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월 초였다. 친구와 술을 마셨다. 제주도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제주도에 가자는 거였다. 나는 돈이 없다고 했다. 친구는 회비는 우선 내줄 테니 나중에 갚으라고 했다. 친구는 술집 사장이다. 그래서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에 니콘D40을 판다는 글을 올렸다. 중고 최저가가 18만 원이었다. 그래서 18만 원에 올렸다. 카메라는 판매글을 올린 지 2일 만에  팔렸다. 다행이 나는 여행 출발 전에 빚을 갚았다.

제주도에 간다고 하니. 다른 일행들은 맛집 기행을 계획한다 했다. 제주도에는 사람들의 후각과 미각, 씹는 감을 자극하는 많은 음식들이 있지 않는가. 다행이 나는 코와 혀와 입술에 놓인 세포들이 정교하지 못하다. 게다가 이를 잘 안 닦았더니 요새는 이 건강도 안 좋다.

제주도에 갈 기회가 인생에 있어 몇 번이나 있을까. 내 딴에 좀 더 의미 있어 보이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머릿속엔 '4·3'이란 글자가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좀 더 뚜렷하게 떠오른 것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었다. 대학생 때, 문학 관련 교양 수업 시간에 읽은 적이 있는 소설이다.

도서관에 가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빌렸다. 책은 깨끗했다. 책 표지에는 옅은 주름도 없었고, 책배에는 조그마한 손때도 없었다. 설마 이 책을 아무도 안 읽었을까? 책 맨 뒷면을 보니 2011년 6월에 나온 개정판이다. 짐작컨대, 적어도 2년 반 동안 사람들 손을 거의 타지 않은 건 확실하다.

장편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단편이었다. 지금 시중에 있는 <순이삼촌>이란 제목이 박힌 책은 현기영 선생이 1970년대 후반 내놓은 중·단편들을 묶은 책이다. 10편의 소설 가운데, <순이삼촌>을 비롯한 5편은 제주 4·3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소설집 한권은 후딱 읽혔다. 제주4·3사건과 관련이 있는 소설들은 '학살', '학살에 따른 집단과 개인의 후유증'을 다루고 있었다. 학살. 뇌 표면이 찌릿찌릿 울렸다. 답은 나왔다.

'4·3 유적지를 한 번 돌아봐야겠다.'

문제는, 내 탐사를 위해서 일행들의 일정을 바꿀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렌트카도 숙소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요일(1월 19일) 오후 두 시 제주 도착, 화요(1월 21일)일 오후 두시 제주 출발. 2박3일의 짧은 일정에서 둘째 날 하루를 나의 탐방에 쓰기로 했다.

제주 4·3 사건이란 뭘까?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현기영 <순이 삼촌> 중

<순이삼촌>의 모티프는 1949년 1월에 발생한 북촌리 사건이다. 아무 죄 없는 400여 명의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무고하게 학살 당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4·3 전체를 그렸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 학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죄인 취급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이삼촌처럼 오래도록 남은 제주 사람들의 트라우마.

4·3은 여러 해 동안, 이집 저집에서 사람들이 죽어간 사건이었다. 제주도에 있는 수 많은 마을과 경찰서에서 학살이 발생했고,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인 약 3만명(물론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김창후 제주4·3연구소 소장은  3만이 희생자 총 수에 가장 근접하다고 말했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최대한 간략하고 객관적으로 말하기 위해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에서 200년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 >의 결론 부분을 인용한다.

따라서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보고서 546

딱 한 곳. 어디를 가야 할까?

나는 4·3 유적지 가운데 한 군데 내지 두 군데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주도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일은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선 한 곳을 돌아보고 시간이 남으면 또 한 곳을 가보는 식으로 계획을 짰다.

