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힘과 희망을 안겨 준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은 이름 없는 민중과 그들이 일궈왔던 지난날의 너절한 역사를 떠올린다. 그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고 말한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곰보'와 '애꾸', '무식쟁이' 등 이름 없이 살아가는 '무수한 반동'들을 나열한다. 이들이야말로 '썩어빠진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뿌리'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단 채 땅속으로는 사방으로 어지럽게 무수히 뻗어 있는 잔뿌리를 거느린 그 '거대한 뿌리'야말로 <거대한 뿌리>에서 느끼는 힘과 희망의 원천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았다. 엔딩 자막을 끝까지 앉아 보면서 문득 <거대한 뿌리>가 떠올랐다. '괴기영화의 맘모스' 같은 '거대한 뿌리'와 그 주인공인 이름 없는 '무수한 반동'이 찾아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을 무산시키려 했던 야만적인 자본의 공작에 맞서 제작두레에 참여해 결국 영화를 탄생시킨 평범한 시민들의 이름을 보면서 말이다.

'이건희'라는 아름다운(?!) 이름도 포함된 그 명단만 비추는데도 3분여의 시간이 걸렸다. '더러운 역사'와 '더러운 전통'과 '진창'을 말하면서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고 단언하던 김수영의 심정이 그랬을까. 엔딩 자막 3분 분량을 차지한 그들이야말로 <또 하나의 약속>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약속'일 것임에 틀림없다.

난데없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까지 끌어들여 호들갑스레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익히 아는 대로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와 그의 부친 황상기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영화다. 삼성이 어떤 회사인가. 국내 최대·최고 기업이자, 우리나라를 공공연히 '삼성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린 위력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런 곳의 치부를 정면에서 다루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있다. 방해 공작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 스산한 현실을 물리치고 영화를 탄생시킨 데 결정적인 힘을 보탠 이들이 바로 3분 동안 쉼없이 올라가던 제작두레 회원들이 아닐까.

삼성이 내세운 '또 하나의 가족', 그 의미는?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의 한 장면.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의 한 장면. ⓒ 또하나의가족제작위원회


삼성 입장에서 보자면, <또 하나의 약속>은 눈엣가시같은 영화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대표 슬로건 중 하나인 '또 하나의 가족'을 패러디한 제목 '또 하나의 약속'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영화의 원래 제목은 삼성 슬로건과 똑같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제목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삼성이 내세운 '또 하나의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관객들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영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 구실을 한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열쇳말이다. 백혈병으로 딸을 잃은 택시기사 '한상구'(박철민 분)와 또 다른 백혈병 피해자들은 극중 '진성전자'와 공공연한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업재해 판정을 받아내기 위해 가망없는 투쟁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진짜 가족 이상으로 진하고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들 사이에는 '돈'과 '계산'이 없다. 이는 500만 원에서 3억 원을 거쳐 10억 원으로 이어지는 내내 애오라지 '돈'만으로 '계산'하여 사태를 무마하려는 거대기업 '진성'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돈'이 없으면 안 되는 '먹고사니즘'을 인질 삼아 평범한 이들의 인간성을 짓밟고 인간 관계를 타락시키는 '진성'의 행태는 두렵기까지 하다.

'또 하나의 약속'의 또 다른 의미는 이와 다른 차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양식이나 태도에 관련된 것이다. 나는 최근 고병권의 <살아가겠다>(삶창)를 읽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에 관련된 수 편의 일화를 만났다. 그 중 한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다가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어느 해, 배를 타고 가던 디오게네스는 해적선을 만나 노예시장에 팔렸다. 얼마 뒤 친구들이 주인에게 그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때 그는 친구들을 '바보들'이라고 불렀다. 디오게네스는 노예가 되어 먹이를 얻어먹어야 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양'이 아니라 '사자'로 여겼다. 그는 친구들을 '바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사자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이들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먹이를 주는 자들이야말로 사자의 자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포란 노예의 표시이지만 야수는 사람들을 오히려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디오게네스의 일화에서 평범한 약자들이 정글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처세술'을 읽는다. 그것은 루쉰의 '아Q'가 써 먹은 '정신 승리법'의 21세기식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양떼' 속에 있다고 해서 순한 '양'으로만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신을 힘센 '사자'로 여기며 살자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말을 하고, 질문을 하며, 세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노력하는 이들을 권력은 결코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한상구'는 28년간 택시 일을 해 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승차 거부를 한 적이 없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진성'에 합격한 딸을 향해 노조 같은 데 들어가서 데모하지 말라며 당부하는 평범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신문에 나온 기사 내용은 모두 '사실'이자 '진실'로 믿었던, 체제와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건전하기만 한 시민이었다. 딸 '유미'가 몹쓸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한 마리 '순한 양'일 따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딸 문제를 함께 풀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노무사 '유난주'(김규리 분)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문득 멍게 이야기를 해 준다. 원래 멍게는 동물이어서 머리에 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로 가 한 곳에 붙박혀 편히 살게 되면서 식물이 돼 버렸단다. 뇌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멍게 이야기를 쓸쓸한 표정으로 전하는 '한상구'의 머리에 멍게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에게는 딸과의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멍게의 삶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꼴통'과 '또라이'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회사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몇 푼 돈을 건넬 때 제대로 대꾸 한 마디 하지 못했던 그는 직접 노무사를 찾아가고, 산업재해 심사와 관련된 행정 절차를 공부하며, 피켓을 목에 건 채 제보자를 찾는 '시위꾼'이 되었다.

