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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아내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한국 근현대사 영화를 몇 편 보여준 적이 있다. <박하사탕> <실미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때 그 사람들> 등이었다. 하루는 아내가 "왜, 한국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닌가요?"라고 뜬금없이 물었다. 난 그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대다수의 영국-미국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 것 같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아내의 질문을 생각했다. '왜 한국 영화는 해피엔딩이 적을까?'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한국과 영국의 역사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나라 역사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다른 느낌이 들었다. 대체로 한국 역사는 읽으면 답답했고 영국 역사는 읽으면 통쾌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저자 함석헌은 우리나라 역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그런데 영국역사에서 1628년 선포된 <권리청원>을 읽은 뒤엔 통쾌하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국민은 누구도 함부로 체포·구금될 수 없다. 군법에 의해 국민을 재판 할 수 없다. 군대가 민가에 강제 투숙할 수 없다.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어떠한 과세·증여 등을 부과할 수 없다."

영국의 <권리청원>이 선포된 지 300여년이 지난 1970년대 한국에선 장준하 선생 같은 민주화운동가들이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법정에서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다.

한국엔 전봉준이, 영국엔 크롬웰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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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와 영국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떠나 비슷한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전봉준(1854~1895)과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다. 전봉준과 크롬웰은 둘 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며 혁명을 주도했다.

전봉준은 외세(청나라와 일본)를 등에 업은 관군에 패하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크롬웰은 오히려 외세(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불러들인 국왕 찰스1세를 반역죄로 체포, 사형시키고 정권을 잡는다.

실패한 혁명가 전봉준과 성공한 혁명가 크롬웰이 과연 한국 역사와 영국 역사에 미친 영향과 교훈은 무엇일까?

전봉준과 크롬웰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무용담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세금과 종교, 외세였다. 전봉준은 동학에 심취했고 크롬웰은 열렬한 청교도(개혁파 개신교)였다.

전봉준은 고종이 불러들인 외세 때문에 혁명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비참하게 효수되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외세를 끌어들인 국왕 찰스1세의 목을 단두대에서 자르고 의회민주주의의 뿌리를 유감없이 다져나갔다.

물세 징수에 항의하다 곤장 맞고 쫓겨난 전봉준

전봉준은 1854년 전북 고창 부근의 몰락한 양반 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38세가 되던 해인 1892년 전북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로부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재산을 수탈했다. 조병갑은 세금 낼 여력이 없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등 갖은 악행을 이어갔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도 그에게 곤장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1893년 전봉준 역시 불법으로 물세를 징수하는 조병갑에게 항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쫓겨났다. 이런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전봉준은 40세가 된 1894년 1월 10일, 1000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봉기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크롬웰은 전봉준이 태어나기 250여 년 전 1599년 영국 케임브리지셔 헌팅턴의 청교도이자 젠트리(귀족 다음계급)의 지주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29세인 1628년 하원의원이 된다. 그러나 1년 후인 1629년, 의회는 국왕 찰스1세에 의해 무려 11년간 해산된다.

찰스1세는 일부 귀족과 대상(요즘 말로 재벌)에게만 상업독점권을 주었고 강제로 국교를 믿게 했다. 이에 대해 크롬웰을 비롯한 다수 국민은 강한 불만을 가졌다. 전쟁으로 돈이 필요했던 찰스1세는 1640년 의회를 소집해 필요한 세금징수 동의만 얻고 해산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의회가 징세와 전쟁을 반대하자 찰스1세는 의회를 아예 해산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42년, 43세가 된 크롬웰 등이 왕의 폭정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 청교도혁명의 시작이었다.

신분제의 전면 폐기를 주장한 전봉준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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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1894년 1월,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했다. 고종은 조병갑 등 부패관리를 처벌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에게 사태를 수습하라 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동학교도에 대한 체포와 살해를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재차 봉기를 일으키고 1894년 4월 전주를 점령한다. 이러자 당황한 고종은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전봉준은 조정에 12개 폐정개혁안 실시를 약속받고 관군과 휴전을 맺었다. 당시 전봉준이 주장한 개혁안의 일부 내용을 보면 참 혁신적이다. ▲탐관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등.

신분제의 전면적 폐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전봉준이 주장한 내용은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토지의 평균분작은 궁극적으로 농민의 토지소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젊은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라는 주장은 참 따뜻한 인간적 호소다.

그러나 조정은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차츰 침략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한다. 20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했지만, 죽창을 든 농민군은 기관총을 든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1894년 12월 28일 전봉준은 붙잡혔다. 외세인 일본군에게 모진고문을 받은 후 그 다음해인 1895년 4월 24일 41세의 나이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한탄했다. 그의 형제들도 연좌제로 사형을 당했고, 그의 후처 송씨는 끌려가 죽을 때 까지 노비가 되었다. 한 혁명가의 가계가 공중분해가 된 것이다.

외세로 인해 실패한 혁명가 전봉준은 역사에 이런 시를 남기고 목이 잘렸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국왕을 반역죄로 단두대에 올린 크롬웰

크롬웰은 1642년 국왕 찰스1세와 의회가 충돌, 청교도혁명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철기병대(Ironside)를 조직하면서 군사적으로 밀리던 의회파에서 활약한다. 결국 크롬웰은 1645년 찰스1세를 체포하고 의회파 측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에서 왕에게 대항한 의회파가 승리를 했지만 그들은 찰스1세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찰스1세는 의회파가 혼란한 틈을 타 탈출하여 외세인 스코틀랜드 군을 불러들이고 의회파에 대항해 또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찰스1세는 또 다시 크롬웰의 군대에 패하였다. 이후 크롬웰은 국왕 찰스1세를 '반역죄'로 단두대 올려 사형을 시키고, 1649년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귀족과 교회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한다. 그리고 1649년부터 51년까지 2년 동안 전 국왕 찰스1세를 지지했던 외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학살로 복수한다.

크롬웰 측근들은 찰스1세의 목을 벤 뒤 그에게 왕위에 앉으라고 권유했으나, 크롬웰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1658년 호국경의 직위로 59세에 생을 마감한다. 크롬웰은 왕정복고로 돌아온 찰스2세에게 부관참시를 당하는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크롬웰이 찰스1세의 전제주의를 파괴한 헌정개혁가이자 내란 후 정치적 안정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에 공헌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실패한 혁명가, 성공한 혁명가

런던에 위치한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
 런던에 위치한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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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전봉준이 크롬웰처럼 혁명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내세운 폐정개혁안 일부라도 1895년에 실현할 수 있었다면 우리사회는 지금 얼마나 앞서 있을까.

- 탐관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오늘의 국정원사태)
-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오늘의 갑을간 노예계약서)
-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2013년 여성성평등지수 세계 136개국 중 한국 111위)
-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지역감정)
-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친일파와 친일역사교과서가 지금도 판치고 있는 우리나라)
-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심화되는 사회양극화 현상)

전봉준은 외세를 끌어들인 왕 때문에 혁명에 실패했고 반역죄로 효수되었다. 크롬웰은 외세를 끌어들인 왕의 목을 반역죄로 자르고 혁명에 성공했다. 지금 전봉준의 동상은 쓸쓸하게 전북정읍에 서 있다. 지금 크롬웰의 동상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그리고 크롬웰 동상 건너편엔 목이 잘린 국왕 찰스1세의 동상이 있다. 만약 전봉준이 크롬웰처럼 혁명에 성공했다면,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에게 잘 계승되었다면, 이 땅에 3·15부정선거, 5·16군사반란, 2012년 12·19 부정선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그 잊어버린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태그:#전봉준, #크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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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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