여러 곳을 갈 수 없는 상황. 4·3유적지 여러 곳 중에 우선순위를 꼽아야 했다. 어려웠다. 그리고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4·3사건에 관련된 모든 유적지 모든 곳에는 넘칠 정도의 아픔이 스미어 있을 것이다. 우선순위라, 개인적이긴 기준을 세워 무엇은 더 중요하고 무엇은 덜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줄을 세우는 것은 안될 일.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리 마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너븐숭이 4.3기념관'도 있어서 일정에 제약이 있는 여행객으로서는 가볼 만한 곳이었다. 또 하나는 백조일손지묘였다. 백명의 조상, 한명의 손자. 60여년 전 제주도는 이집 저집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곳이다. 모슬포 섯알오름(제주 사람들은 이를 [서딸오름]으로 발음했다)에는 학살당한 시신들이 한 데 뒤엉켜 있었고, 수습은 6년 만에 이뤄졌다. 그들이 공동 후손들이 묘를 세운 곳이다. 학살당한 공동 조상과 공동 후손. 이곳도 4·3 사건의 전체를 간략하게 상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백조일손지묘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일부이기도 하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빨갱이 불러내기를 위해, 이미 죽은 이들을 또 학살한 곳.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겠다. 죄송함을 무릅쓰고 나는 백조일손지묘를 택했다.

백조일손지묘 가는 길

우리 일행이 잠을 잔 곳은 성산 일출봉에서 남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신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나 홀로 아침 여덟시 그곳을 나와 근처에 있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동일주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서일주버스로 갈아탔다. 모슬포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조금 못되어서였다. 얼추 세 시간이 걸렸다. 네이버지도에는 섯알오름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나와 있었다. 지도 상으로 섯알오름과 백조일손지묘는 가까이 있어서 나는 그 버스를 타면 백조일손지묘에 쉽게 닿을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했다. 나중에 직접 걸어보고서야 그 지도가 서울에서나 믿을 만한 것임을 깨우쳤다.

길을 지나는 할머니에게 가는 길을 물었다. 할머니는 제주도 사투리로 멀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알아들은 것은 'ㅁ'발음뿐이었지만, 할머니의 표정, 손짓과 결합한 'ㅁ'은 충분히 멀다는 뜻을 안고 있었다. 20분쯤 헤매다가 백조일손지묘 방향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다. 하루에 7대, 다음 버스는 약 두 시간 뒤에 있었다. 걸었다. 조금 걷자 백조일손지묘와 섯알오름으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나왔다. 백조일손지묘까지는 3.1km였다. 걸음을 서둘렀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백조일손지묘'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나온다. 개인적으로도 백조일손지묘가 꽤 중요한 4·3 유적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백조일손지묘로 가는 길 군데 군데 서 있는 표지판들은 지금 그러한 유적지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제주도에 있는 일반적인 관광지를 표시한 표지판에 비하면 그 표지판은 초라했다. 이도식 백조일손 유족회 회장은 "돈은 도에서 줬고, 우리가 직접 만들어서 세웠죠."라며 이정표에 대해서 말했다. 표지판 가운데서는 쓰러지다시피 기울어진 것도 있어서 괜히 내가 미안했다.

표지판 4.3 유적지의 표지판은 일반적인 관광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에 비해 초라했다.
▲ 표지판 4.3 유적지의 표지판은 일반적인 관광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에 비해 초라했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인지 처음 만난 표지판에서 백조일손지묘까지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다행이 허기는 밀려오지 않았다. 낡은 아스팔트 길과 밭 사이로 난 좁은 콘크리트 길. 배수로를 파묻는 공사가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백조일손지묘로 접어드는 좁은 길에서는 포클레인 한 대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어서 조금 지체하기도 했다. 어차피 차를 가지고 오지도 못했겠지만, 차를 가지고 왔다면 더 낭패였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4·3유적지 다니기는 정말 힘들어요. 웬만한 4·3 유적지 빼곤 많이 알려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가는 길이 별로 좋지 않아요. 아쉬운 게, 제주도하면 자연관광, 문화관광, 다크투어리즘을 한데 묶어서 관광자원화할 수 있는 건데, 아직도 어려운 게 사실이예요. '관'에서 그런 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또 제주도에 살면서 관광버스 운전하는 사람들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단체 관광 오고 그러면 4·3유적지 같은 거 끼어 넣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죠."

나중에 들은 김창후 소장의 말이다.

