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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는 '2014 2월22일상' 수상자로 김동주 김재식 김종성 김준수 문주현 박선희 박정환 박찬운 박현진 신수영 심명남 정은균 조남희 한경희 총 14명의 시민기자를 선정했습니다. '2월22일상'은 한 해 동안 꾸준히 좋은 기사를 쓴 시민기자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시상식은 2014년 2월 14일 <오마이뉴스> 상암동 사무실에서 치러집니다. '2월22일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만원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서는 '2013 올해의 뉴스게릴라상'과 '2013 특별상', '2013 올해의 기사상',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 시상식도 함께 열립니다. 수상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인사 드립니다. [편집자말]
[김동주 기자] "여행기 쓰는 이유요? 끝이라는 말이 참 서러웠습니다"

"끝이라는 말이 참 서러웠습니다."
▲ 김동주 기자 "끝이라는 말이 참 서러웠습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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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는 분명 <오마이뉴스>의 단골메뉴다. 많은 시민기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편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여행기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글이 있으니, 바로 김동주(fsrknight) 기자의 연재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다.

김동주 기자의 기사는 다르다. 그가 만든 '다름'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나는데, "와" 소리가 절로 나는 아름다운 사진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설명이 백미다. 하지만 그의 기사가 돋보이는 진짜 이유는 김동주 기자만이 갖고 있는 필력 때문이다. 마치 깔끔한 일본음식을 마주한 기분이다. 담백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철저하게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그날의 추억을 올곧이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김동주 기자 스스로 글을 쓰며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독자와의 대화'라 했다.

"저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대화라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은요?' 하고 묻게 되는 그런 대화 말이에요."

그의 글이 읽을수록 편안한 이유다. 이제 김동주 기자의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는 반환점을 돌았다. 남아 있는 곳은 스스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는 중미와 북미뿐이다. 이 부분에서 김동주 기자는 "글 분위기가 다소 쓸쓸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없다. 김동주 기자만이 담을 수 있는 특별함이 그만의 차별성을 계속 이을 것이다.

김동주 기자는 <오마이뉴스>에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여행 후의 제 삶에 애착을 가질 수 있게 만든 존재가 바로 <오마이뉴스>"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오마이뉴스>가 보다 성장하기 위해선 "문화 여행 관련 다양한 콘텐츠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조언도 남겼다.

따뜻한 그의 시선이 고맙다.

[김종성 기자] "동네 자전거 가게 주인장이 제 기사의 팬이 됐어요"

"동네 자전거 가게 주인장이 제 기사의 팬이 되었어요"
▲ 김종성 기자 "동네 자전거 가게 주인장이 제 기사의 팬이 되었어요"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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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sunny21) 기자가 올 한 해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기사는 12월 25일 현재 정확히 67편이다. 매주 한 편 이상 기사를 쓴 셈이다. 이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종성 기자는 글과 사진 속에 올 한 해 대한민국의 풍경이 온전히 담아냈다. 4계절의 변화가 눈에 띈다.

그렇다고 풍경에만 초점 맞춘 것도 아니다. <오마이뉴스>가 원하는 '사는이야기'의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했다. 사람 냄새가 나고 푸근하다. 무엇보다 그의 기사를 읽고 있으면 '아, 우리 땅이 이렇게 아름답구나'하는 고마움까지 느끼게 된다. 김종성 기자의 글이 좋은 이유다.

하지만 그의 기사가 특별한 이유는 역시 '자전거' 때문이다. 두 바퀴에 몸을 싣고 바람이 이는 대로 풍경이 전하는 감동을 풀어낸다. 덕분에 그는 요즘 새로운 직업이 하나 더 생겼다. 그의 '자전거 여행기'를 읽고 도처에서 연락이 왔다.

"<월간 자전거생활>이라는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매달 잡지에 '나만의 자전거길'이라는 자전거 여행기를 연재해달라는 부탁이었죠. 덕택에 팔자에도 없던 '여행작가'라는 소리도 듣게 되었어요."

한 가지 더 즐거운 사실은, 기사 덕분에 팬도 생겼다는 점이다. 특히 자전거 때문에 시시 때때로 들르곤 했던 동네 자전거 가게의 주인장도 김종성 기자의 팬이 됐다. 2014년에도 전국을 누비며 아름다운 우리네 풍경을 담아낼 김종성 기자의 글이 기대된다.

