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벌써 출발한 거야? 금방 도착하는데···."

막내누나 목소리에서 타박이 묻어났다. 서운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처가 식구들 다 모여 세배한다고 하네. 어떻게 하지?"
"어디쯤이야? 다시 차 돌리면 안 돼?"

차를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어설프게 애교를 부렸다.

"정 여사님, 다음에는 시간 넉넉히 잡을게요. 이번만 용서해 줘용."
"알았어. 할 수 없지 뭐. 그럼 다음에 보자."

전화를 끊으면서도 막내누나는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나저나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쩔쩔매야 하나. 그렇게 한숨을 쉬는 순간 또다시 전화 소리가 울렸다. 셋째누나였다.

"어디야?"

조금 전과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그렇게 가 버리면 앞으로 우리도 일찍 나설 필요 없겠네. 자형도 함께 가는데, 집에 얘기 나눌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냉소하듯 내뱉는 말투로 들렸다. 셋째누나는 여장부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결코 속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모두 쏟아냈다. 살짝 풀어지고 있던 마음이 다시 굳어졌다. 어느 해 추석 때 일이었다. 9년 전쯤이나 될까. 결혼하고 처음 맞은 추석 명절 때가 아니었나 싶다.

명절을 며칠 앞둔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식구들>의 한 장면.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식구들>의 한 장면.
ⓒ KBS

관련사진보기


지금 어머니께서는 막내누나 집에서 지내신다. 명절이라고 때를 맞춰 고향 시골 마을에 간다며 부산을 떨 필요가 없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부모님께서는 모두 고향 집을 지키며 살고 계셨다.

나는 세 아들 중 둘째다. 큰아들은 아니지만, 명색이 아들이니 적어도 명절 전날에는 본가에 내려가는 걸 당연하다 여겼다. 며느리가, 늦어도 명절 전날에 시댁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명절 연휴를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따로 고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뒤부터 그것은 무척 중요하고 꼭 필요한 고민거리였다. 그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의 추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내일 일찍 내려갈 수 있지?"

아내에게 물었다. 사실은 몰라서 묻거나 의견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을 받자는 질문이었다.

"근무 때문에 안 돼요. 오후 늦게나 출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근무 시간을 조정해 놓았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명절 즈음에 어느 누가 근무 시간을 바꿔 주겠는가.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는 명절 전날은 집에 가야 한다는 제딴의 '원칙'만이 떠올랐다.

"어머니 명절 준비하시고 그러려면 일찍 가야 할 텐데. 노인네가 몸도 불편하신데 어떻게 하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내뱉고 나니, 순간 내 말이 아내에게 기분 나쁘게 들렸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당신은 당신 어머니 명절 준비하는 것만 걱정해요?"

아내가 뱉은 그 말에, '장모님은 내가 온몸으로 걱정하지' 하고 웃으며 넘겼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당신 어머니'라는 표현이 없었다면 말이다. '당신 어머니라니?'라는 내 반문에서 시작된 그날의 부부 싸움은 제법 치열(?)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더 사시겠냐, 당신들 뜻과 바람대로 하면 안 되겠냐' 하는 게 내 주된 논리였다. 아내는 '다른 형제들은 안 그러는데 왜 당신만 유별나게 그러느냐, 우리집은 집이 아니냐' 등을 내세웠다.

신혼 초에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어지간하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집을 나와 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민감하기 짝이 없는 양쪽 집안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거의 막바지까지 입씨름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신혼 초에 밀리면 계속 밀린다는 결혼 선배들의 조언(?)도 살짝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부부싸움 끝에 간 고향, 아내 눈에선 레이저가...

그런 부부싸움 끝에 고향 집에 갔다. 4 대 6 정도로 판정패를 당했다고 자평(?)해서였을까. 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기분이 여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 눈치 때문에 그런 내색을 하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말하고 웃어야 하는 일이 곤욕스러웠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에게는 어려운 시댁이었다. 더군다나 신혼 무렵의 신부 아닌가. 아내는 기분 안 좋은 것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팔을 걷어붙인 채 '어머님, 어머님' 해 가며 척척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살벌하다는 지금 이 나라 대통령도 '앗 무서워' 할 강력한 레이저 광선을 내쏘았다.

그해 추석은 우리 집 세 식구(둘째와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만이 부모님과 함께했다. 장사를 하는 형님네는 명절이 최대 대목이었다. 일손 때문에 늘 명절 다음날에서야 집에 왔다. 평일 중간에 쉬고 명절이나 휴일에도 근무하는 직장을 다니는 남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한 네 누나들 중 서울에 사는 첫째와 둘째누나는 못 내려올 때가 당연히 많았다. 오더라도 추석 다음 날이나 연휴 마지막 날에나 올까. 그마저도 내 기억으로는 손꼽을 정도였다.

셋째와 막내누나는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추석 당일에 시골로 올 때가 종종 있었다.