지방 공공연구기관인 제주발전연구원은 작년 말, 간이 보고서 형태인 <JDI 포커스 183호>에서 제주지역 '다크투어리즘' 현황과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 크게 '전쟁지역 산물'과 '홀로코스트 유형'으로 나누어 여행지 조성 방안을 내놓았다. 제주 4.3유적지의 경우는 후자다. 보고서는 (제주 4.3사건의 시발점, 1947년 3월 1일 집회가 열렸던) 관덕정 앞 광장 등 17곳을 여행지로 추가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북촌 너븐숭이'와 '섯알오름 학살터'는 이미 역사교훈 장소로 조성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물론 그런 교훈장소에 쉽게 닿기란 개인 여행객 입장에선 좀 어려운 일이었다. 제주도청 관광정책담당 오정훈 과장은 이러한 다크투어리즘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히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길을 걷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만난 건 바람이었다. 사방에서 제 방향을 수시로 바꾸며 부는 제주 바람. 그 바람 탓에 내 머리카락들은 어수선하게 헝클어졌다. 백조일손지묘 위에도 바람이 불고 있다. 돌담을 둘레로 한 공간에 묘비도 없이, 백 수십 개의 둔덕들이 빼곡하게 붙어 얕게 솟아 있었다. 그래도 벌초가 잘 돼 있어서 묘들의 머리 모양은 나와 다르게 깔끔했다.

백조일손지묘 전(前)경 현재 위령비 옆에는 과거 위령비의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 있다.
▲ 백조일손지묘 전(前)경 현재 위령비 옆에는 과거 위령비의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 있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백조일손지묘 입구에 선 표지판들은 방문객들을 향해 '기억'을 다짐하고 있었다. '오래 기억하고자 하오니'라고 적힌 팻말 아래에는 방명록 조로 적은 쪽지를 넣을 수 있는 함이 있었다. 그 함에서 빼놓은 쪽지들을 게시해 놓은 표지판에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거기엔 2002년에 수거한 쪽지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기억하겠습니다. 기억을 해야할 주체는 우리가 아닐까. 위 사진은 방문객 쪽지함. 아래 사진은 그 쪽지들을 게재해 놓은 게시판.
▲ 기억하겠습니다. 기억을 해야할 주체는 우리가 아닐까. 위 사진은 방문객 쪽지함. 아래 사진은 그 쪽지들을 게재해 놓은 게시판.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역사의 피해자들이 안장된 묘역에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 인사가 '나는 너를 기억하겠다'였다. 역사가 일궈낸 가혹한 인지부조화, 순이삼촌이 겪던 정신의 부조화. 그 잔해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빨갱이로 몰아야 했던 유무형의 억압 속에서 그들은 이러한 참혹한 역사를 '기억해달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아주 조심스레, 그리고 너무나도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묘들을 둘러보며, 누구 하나 만나면 이야기라도 좀 들으려 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길에도 차들은 도로 위를 드문드문 지날 뿐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길에서 공사를 하는 사람들 외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학살

제주4·3사건은 1949년 3월을 기점으로, <보고서>의 표현대로, '평정기'에 들어선다. 1949년 5월 10일 치러진 북제주군 재선거에서는, 전년에 갑구와 을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각각 97%, 9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민심이 국가의  강압에 따라 충분히 바뀐 것이다. 6월에는 무장대 총책으로 지목됐던 이덕구가 사살된다. 그리고 이미 두 달 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1949년 3월 창설. 군·경찰·민보단으로 구성된 토벌대, 사령관 유재흥 대령) 보도대장 이창정 소령은 "4월 21일 드디어 남로당 당수인 김용관을 사살했다. 이로써 소탕전은 완전히 종결되었다."라고 말했다.

이미 학살은 충분히 진행되었지만, 그리고 무장대도 잡을 만큼 잡았지만, 학살은 멈추지 않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다시 계엄령이 발동된다. 제주도 경찰들은 전해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과 요시찰인, 불순부자들을 중앙의 명령에 따라 매우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잡아 들인다.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 폐지된 일제의 악법, '예비검속'을 활용한 것이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의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속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원할하게 하게 위해 반일인사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예비검속을 활용했다.