그는 점점 늠름한 '사자'가 되어 갔다. 마지막 회유를 위해 10억 원을 갖고 내려온 '진성'의 인사팀 '이 실장'(김영재 분)에게 의연한 웃음을 띠며 소주를 권하는 '한상구'의 모습은, '양'의 삶을 벗어나 강력한 '사자'가 된 이들이 갖는 특유의 낙천과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우리의 먹고사니즘에 대해

이 스산한 시절에, 우리에게 멍게와 '양'의 삶을 강제하는 것은 예의 '먹고사니즘'이다. 이 세상에 '밥'을 떠나 살 수 있는 이는 없지 않은가. 구차한 '먹고사니즘'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그것은 끈질기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내부자 증언을 하려다 오히려 회사 측 증인으로 나선 '김종대'(김창회 분)가 보여 주었고, 남은 가족이 살아갈 나날을 염려해 '진성'에 입사하는, '유미'의 남동생 '한윤석'(유세형 분) 또한 그랬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사람은 '먹고사니즘'만으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다. '밥'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밥'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돼지'이지 '사람'이 아니다. 생존은 삶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은 밥 못지 않게 사랑과 연민, 인간적인 양심과 진실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거짓 증언을 한 '김종대' 대신 증언대에 오른 이는 '두렵다, 두렵다'를 외치던 '채도영'(정영기 분)이었다. 소심하기만 했던 그가 고뇌 끝에 증언대에 선 까닭이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어린 자식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외치던 그의 절규를 통해 사람이 가장 사람다워질 때가 언제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가족과 사랑, 양심 따위를 떠올릴 때였다. 바로 그런 순간이야말로 멍게의 삶을 사는 '양'이었던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자'가 되는 혁명의 시간이 아닐까.

삼성에는 별명이 많다. 얼핏 '일등 기업'이나 '국민 기업', '삼성 공화국' 따위의 말들이 떠오른다. 이들 모두 오늘날 삼성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 아니냐는 '이 실장'의 말은 결코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다. 오죽하면 벌써 십여 년 전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국민 기업'과 '삼성 공화국'의 주인공인 삼성그룹이 그에 걸맞게 실질적이고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 실장'이 말한 바 그대로 "대한민국이 누구 덕분에 이 정도로 먹고 사는지 아느냐"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는 않나. 대정부 로비와 반노동(자) 정책, 경영권 편법 승계 등의 문제는 삼성을, 나아가 대한민국을 언제 나락에 빠뜨릴지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약속>은 축소 배정 의혹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2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고 갔다고 한다. 감동적으로 영화를 본 이들이 표를 몇 장 구해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주며 보라거나, 시민단체나 이런저런 모임 등에서 상영관을 통째로 빌려 단체 관람하는 등 관객들의 적극적인 품팔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숫자일 것이다.

마침 다음달 6일에는 삼성 백혈병을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이 개봉하게 됐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3월 6일은 <또 하나의 약속>의 실화 주인공인 고 황유미씨의 기일이라고 한다. 이들 두 편의 영화가, 꽃다운 20대 나이에 이승을 하직한 고 황유미 씨에게 따뜻한 진혼곡이 되기를 빈다.

더 이상 삼성이, 그리고 대한민국이 '폭탄'을 안은 채 위험하게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길을 만들어가는 데 이들 영화들이 좀 더 많은 구실을 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또 하나의 가족> 김태윤 감독 <거대한 뿌리> 삼성 디오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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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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