁지 뒤의 북산과, 바다 너머 황해도 개풍군이 건너다 보입니다(3월 5일 촬영).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읍 모습. 고려궁지 뒤의 북산과, 바다 너머 황해도 개풍군이 건너다 보입니다(3월 5일 촬영).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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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 옛날을 그려보면서 강화 읍내를 돌아보면 참으로 생각해 볼거리가 많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어떤 건물이 서있었을까 등등을 상상하면서 강화 읍내를 둘러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과 북산에 올라가보면 북쪽의 산하가 훤히 다 보인다. 당시의 고려 사람들도 여기에 올라와서 개경을 그리지는 않았을까.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그리며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과 그 당시 고려 사람들의 심정이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궁지의 뒷산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낙엽들 사이를 뚫고 달래가 소복이 자라고 있었고 생강나무도 노랗게 꽃을 피웠다. 벌 나비는 아직 때가 이른지 날아다니지 않았지만 사방에는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4월12일 강화 나들길 함께 걸어요
 강화 오마이스쿨에서 4월 12일 강화 나들길 걷기를 합니다. 가족이 손잡고 '호국돈대 해안 길'을 걸어보세요. 강화도는 나들길 걷기가 곧 역사기행인 곳입니다. ☞ 행사 보기

고려의 고종 임금님도 이런 봄을 강화에서 스무 해도 더 넘게 맞이했다. 그때도 햇살은 지금과 똑같이 따뜻하게 비췄을 것이고 바람 역시 숲 사이를 훑고 지나갔을 것이다. 고려궁지에 고려 궁궐은 없지만 햇살과 바람은 여전하다. 

역사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마음의 눈으로 그때를 보면 어느새 우리 눈앞에는 장대한 고려의 궁궐과 그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소박하고 아담한 강화읍이 강도(江都)시대에는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간 수도였다는 것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니 어째 가슴이 설레어 온다. 고려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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