좌익단체 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입산 경력이 전무한 사람도 예비검속의 대상자였다. '요시찰인' '불순분자'를 잡아들이는 예비검속으로 수 천명이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 약 3000여명(예비검속 전에 수감된 사람도 포함)이 수감됐고, 학살당했다. 대부분 배 위에서 총살된 후 바다에 수장되었다.

"수장된 시체들은 거의 못 찾았지요. 증거를 안 남기려고 그렇게 했던 건데, 증거가 쉽게 안 사라지는 법이요. 수 십 년이 지난 뒤에 대마도에서 시체가 떠오르곤 하니까. 거 때문에 대마도도 여러 번 갔지요. 육지에 묻은 시체도 아직 발굴이 못한 게 많아요."

김창후 소장의 말이다.

1950년 음력 7월 7석날(양력 8월 22일). 새벽 두시엔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새벽 다섯시엔 모슬포 절간고구마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 일제 탄약고가 있던 섯알오름 굴로 끌려가 학살된다. 모두 예비검속으로 붙잡힌 이들이었다. 1956년까지 두 군데에 시체들이 뒤엉켜 있었다. 오름 정상에는 물이 차 있었다고 한다. 시체들은 이미 누가 누군지 모르게 부패했고, 작은 뼈들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변색된 옷가지, 금니 등을 토대로 후손들은 조상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한림 출신 희생자들은 '만뱅디'라는 곳에 있는 공동 장지에 묻히고,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수감 희생자들은 안덕면 사계리에 공동장지를 마련한다. 후자를 일컬어 '백조일손지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이다. 묘를 가리켜서는 '백조일손지묘'라 한다. 1956년 묘들이 자리를 잡았고, 1959년에는 위령비도 건립된다.

5·16 쿠데타 세력의 만행

깨어진 비석 조각 5.16 쿠데타 세력은,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를 탄압했다.
▲ 깨어진 비석 조각 5.16 쿠데타 세력은,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를 탄압했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유족들은 거부했다. 군정과 경찰 당국은 어렵게 세운 백조일손지지 묘역에 세워진 묘비를 철거라하고 명령했다. 무서운 시절이 다시 왔지만, 유족들은 용기를 내어 항의했다. 하지만 1961년 6월 15일 서귀포경찰서장 지휘 하에서 묘비는 결국 파괴됐다. 이곳은 4.3을 겪은 곳이다. 학살의 기억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겁에 질린 일부 유족들은 묘의 주인 구분이 불확실한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야밤에 묘지를 파헤쳤다. 2~3개월 사이에 23위(공간상으로는 24위라고 한다)가 이장됐다.(그 중에 7위는 2002년에 다시 이장해 온다. )

백조일손지묘 묘지 중간에 평평하게 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군사정권시절 두려움에 떨던 유족들이 조상의 묘를 이장해갔다.  총 23기의 묘가 야밤에 이장되었다고 한다.
▲ 백조일손지묘 묘지 중간에 평평하게 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군사정권시절 두려움에 떨던 유족들이 조상의 묘를 이장해갔다. 총 23기의 묘가 야밤에 이장되었다고 한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관할 경찰서는 유족들의 집단적 묘역 참배를 불순한 모임으로 간주했다. 모임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고, 참배일(음력 7월 7석 날)이 다가오면 유족들의 동태를 파악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유족들은 참배했다. 새벽에 개인적으로 오거나, 아침에 온 이들은 서둘러 예를 지내고 도망치듯 묘역을 벗어났다. 오래도록 그랬다. 1977년에는 유족회를 만들려고 했다가 당국의 저지로 실패했다.

비슷한 사건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4·19이후 위령비도 세우고, 합동제도 지냈던 내륙에 있던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유족들 역시 비슷한 일을 겪는다.

"쿠데타 일어난 다음에 여기저기서 많이 잡혀갔죠. (보도연맹학살) 유족회 활동 한다는 게 이유예요. 영남 지방에서는 유족회 회장이 고문 받다가 죽기도 했죠. 당연히 백조일손지묘 유족 쪽에서는 뭐라고 한마디도 못하죠. 무서운 세상이 또 온 거죠."

