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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의 서문 끝자락에 실린 문장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위한 대한문 농성촌의 한 의자에 누군가 적어놓은 구절이라고 한다. 이 구절은, 황량한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우리들의 다리에서 희망을 찾는 저자의 다짐이자, 이 책 전체 내용을 꿰뚫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살아가겠다>는, 거리의 철학자가 쓴 '삶'에 관한 책이다. 책으로 엮였으니 '쓰인'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것들을 '글'이 아니라 '말'로 규정한다. 지난 몇 년간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 자신의 삶터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며 깨우쳤거나 주고받았던 이런저런 말들이 책의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저자가 말을 통해 주고받은 물음들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철학의 본질적 의미를 다루고 있는 1부 첫 장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플라톤을 중심으로 철학한다는 것의 의미와 정치와 삶의 연관성이 다뤄진다. 대학이란 무엇이고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살피는 저자에게,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읽었던 '사건'은 배움과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3부에서는 전태일과, 쌍용자동차 노동자 고동민, 밀양의 이계삼 등이 등장한다. '삶'과 '사건'으로 제목을 삼은 1·2부가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의 총론격에 해당한다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각자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3부는 각론이자, 총론의 살아 있는 '논거'쯤이 될 것이다.

저자가 그리고 강조하는 '삶'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을 서양철학사에서 '견유주의(犬儒主義)'의 스승으로 불리는 디오게네스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견유'는 '개 선비'나 '개 같은 선비'로 풀이된다. 저자는 퀴니코스학파('퀴니코스'는 '개'라는 말이다.)의 주창자인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다. 왜냐하면 내게 선물을 가져온 이에게는 사슴처럼 온순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무섭게 짖는다. 그리고 사악한 이들은 (아예) 물어뜯는다." 언젠가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대왕이 그를 붙잡아 물었을 때도 "누구냐"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네 탐욕의 정찰병(kataskopos)이다." (31, 32쪽)

저자에 따르면, 견유주의자는 아무런 보호(피난처, 집, 나라)도 없이 인류에 앞서 냄새를 맡고, 용기를 내서 그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한다. 저자는 디오게네스가 만물 속에는 만물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들어 삶과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리를 끄집어낸다. '평등'과 '연대'가 그것이다.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디오게네스의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법 이전에, 심지어는 법 없이도 모두 평등한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디오게네스에게 고향을 물었을 때, 자신은 '세계(우주)의 시민(코스모폴리탄)'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시사적이다.

저 머나먼 고대 시기에 세계 시민을 꿈꾸던 한 '개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편을 가르고, 스스로를 가두는 경계선 안쪽에만 머무른 채 협량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자칭 '세계 시민'들이 한 번쯤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진실을 알리는 '개'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리는 사나운 '개'가 되어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끌어다 놓은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하나 더 보자. 디오게네스에게는 '마네스'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노예가 도망을 갔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도망 노예'를 추적하자고 했다.

"마네스는 디오게네스 없이 살 수 있는데, 디오게네스는 마네스 없이 살 수 없다면 그건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노예는 주인이 없어도 살 수가 있어 도망쳤는데, 주인은 노예 없이 살 수 없다면 누가 더 강한 것인가. 여기에는 누구의 권력이 더 큰가와는 다른 물음, 즉 능력에 대한 물음이 들어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자율' 내지 '자기 통치'로서, 철학과 정치에 대한 사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3쪽)

노예 '마네스'에 얽힌 일화를 통해 저자는, 대중들 속에서 철학과 정치가 수렴되는 삶의 길을 구상한다. '선한 목자'로서의 '철학하는 왕'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철학하는 왕'이 되자는 것. 저자는 그 과정에서 평범한 대중이 굳어진 진리와 권력의 의미를 전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 나가면서 타인에 대한 돌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철학이 정치가 되어 나날의 삶을 규정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대학의 앎'과 삶의 구원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대학은 어떤 곳일까. 저자는 '지성의 전당?'에 '설마'라는 답을 내놓는다. '취업학원?'에는 넘치는 대졸 실업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르기만 하는 등록금 문제를 거론한다. 여기에 성과가 없으면 가격이 떨어져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당연한 반문이 덧붙여진다. 스타벅스에 던킨도너츠가 들어섰으니 별로 즐겁지도 않고 비싸기만 한 '테마마크'가 아니냐며 냉소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학의 시원이었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는 '앎을 매개로 한 삶의 공동체'였다. '파업'과 '철수'를 무기로 부르주아들에게 맞선 '조합'이기도 했다. 저자는 대학의 그런 뿌리를 말하면서, 자본의 위기보다 우리 자신의 삶의 위기에 주목하고, 어떤 앎이 돈이 좀 될지를 묻기 이전에 어떤 앎이 우리 삶에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주하는 자본에 질식당한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이 과연 꿈쩍하는 시늉이나 낼지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가능'과 '불가능', '대안' 등을 중심으로 민주주의가 갖는 새로운 무한정성을 탐색하고 있는 대목도 차분히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저자는 쌍용차와 용산, 두물머리, 강정, 밀양 등을 겪으면서 별 수가 없다, 이렇게 살 수가 없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등을 내뱉는 이들이 늘어났다고 말한다. 이 상황을 저자는 "수많은 이들이 삶의 불가능성에 직면했다"고 정리해 놓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중요한 물음이 떠오른다. 우리가 마주한 불가능은 삶의 불가능인가, 체제의 불가능인가. 어떠한 수도 없다면 이 체제 안에 해법이 없다는 뜻 아닌가. 이 체제의 거번먼트를 구성하는 이들이 더 이상 해법을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불가능성, 그들 거번먼트의 불가능성을 선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삶을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도 '삶'과 '체제'의 불가능을 둘러싼 독해의 역전이야말로 체제의 관리자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태가 될 것이다. (130, 131쪽)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벽처럼 마주하고 있는 '불가능'을 자각할 때에만 어떤 '가능'이 열린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책 없이' 뛰쳐나온 사람들, '대책이 없었기에' 뛰쳐나온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대안 없는 운동'이나 '현실적 대안이 없음'에 대한 저자의 사유도 살펴보자. 저자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이나 '운동의 대안으로서의 제도와 정책'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져 왔음을 지적한다. '대안 없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배경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좌우 엘리트들에 의해 구조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들 엘리트들의 권력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말이 득세하면서 점점 더 공고해져 가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지금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대안이 없으면 아예 말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계속해서 늦추는 것. 바로 이것들이 이 체제의 근간, 이 시대의 비전, 이 시대의 지배 정신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132, 133쪽)

저자가 보기에 이 시대는 '살아가는 일'과 '착취당하는 일'이 수렴해가는 사회, '살아가기'와 '투쟁하기'가 수렴해가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저자가 삶과 투쟁이 하나라는 것, 체제가 존속하는 한에서의 싸움이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배경이다.

저자는 2011년에 타올랐던 미국 월가의 점거운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일이었지 가능했기 때문에 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현재로서는 무망해 보이는 밀양의 송전탑 싸움 같은 일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떨까.

그 싸움의 과정에서, 저자가 소망하는 바, '마치 아무런 제약이 없는 듯 대담하게 실험하고 상상하는' 작은 해방구들이 만들어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불가능' 속에서 꿈꾸는 조그마한 '가능'과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삶을 만드는 데 귀한 밑절미가 되겠기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살아가겠다> (고병권 지음 | 삶창 | 2014. 1. 17. | 260쪽 | 14,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살아가겠다” -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고병권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14)


태그:#<살아가겠다>, #고병권, #삶창, #디오게네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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