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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 강사가 겪은 실제 이야기다. 집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로 발신자 제한 번호 전화(전화를 건 사람의 전화번호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걸려왔다. 무심결에 전화를 받은 그는 심장이 멈추는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납치했다는 전화였다. 납치범은 아들을 바꿔주며 비명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돈이 필요하고 당신은 아들이 필요하다. 내가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들을 찾고자하는 당신이 내게 돈을 부쳐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당신 아들의 장기를 하나씩 파는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아들의 비명소리까지 들은 그녀는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 납치범이 요구한 돈의 액수는 고작 500만 원이었다. 요구하는 액수가 적어 잠깐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황해'라는 조선족 보이스 피싱 코너가 한창 인기를 끌던 당시에 지인이 경험했던 일이다. 다행히 아들은 납치되지 않았고, 돈을 부쳐준 뒤 멀쩡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끔찍한 보이스 피싱 경험은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어이없게 당했다는 자책감까지 더해져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지난해 8개월간 사기피해 금액만 439억 원에 달해

신용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인해 고객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수십 명의 고객들이 카드를 재발급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로 붐비는 은행창구 신용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인해 고객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수십 명의 고객들이 카드를 재발급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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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가 무심하게 수집되고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렇게 끔찍한 경험의 가능성이 우리 모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지난해 10월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제출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1월부터 8월까지 통신, 인터넷을 통한 보이스피싱, 스미싱 등의 사기피해 건수가 2만8827건이고 피해액은 439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통신 인터넷 사기 피해는 근본적으로 개인 정보관리의 소홀에서 비롯된다. 아들 유괴를 가장한 보이스 피싱 피해 또한 전화번호는 물론 그녀에게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는 정보를 전제로 벌어진 사기극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정보 관리에 대해 정부 당국은 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에듀머니에서 실시하고 있는 '돈의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러 온 교육생 중에도 보이스 피싱으로 카드론 피해를 입은 여성이 있었다. 신용카드에 카드론 한도가 발생한 줄도 몰랐던 그녀는 사기 피해 이후 경찰을 찾았다. 경찰의 반응은 간단했다.

"아줌마 요즘 보이스 피싱 때문에 난리인데 좀 관리 좀 잘하지. 뉴스 안 봐요?"

금융회사는 개인정보 관리 소홀로 돈 번다?

이런 끔찍한 사기 피해의 가능성이 국민 3명 중 1명꼴에게 더욱 바짝 다가섰다. 최근 벌어진 3개 카드사(국민, 롯데, 농협) 정보 유출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개인정보 수집이 무분별하다는 것과 정보 유통에 대한 금융권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은 금융거래를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개인 정보 활용에 대한 동의를 강요받는다. 예금통장 하나 발급받는 데에도 개인 정보 동의서에 동의하지 않으면 발급이 안 된다. 신용거래를 할 경우엔 신용등급을 산정하기 위해 금융 거래에 관련된 개인 정보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단기 내에 신용거래를 할 필요가 없는 소비자들조차 금융사가 내미는 개인 정보동의서에 동의하지 않을 기회는 애초에 차단되어 있다. 우리나라 금융권은 무엇이든 효율적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소비자는 신용거래를 전제로 금융거래를 한다고 가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수집된 개인 정보는 자본시장 통합법과 신용정보보호법에 의해 금융권 내에서 자유롭게 유통된다. 금융지주회사법에 의해 금융지주회사들은 자회사가 수집한 고객 정보를 다른 자회사의 영업에 활용한다. 신용정보보호법에 의해 이번 사고의 무대가 되었던 코리아크레딧뷰로 같은 신용정보회사들이 개인정보를 가공해 판매하는 자유가 허용된다.

게다가 이렇게 개인 정보 유출 사건은 수년간 반복되고 있다. 그때마다 해당 금융사의 사과가 있었고 금융감독 당국은 철저한 책임추궁과 재발 방지를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한다. 이번에는 사태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해당 카드사 임원진의 사퇴라는 초강수(?) 액션활극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돌아갈 구체적인 피해 보상은 '문자통보 서비스'와 '개인정보보호 서비스'를 1년 간 쓸 수 있는 이용권이 고작이다. 여기서 더욱 기가 막힌 점은 개인정보보호 서비스 자체가 금융사들이 소비자들의 개인정보를 소홀히 관리한다는 불신에서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점이다. 결국 금융사는 정보를 소홀히 관리하고 그 덕에 신용정보회사들은 돈을 번다.

대형 사고를 치고도 내놓는 대책을 보면 금융권이 소비자들을 얼마나 바보로 알고 있는지 가늠하게 한다. 혹시 또 다른 대형 금융사고가 기다리고 있어 이번 사태를 금세 지나갈 소나기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권 버릇 고치는 방법,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

KB국민카드, NH농협카드, 롯데카드사의 역대 최대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롯데카드 임원단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카드 3사의 기자회견에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다.
▲ 허리숙여 사과하는 롯데카드 임원단 KB국민카드, NH농협카드, 롯데카드사의 역대 최대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롯데카드 임원단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카드 3사의 기자회견에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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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에 악용되는 개인정보로 국민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 개인 정보 유출사건은 준범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선 이러한 일들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왜 그럴까? 처벌과 근본대책이 없으니 기업들이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의 개인정보를 소홀히 관리하는 기업은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사회적 징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1984년 미국에서는 맥도날드 커피에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맥도날드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그 사건으로 맥도날드는 286만 달러(한화 30억 원 가량)의 손해배상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일반 커피보다 지나치게 뜨거운 커피 탓에 10년간 화상 사고가 700건이나 발생했지만, 맥도날드가 같은 온도를 고수했다는 이유로 치료비 외의 징벌적 금액이 가산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손해에 상응하는 액수만을 보상하게 하는 제도를 갖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사건은 그 사건 자체에서 손해가 발생하기보다 2차 피해가 더 큰 문제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 소송제도 하에서는 집단소송을 하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손해 배상금액도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이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를 더욱 부추기며 사건이 반복되게 만든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위원장은 '향후 유사 사건 발생 시 징벌적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도 이 의지가 유효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여기에 더해 소비자들의 소송 제기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 된다면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보안 서비스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수익성 제고'라는 효율만 강조하는 기업 입장에서 보안 서비스에 따른 비용이 소송비용보다는 싸다는 결론쯤은 금세 내릴 수 있다. 특히 3명 중 1명의 개인 정보가 털리고 금융감독 당국 수장의 정보마저 도둑맞은 해외토픽감의 사건 정도라면, 금융사 하나는 망할 수도 있다는 사회적 시그널이 절대 과하지 않다.


태그:#카드사정보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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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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