김창후 소장의 말이다.

이러한 유족 탄압에 대해,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프레시안과 했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6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16쿠데타를 한 이유와 관련해) 나중에는 경제 발전이나 근대화를 많이 역설하고 내걸지만, 5.16을 일으켰을 때 '혁명 공약' 첫 번째가 반공 태세를 재정비해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 굳건한 반공 체제가 어떻게 성립됐나. 학살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극우 반공 세력의 도덕성에 대해,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해 근간부터 회의를 품게 하고 비판하게 하는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학살 문제다. 극우 반공 세력을 그렇게 몰아세울 수 있다는 건 (학살 문제가) 극우 반공 체제를 그야말로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제2의 학살로 불리는 일들을 한 것 아니겠나."

학살을 벌인 자들에게 유족들은 당연히 사건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쿠데타 군부는 어떻게는 반공을 더욱 강하게 내세워야 했다. 그렇기에 유족인 것도, 위령비 자체도 죄가 되고만 세상이 온 것이다.

강요된 침묵

백조일손지묘에서 섯알오름으로 가는 길은 멀고 복잡했다. 스마트폰 지도로 보기에는 그리 멀어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걸어보니 거리가 꽤 됐다. 섯알오름의 두 개의 구덩이 60여년 전 어느 새벽, 2시와 5시, 세 시간 간격으로 사람들이 총살 당했던 곳이다.

섯알오름 학살터 가까이 있는 구덩이가 현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유해들이 발굴된 곳이고, 멀리 있는 구덩이는 만뱅듸에 묻힌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 섯알오름 학살터 가까이 있는 구덩이가 현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유해들이 발굴된 곳이고, 멀리 있는 구덩이는 만뱅듸에 묻힌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모슬포 우체국 앞으로 가는 길.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헤맸다. 바람만이 넓은 들에다 대고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저 동쪽으로 왕조의 봉분 같이 생긴 것들이 퍼져 있었다. 일제 말기, 가미가제용 전투기가 들었던 격납고라고 다. 제주시에 가서 김창후 제주 4·3연구소 소장을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은 벌써 두 시가 가까워 있었다. 버스는 제주시와 한라산 남서쪽을 잇는 평화로 위를 달렸다. 버스 안에서 느끼는 바람은 한층 거셌다.

학살과 그것에 대한 은폐. 기억조차 침묵하도록 만든 학살의 역사는, 1987년을 기점으로 그 조사가 시작된다. 그전에는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서 맹목적인 침묵을 강요 받았다. 제주도에서는 4·3에 대해서 무엇도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조일손지묘의 유족들이 겪었던 강요된 침묵은 제주 전체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말도 못해요. 이번에 (4·3)평화재단 이사장 되신 이문교라는 분이 있어요. 4·19 당시 제주대 학생이었거든요. 조사해보려고 학생들끼리 조사회를 꾸리고, 마을 몇 군데 다녔어요. 실제로 조사가 많이 나가지는 못했어요. 근데도 쿠데타 일어나자마자 구속 됏죠. 근데 이런 탄압이 계속 되는 거예요. 현기영 선생도 1978년에 '순이삼촌' 발표하잖아요. 바로 잡혀 들어 가서 한 달은 매 맞았죠. 그분은 지금도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이런 사례들은 끝도 없죠."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한 이유는 군사정권의 등장이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물론, 제주4.3사건. 모두 4.19를 기점으로 재조사가 이뤄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60년 6월 허정 과도정부는 제35회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진상조사>에 대해 논의했다. 백조일손의 경우에는 '보상안'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모든 논의에 입을 다물게 했다.