[박찬운 기자] 인권법 전문가의 세계문명 기행, '온고지신'을 말하다

그의 글에선 '오늘'을 사는 우리네의 삶이 보인다.
▲ 박찬운 기자 그의 글에선 '오늘'을 사는 우리네의 삶이 보인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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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운(chanpark62) 기자의 공식적인 직업은 법률가이자 법학교수다. 20년 이상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인권법 전문가이기도 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약력만으로 그의 글을 예단하기엔 너무 이르다. 박찬운 기자의 글에는 여느 법학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사람에 대한 무한 애정이다. 그 때문일까? 세계문명사, 특히 2천 년 전 로마사를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엔 '오늘'을 사는 우리네의 삶이 있다. 

그는 "비판적인 앵글로 과거의 사실을 보면 우리가 처한 오늘의 현실, 그리고 가야 할 내일을 비판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손에 저격당한 '10월 26일'을 상기하며 쓴 기사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박정희를 읽다>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는 박찬운 기자가 왜 글을 쓰는지,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함축하고 있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배우는 '온고지신'이다.

"저는 로마사나 로마문명에 대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저 로마문명에 관심을 갖는 교양인입니다. 그런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역사를 통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기 위함입니다."

애석하게도 박찬운 기자의 글은 많지 않다. 한 달에 한두 편 겨우 볼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탓이기도 한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만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글을 위한 '준비'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을 답습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써볼 생각입니다. 글로 옮기기 위해선 상당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의 말처럼 박찬운 기자는 사람에 대한 무한 애정으로 역사를 보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기사가 2014년에도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조남희 기자] "운동화 빨다 울어본 적 있으세요?"

"운동화 빨다 울어본 적 있으세요?"
▲ 조남희 기자 "운동화 빨다 울어본 적 있으세요?"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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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사는 기분은 어떨까? 그것도 도시에서 한평생 살아온 '서울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연봉 5000만 원짜리 직장을 때려치우고 섬으로 훌쩍 떠났다. 그것도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도 많다는 삼다의 섬, 제주다. 문제는 연고도 아는 사람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 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처녀가 좌충우돌 그려내는 제주착륙기가 대단하다. 내공이 만만치 않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지 이제 막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 기자를 '찜'하고 그의 기사를 받아보는 독자가 무려 51명이다(참고로 같은 시기 글을 쓰기 시작한 필자를 찜한 사람은 13명이다). 부럽고 놀랍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번 글을 송고할 때마다 '좋은기사 원고료'가 쌓인다. 첫 기사부터 그랬다. 그녀의 용기와 도전에 독자들이 응답한 것이다.

사실 조남희(hit1077) 기자의 기사는 딱 한 편만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느새 빠져들어 '서울처녀 제주착륙기'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조남희 기자의 말을 빌리면 "밤새도록 한라산 오르게 된다"(여기서 '한라산'은 제주도 지역 소주 이름이다). 그녀는 그만큼 중독성 짙은 글을 써낸다.

그렇다고 조남희 기자의 제주 생활이 쉬웠던 건 아니다. '외로움'이라는 내부의 적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녀는 당시의 소회를 <제주에서 번호 딴 첫 남자, 그는 능력자였다>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운동화를 빨다가 울어본 적이 있는가. 배웅을 마치고, 빈 집에 돌아와 엉망이 된 신발들을 빨다 말고 외로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운동화를 빨다 말 수 없고, 흙으로 엉망이 된 욕실도 치워야 했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

조남희 기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더 용감하고 씩씩하게 생활했다. 그렇게 '제주도민'이 된지 1년 6개월이 흘렀다. 그 사이 감귤도 따고 김장도 하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는 집 '오월이네'까지 마련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제주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육지에 있을 때 하지 못한 일들을 합니다. 마을 이웃들과 만든 소규모 밴드 공연 연습도 하고, 제주도의 좋은 곳들을 다니기 해요. 이주민(뭍에서 온 사람)과 관련해 마을도 살리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쪽 일도 하고 있고요. 서울 살 때와는 너무 다른 삶이네요."

그녀의 좌충우돌 제주정착기가 계속 기다려진다.


태그:#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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