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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산천어축제는 이제 지구적 겨울 행사가 됐다. 해마다 소한 절기가 낀 전(前) 주 토요일에 시작해서 20여 일간의 축제기간 동안 경제효과는 1000억 원에 이르고 있다. 작년에는 24개국에서 3만여 명 외국인이 이곳을 찾았다.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 잡지, CNN 보도에 이어 올해는 미 월스트리트 저널 등 세계적 아이콘이 되고 있다. 화천군에서도 눈과 얼음이 없는 동남아 6개국 등에 집중적인 홍보를 하면서 외국인 전용 낚시터를 운영하고 있다. 축제를 위해 양양, 삼척, 울진의 양식장에서 기른 산천어 50만 마리가 투입되고, 추운 날씨에도 화천군청 내 필수 인원만 남고 공무원들이 실외 근무를 한다. 서울에서 두 시간 걸리는 화천이 겨울이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이다. 

산천어를 잡기 위해 낚시 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 산천어 축제장 풍경 산천어를 잡기 위해 낚시 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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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축제는 계속 진화해서 각종의 얼음 놀이에다 빙등, 3D 전시장 등도 보강되었다. 특히 세계축제도시 화천 선정기념 특별 기획전으로 열리는 미켈란젤로 전은 가볍게 놀러 온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문화체험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미켈란젤로 전시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 미켈란젤로 포스터 미켈란젤로 전시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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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울과 제주 등에서 여러 차례 로마전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을 기획 전시했던 남대현 대표는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과 함께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예술적인 영웅"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가끔 술 취하신 분들께서 오셔서 작품을 진품이냐? 만져도 되느냐? 하는 식의 짓궂은 질문을 빼고는 예상보다 관람객들의 만족 수준이 높은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는 것은 기실 인문학의 태동기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예술가들의 생애에 고충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전시장을 들어서자 벽면에는 '우리들의 가장 큰 위험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고 금방 실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금방 이루는데 있는 것이다'라는 미켈란젤로의 잠언이 적혀있다. 미켈란젤로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생모가 죽고 석공의 딸이자 아내인 유모에게 키워져서 13세부터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89세 죽을 때까지 끌과 망치, 붓과 연필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조각가로 남고 싶었으나 그의 재주를 높이 산 신흥 상인들과 메디치가의 주문으로 그림과 건축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간다. 그렇지만, 질이 안 좋은 물감의 재료와 과로로 그의 몸은 쇠약해졌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나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안료가 눈에 들어가 말년에는 거의 실명 상태에서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렸을 때 동료와 다투다 코뼈가 눌러 앉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헌헌장부의 다비드 상에 집요하리만큼 몰두하였고, 평생 자연에 대한 그림보다 도시나 인간, 신화를 주요 작업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채석장까지 직접 가서 최고의 돌을 일꾼들과 함께 날라서 일을 해야하는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중 하나인 피에타
▲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중 하나인 피에타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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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200년대 말부터 로마와 피렌체의 신흥 상인 계급에 의해 르네상스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과 수도원을 운영해야 할 종교계간의 필요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은 신흥 상인들에게 성당의 벽화와 건축을 맡기면서 그들에게 사후 수도원 지하에 매장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상인들은 벽화그림에 자신들의 문장 등을 그릴 것을 주문해 가문의 영향력을 키워갔는데 피렌체 출신으로 회화예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오토의 명작 '최후의 심판'이 그 시작이었다. 어떻든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천재 화가들의 출현과 재능으로 빛나는 문화유산이 현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품 중 하나인데 죽은 예수를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장면을 형상화 했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24살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중에 나이 지긋한 한 조각가가 '누구는 24살에 만든 작품을 아직 꿈도 꾸지 못한다'며 망치로 내려치는 바람에 제자들에 의해 보수되어 지금은 방탄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대리석을 조각할 때 단지 바위덩어리 속에 갇혀있는 형태를 해방시켰을 뿐이다'라는 것도 미켈란젤로의 말이다. 세계 최고의 재질을 갖고 있다는 이태리의 까라라 대리석도 그를 만나서 행복하였을까? 그 속내야 알 길이 없지만, 이들로부터 우리의 인류는 보다 풍부해졌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겠다.

르네상스기 이전은 종교의 시대였다. 그림조차 자동차 설계도처럼 그림의 비율과 채색 기법까지 정해 하나의 예외를 허용치 않았다. 음악도 문학도 심지어는 인간들도 단지 신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우리 역사는 때때로 몇몇 천재들의 전 생애를 건 고투로 변화를 겪어왔다. 이번 미켈란젤로의 전시 목적도 작품의 감상과 함께 이런 거장들의 발자취를 살피자는데 있다고 한다. 팁하나는 전시작품들은 원본을 주형을 뜬 것으로 이는 원본의 확실한 보전을 위한 목적으로 전 세계 모든 순회 전시도 같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철학을 표현한 말
▲ 미켈란젤로의 어록 미켈란젤로의 철학을 표현한 말
ⓒ 최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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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개장 일주일만에 산천어 축제 방문객은 벌써 50만명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변방의 작은 자치단체에서 지역의 특색을 살리고 정성을 쏟아 부어 겨울이면 화천군민들은 일대 잔치를 맞고 있다. 지역 상품권의 활용으로 지역경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어 더 큰 의미를 주고 있다. 산천어로 시작해 르네상스기의 거장들에게까지 흘러간 축제에 기대가 커지는 것은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이다. 모쪼록 갈수록 왜소해지는 지역을 살리는 등불로 휘황해지기를 바래본다.  

산천어 축제를 즐기러 나온 관광객들
▲ 산천어 축제장 풍광 산천어 축제를 즐기러 나온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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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세계축제도시 화천 선정기념으로 산천어 축제와 병행 전시되는 미켈란젤로 전시 취재



태그:#화천 산천어 축제,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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