"네 색시 꼭 붙들고 있어. 얼굴 본 지 오래됐으니까."
"똥순이(큰딸 별명) 아빠야, 내일 갈 테니까 가지 말고 있어라. 맥주 한 잔 해야지."

추석 전날 밤에 두 누나가 전화했다.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아내가 한 말 때문이었다.

"내일 점심 먹고 광주 가게요."

강력한 레이저 광선이 쏟아져 나오는 눈빛이 여전했다. 표정 또한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말도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투였다. 하지만 부모님 계신 데서 또다시 큰소리를 내기는 힘들었다. 가타부타 답하지 않는 것으로 껄끄러운 마음을 대신했다.

다음 날, 차례상을 물리고 성묘를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아내와 똥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작은아버지 댁에 갔다고 한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께서 낙향해서 고향 마을에 살고 계셨다. 날 빼고 간 게 살짝 서운했지만, 척척 알아서 집안 어른 인사 드리러 간 게 고마웠다.

점심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말없이 점심상을 차렸다. 동병상련이라고 '시월드'(시댁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는 동류의식(?) 때문이었을까. 명절을 쇠러 온 사촌형님 형수들과 얘기를 하고 와서 그랬는지 아내는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문득 아내가 사랑스러웠다. 미안하고, 한편으로 고마웠다. 정신 없이 3교대 하는 직장 다니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벅차고 힘드랴. 거기에다 명절이면 큰며느리도 아니면서 큰며느리 노릇을 해야 한다. 손아랫동서라도 있으면 서로 의지가지해가며 위안을 삼으련만 그러지도 못한다. 억울(?)할 노릇이다. 남편까지 고지식하다. 촌스러워서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도 못한다. 서럽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

"셋째형님이 그동안 제가 미웠대요"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식구들>의 한 장면
 KBS 주말드라마 <왕가네식구들>의 한 장면
ⓒ KBS

관련사진보기


그날 오후, 마당에서 아장거리며 놀고 있던 똥순이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똥순아, 광주 외할머니한테 가자."

아내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다. 부모님께는 이미 넌지시 말씀을 드려 놓았다. 처가에선 식구들이 모두 모여야 차례를 지낸다는 말로 둘러댔다. 아내를 살짝 보니 '벌써 가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형님들 오신다고 했는데, 그냥 가도 돼요?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아내가 한 마디 내놓았다.

"얼굴만 보고 길 나서는데 무슨. 그냥 가게."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가 가고 나면 부모님께서는 두 누나네가 도착하기까지 홀로 계셔야 했다.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얼굴도 안 보고 가냐며 타박할 두 누나와 자형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도 힘들었다.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은 여전했지만, 처가 가는 길 내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추석을 쇠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이었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아내가 울먹이는 말로 통화하는 소리가 안방에서 들려왔다. 살짝 귀를 기울여 보니 셋째누나와 나누는 통화였다. '네네' 하는 대답 사이로 '울웃음'(?)이 나온는 것으로 보아 '병 주고 약 주는' 시누이 잔소리 듣는 게 분명했다.

"셋째형님이 그동안 제가 미웠대요."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뜬금없이 말했다.

"당신이 왜 미워. 얼굴 예쁘고 착한 데다 어른들에게도 잘 하잖아."
"그냥 미우니까 미운 거였겠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시월드'니 '처월드'니 하는 말이 유행하고 있나 보다. 몇 년간 '시월드' 천지였다가 지금은 '처월드'(처가를 속되게 이르는 말)가 대세라고 한다. 처월드가 대세라니 세상 물정 한쪽만 보는 반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본가에서든 처가에서든 항상 두 다리 뻗고 지내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시월드든 처월드든 남편이나 아내에게는 모두 '새집'이다. '새집'을 맞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로 모두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편함을 불편함으로만 여기면 마음도 그대로 따라간다. '내 집, 네 집' 하면서 편을 가르듯 따지는 일도 한두 번이지 결코 옳은 일은 아니다. 아내가 셋째누나로부터 들은 '훈계'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으리라.

아직 난 철없는 남편이고 사위인가 보다

아버지께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께서는 누나네에서 지내신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마음의 실랑이를 벌일 일이 없다. 누나네는 내가 사는 집과도 가까워 평소 주말에 자주 찾는다. 명절이라고 조바심을 내며 언제 가니 마니 하며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편함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솔직히 언젠가는 아내에게 명절날 광주에 가고 시골에는 명절 오후나 그다음 날 가자고 말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 내게는 명절날을 기준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내느냐가 무척 중요했던 일이었던 것 같다.

여전히 가슴 한켠에는 명절을 '내 집'에서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다. 명절에 똑같이 두 다리를 뻗으며 지내더라도, 본가에서는 눈치 볼 일이 없지만 처가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게 힘든 일이냐며 분개하는 세상의 '아내'들에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두 사위를 맞으시는 장인 장모님께서도 내 말을 들으시면 여간 서운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 나는 참 철없는 남편이고 사위인가 보다.


태그:#명절, #불편함, #처월드, #시월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