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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리는 모임이나 행사에 참여했을 때 강화도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우선은 튀고 볼 일이라는데, 강화도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먼 데서 오셨네요. 몇 시간 걸렸어요?" 하면서 관심을 보인다. 늘 받는 질문이라 대답 역시 늘 비슷하다.

"얼마 안 걸렸어요. 올림픽대로로 오면 금방이에요."

정말 내게는 서울이 금방이다. 서울이 멀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다.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신촌에 있는 'ㅎ신문사 문화교육센타'로 가서 배우기도 하고 좋은 공연이나 전시회 같은 것을 보러 가끔씩 서울로 나가기도 한다. 또 아이들이 모두 서울에서 생활을 하는지라 애들 보러 갈 때도 있다.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서울이 멀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고 오히려 갈 때마다 가볍게 설레고 흥분되었다.

서울에서 강화도... 사실 멀지 않다

차를 운전해서 다니는 내게 서울은 먼 곳이 아니다. 신촌은 마치 이웃 동네라도 되는 양 가깝게 느껴지고 광화문 역시 별로 멀지 않다. 그 외의 다른 지역들에 갈 일이 생겨도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모르는 곳에 가더라도 걱정될 게 없다.

 강화도는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강화도는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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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서울을 가깝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서울 사는 사람들은 강화도라면 멀다는 생각부터 먼저 드는 모양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집에 다니러 오는 우리 애들에게도 강화도는 그렇게 먼 곳인지 "집에 한 번 오라"고 하면 멀어서 "힘들다"는 말부터 먼저 나온다. 하기야 차에 시동만 걸면 목적지까지 바로 가는 승용차와는 달리 지하철에 버스까지 몇 번씩 갈아타고 오자면 힘들 것이다. 더구나 주말에는 나들이 차량으로 길이 막혀 시간이 더 많이 걸리니 집에 한 번 다녀오려면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고 다녀보지 않은 나는 애들의 그 심정을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강화도까지 50km밖에 되지 않는데 뭐가 그리 멀다고 그러는 걸까. 애들이 사는 곳이 광진구라서 강화도까지 오자면 멀기는 하다. 그래도 집이 그립다면 그 정도 거리는 문제가 될 게 없을 텐데, 우리 아이들은 강화도 집을 그다지 그리워하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서운할 때도 있다.

애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도시에서 강화도로 이사를 왔다. 애들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애들은 강화도에 별 마음이 없었다. 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서 그런지 애틋한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 애들은 '인(In) 서울'이 목표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을 해서 서울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목표로 공부를 했고,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우리 애들에게 강화도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었을까. 성공과 출세는 서울에 있고 강화도는 정체와 답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화도로 오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나 보다.

옛날에도 그랬을 것 같다. 한양에서 강화로 오는 길은 출세와 영광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회한과 비탄에 더 가까운 길이 아니었을까. 강화도는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역모 혐의를 받은 왕족들이 유배를 오는 곳이었다.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을 비롯해서 조선시대에는 광해군과 연산군이 강화도와 그 옆의 섬인 교동도로 유배를 왔다.

왕족들의 유배지 강화도, 비탄의 길이었다

 강화도는 좁다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와 떨어져 있지요.
 강화도는 좁다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와 떨어져 있지요.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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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는 강화도를 거쳐서 들어가는 곳인지라 강화도와 같게 느껴지는 곳인데, 그곳은 조선시대 왕족들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선조의 첫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님인 임해군이 교동도로 유배를 왔고,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과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도 역시 유배를 교동도로 왔다. 그 외 철종의 사촌인 익평군과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 등도 교동도로 유배를 당했다. 이들은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나거나 또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흔히 왕과 실세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산 사람들이 유배를 당하는데, 될 수 있으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서 다른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함경도나 평안도의 오지로 보내거나 전라도의 오지나 먼 섬, 제주도가 유배지로 정해지곤 했다. 그러나 폐위가 된 왕들과 왕자들은 도성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교동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들은 자칫하면 다시 역모를 꾀할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들이라 특별 관리의 필요성에 의해 가까운 거리의 섬을 유배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한양에서 가까우니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죄목이 역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도가 가시적인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멀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것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산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임해군과 능창대군 등이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모두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소용이 없었다. 

강화도로 유배를 오는 그들에게는 굴욕과 죽음만이 남아 있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파리 목숨과 매한가지였을 그들에게 내일의 기약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회한과 두려움으로 도성을 떠나 강화까지 끌려왔을 것이다. 

 바다가 앞을 막아 갈 수 없었던 육지를 강화대교가 이어줍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바다가 물길을 막습니다.
 바다가 앞을 막아 갈 수 없었던 육지를 강화대교가 이어줍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바다가 물길을 막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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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때 적의 침입을 피해 도성을 버리고 강화로 도망을 온 인조 임금 역시 노정(路程)의 정경을 즐길 형편이 못 되었다. 언제 청나라 군사가 뒤를 쫒을지 알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한 시도 쉬지 못하고 강화까지 숨차게 도망을 왔을 것이다. 강화에서의 생활 역시 두려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비록 바다가 막아준다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청나라의 요구대로 '형제의 의'를 맺고 강화도 연미정에서 화의를 한다.