온전한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60여년 전의 참극은 '빨갱이'들의 반란, 이에 따른 국가의 정당한 진압으로 인식된다. 국가가 저지른 만행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 발행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4·3사건의 시발점이었던 3·1절 기념대회를 '남로당 제주 도위원회가 조직 총동원령을 내려, 정권을 인민 위원회로 넘기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는 식으로 당시 제주 도민의 생존권 문제나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대한 도민들의 반발감 등, 역사적 배경을 다루지 않았다. 피해를 서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당시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가 살해당하였다.'는 식으로 엄청났던 민간인의 피해를 경찰과 우익 인사가 당한 피해와 비슷한 것처럼 편파적으로 묘사했다. 또 얼마 전에는 안병직, 지만원 등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세미나를 열고, 제주 4·3 국가추념일 지정 입법예고에 대해 성토하기도 했다.

김창후 제주 4.3연구소 소장 김창후 소장이 책꽂이에 걸려 있는 4.3유적지도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백조일손지묘가 있는 지역이다.
▲ 김창후 제주 4.3연구소 소장 김창후 소장이 책꽂이에 걸려 있는 4.3유적지도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백조일손지묘가 있는 지역이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남로당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주도 사람들은 무장대랑 토벌대 쌍방에서 당한 거예요. 남로당 문제가 분명 있었지만, 그건 전체에서 아주 지엽적인 문제예요. 그걸 가지고 여전히 4·3에다가 색깔을 입히려고 하는 게 문제죠.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되는 건데. 참."

지난 16일 안전행정부는 '제주4.3 국가추념일'지정을 위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개정안을 17일자로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 제주 시청 민원실 부근에,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 제주 시청 민원실 부근에, '제주4.3희생자 국가추념일 지정'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이홍찬

관련사진보기


"당연히 좋은 일이죠. 아무래도 유족들 배상을 비롯한 여러 현안들이 더 잘 해결될 것이고. 그런데 아직도 문제가 많아요."

작년 제주에서는 '제주 4.3 정립 연구·유족회'라고 하는 단체가 창립됐다. 보수 성격의 단체다. 이 단체는 뉴라이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 때 발간된 제주4·3사건 보고서를 왜곡 되었다고 말하고, 이번에 예정된 국가추념일 지정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현대사가 정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죠. 너무 많은 이해관계들이 걸려 있으니까. 그래도 상생해보려고 서로 노력은 하고 있어요. 작년 말(12월 27일)에는 제주도 (재향) 경우회랑 (제주4·3희생자)유족회가 함께 당시 충혼묘지(4.3 당시 토벌대 임무에 투입되었다가 사망한 경찰들이 묻혀 있는 곳)와 평화재단을 참배했어요."

지방 선거를 앞두고

김창후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대, 새누리당 제주도당 김방훈 부위원장이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와 함께 연구소 사무실로 들어 왔다. 나와의 대화는 잠시 멈췄다. 둘은 제주도 사투리로 대화를 나눴다. 경우회 쪽과 유족회 간의 상생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사진을 찍었다.

"제주도에서 무슨 선거든지, 4·3문제는 늘 주요 의제에 들어요. 보통은 10대 의제에 꼭 들어가고, 어쩔 때는 5대 의제에 들어가요. 4·3 피해자, 유족이 여전히 많고, 그건 표랑 직결이 되니까. 무슨 당이냐를 떠나서 더 나은 해결이 되면 좋은 거죠.

그러고 보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할머니들 모시고 경찰서나 시청 앞에 가서 집회하자고 하면, 선 자리에서 발을 못 뗐는데. 이제는 당당하죠. 일부 인사들이 4·3사건을 자꾸 왜곡하고 폄하하려고 하는데, 우리끼리 하는 말로,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요. 이만큼 온 거 전진은 못해도 후퇴는 없다는 거죠."

김창후 소장은 '공부'를 당부했다.

"공부를 해야 되요. 역사에 대해서는 다들 공부를 해야 돼요. 특히 4·3같은 경우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모든 면을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서 꼭 이거 <보고서>라도 읽어봐요."

1시간 반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려는 나에게 소장님은 소책자 다섯 권을 챙겨줬다. 시간은 저녁 여섯 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구소가 있는 제주 시청부근에서 북촌리 마을까지는 시내버스를 타면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제주시 근처라고 했다. 어디서 나를 태워가야 할지 말을 나눴다. 해는 슬슬 저물었다.

덧붙이는 글 | <하루뉴스>에 중복 게재됩니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