출세가 아닌 좌천의 길

벼슬아치들은 또 어떠했을까. 서울은 출세와 성공의 다른 이름이고 지방은 퇴락과 좌천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강화의 유수(留守)로 명을 받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줄을 잡아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유수는 조선 시대에 수도 이외의 중요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 외관직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광역시의 시장 쯤 되는 높은 자리였다. 그래도 그들은 혹시 잊히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되어 권문세도가와 줄을 대고 성의를 보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양에서 강화로 오는 길은 이렇게 근심과 비탄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섬이라는 단절감에 변방이라는 고독감까지 들었을 강화도행 길은 그래서 멀고먼 길이었다. 언제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는 있는 있을까. 치욕과 모멸감에 몸을 떨면서 유배를 왔을 그들에게 강화도는 세상의 끝이었을 것이다. 강화도로 오는 길은 그래서 먼 길로 각인이 되었다.

강화도는 도성에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다. 한양에서 강화까지는 140리 길이었으니 하루 걸음으로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광화문에서 양천(서울 강서구)까지가 30리 길이었고 양천에서 경기도 김포까지가 40리였다. 또 김포에서 통진(김포시 통진면)이 40리이고 통진에서 강화는 30리였다. 그래서 강화도로 오는 길은 모두 합해 140리가 되는 것이다.

 썰물이 나서 바닷물이 물러난 자리에는 갯벌이 펼쳐집니다.
 썰물이 나서 바닷물이 물러난 자리에는 갯벌이 펼쳐집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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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거리는 걸어서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고, 급한 전갈이 있어 말을 타고 달린다면 몇 시간 안에 도착을 할 수 있는 거리다. 만약 가마를 타고 간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대개 가마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 탔을 테니 지나는 곳마다 수령이 나와서 맞이하고 또 배웅을 하는 의식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을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많았을 테니 오가는 절차가 오죽 요란했을까. 

실제로 외규장각에 모신 의궤들을 실은 가마가 강화로 올 때의 광경을 그린 기록을 보면 장대하기가 임금님 행차 못지 않았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외규장각 의궤는 임금이 보던 어람용(御覽用)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임금님 못지 않게 대접을 해야 했을 것이다. 길에는 황토를 뿌려 단장을 하고 의장을 갖춘 군사들이 호위를 한다. 악대는 음악을 연주하며 각 고을의 지방관들은 예를 갖추어 맞이하고 또 배웅을 하였다. 밤에 객사에 묵을 때는 가마를 중앙 마루에 모시고 최고의 예우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양을 출발하여 강화에 오기까지 1박2일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강화로 오는 길, 여유와 풍요의 길

그때 가마가 지나가던 그 길을 지금 우리가 달린다.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강화까지 오는 48번 국도는 65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이다.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길이 국도 중에 또 있을까. 아마도 48번 국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강화로 오는 길은 특별했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도 오래인데 65킬로미터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달리면 강화도는 금방이다. 김포시도 건너 뛰고 통진읍도 지나친다. 경계마다 멈춰 서서 다리쉼을 해야 했던 옛날과는 달리 지금의 자동차는 지칠 줄을 모른다. 어느새 눈앞에 강화대교가 보인다.

 강화나들길은 '쉼'을 줍니다.
 강화나들길은 '쉼'을 줍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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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탈관직하고 수레에 얹혀 유배를 가던 통한의 그 길은 이제 여유와 희망을 주는 길이 되었다. 강화에서는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쉴 수 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강화도로 들어오는 차들로 48번 국도는 분주하다.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량의 행렬은 끝이 없다. 임금님의 행차인들 저토록 대단할까. 그들 모두는 자기 삶의 주인이고 또 왕이다.
 
'강화나들길'을 찾아서 오는 사람들도 많다. 흙길을 걷노라면 복잡하던 세상사는 한참 뒤로 물러나 있다. 마치 어린애라도 된 양 자연과 함께 어울려 놀다보면 어느새 나도 자연이 되어 있다. 길을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대신 산새들이 노래를 불러주고 바람이 춤을 춘다. 호위를 해주는 군사는 없지만 대신 친구들이 옆에 있다. 임금님인들 이들보다 더 행복할까.

겨우내 얼었던 흙이 부풀어 오르고 바람결에 봄기운이 느껴지는 2월의 끝자락이다. 작은 산새들이 이쪽 저쪽으로 포르르 날아다니며 지저귄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봄이 묻어나는 듯하다. 강화나들길에는 벌써 봄이 왔다. 빨강에 노랑, 그리고 꽃분홍에 초록 등등, 길 위에 꽃이 피었다. 봄은 벌써 나들길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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