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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통상임금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앉아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통상임금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앉아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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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이라며 노동계의 손을 들어줬다고 기사를 내던 그 순간, 대법원 법정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알았다. 이 판결은 경영계의 승리라는 것을.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논란이 되던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따로 있다. 이 판결은 노동자 입장에서 분노해야 하는, 최악의 판결이다.

최악의 판결, 두가지 이유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노사 합의 당시에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합의했으면 그 합의대로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즉, 지난 시기의 임금을 추가로 더 달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근로기준법은 최저기준이고 이에 미달하는 노사합의는 무효인 것이 원칙이지만,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면 기업의 재정상황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예외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통상임금 판단 기준으로는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지만, 막상 경제적 이익은 기업의 손을 들어준 이상한 판결이다.

둘째, 명절휴가비, 하계휴가비 등은 모든 근로자에게 동일한 금액이 지급되면 통상임금으로 주장할 수 있었는데, 이 수당이 나오지 않는 달에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한 푼도 지급되지 않는다면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퇴직자에게도 일할계산해서 지급하면 통상임금으로 인정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업장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수당들은 소송을 통해 통상임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항목들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기존에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던 항목들마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부정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줬다.

"건전한 재정은 기업에 있어 생명줄과도 같다. 재정의 악화는 경영난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심화되면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특히 임금은 기업의 재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중략)... 기업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기반에 영향을 주면서까지 임금을 인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 2013. 12. 18.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18페이지 중에서 인용

판결문은 18페이지부터 21페이지까지 총 4페이지에 걸쳐, 기업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흡사 경총에서 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이다. 노동자들에게 추가로 수당을 주면 기업이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쓰고 있다.

법관들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업이 정말로 망할 정도인 상황에서 그 소송을 유지하는 노동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노동자의 청구 권리를 인정하되 조정이 수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아예 사용자가 합법적으로 도망칠 길을 열어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대체 '신의성실의 원칙'이 무엇인가

근로기준법은 최저기준이고 이에 미달하는 노사합의는 무효라는 것은, 노동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법하는 사람들의 용어로 "강행규정"이라 한다. 노동자는 사용자보다 상대적 약자이므로, 당사자 사이의 계약내용보다는 법으로 정한 기준이 더 우선이며 이만큼은 적어도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원칙을, 사용자의 편에 서서 아주 쉽게 무시해 버린 것이다. 무시하려면 상당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극히 예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반한다는 이유를 댔다. 그 당시에 임금을 이만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던 "사용자의 신뢰를 저버리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으로서도 쑥스러웠는지 "정기상여금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라고 하긴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다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 앞에 가서 사죄해야 할 일이다.

노동법의 "강행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쓴 대법관은 단 세 명이었다. 소수의견 부분에는 다수의견에 대해 수차례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소수의견은 건조하게 법리적으로 다른 의견만 쓰기 마련인데, 상식 있는 대법관들로서는 얼마나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알 만하다.

대법원은, 노동자들이 이제 와서 "예상 외의 이익"을 바라는 것은 "정의와 형평 관념에 비추어 신의에 현저히 반하고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수의견의 대법관은 말한다. 그 당시 사용자가 노동자들의 근로를 제공 받았던 것이 오히려 "예상 외의 이익"이라고. 통상임금을 법정 기준보다 적게 정하면서, 사용자들은 저비용으로 장시간의 근로를 제공받았다. 그렇게 해서 기업 수익을 냈다면, 그 수익을 노동자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그것이 노동법의 정한 최저 기준이라는 것인데,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욕심을 부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소수의견은 단 세명... 그들은 말한다,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고

어떤 이는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나마 상여금이라도 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일 아니냐고 말이다. 최저임금마저 감지덕지인 비정규직에게 상여금이며 통상임금은 먼 이야기라고.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장시간 야간근로에 몸바쳐 일한 노동의 대가가 부정 당한 것이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노동법의 정신을 부정한 것은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정리해고를 법적으로 허용하면서, 기업이 정리해고를 할 "긴박하고 중대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기업의 경영상태가 노동자의 권리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했고,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 기업 중시 정신이 오늘에 다시 한 번 되살려진 것이다. 기업이 제일인 시대에,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

노동자가 살아남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살아야겠다. 대법원 통상임금 판결로 노동자의 권리가 심대하게 추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한다. 18일 이후로는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을 포함해서 수당 산정하라고 요구해서 추가 수당을 더 받아내야 한다. 노사합의가 없는 사업장은 당연히 소급분까지 지급해 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노사합의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 시키지 않은 사업장은, 묵시적 합의를 사측이 주장하더라도 그러한 합의가 없었노라고 싸워야 한다. 대법원은 임금 협상 당시나 지금이나 통상임금 기준이 달라도 임금 총액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임금총액으로 협상하지 않았노라고 싸워야 한다.

노사합의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서 빠져 있다고 해도, "기업에 중대한 부담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이 위태로운 사정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수당 소급분 청구를 예외적으로 제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리 사측이 경영이 어려워진다 주장해도 정말 그런 것인지 경영자료 공개를 요구하고, 꼼꼼히 따져보고 싸워야 한다. 그것이 무척 추상적이고 어려운 싸움인 것이 분명하더라도, 싸워서 얻어낸 것을 뺏겼으니 다시 싸워서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 신지심 기자는 법무법인 '함께'의 노무사입니다.



태그:#통상임금, #노동계, #경총, #대법원, #상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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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오월 공인노무사. <세상을 바꾸는 2022 대선공동행동>, <사라진 노동찾기 대선행동단>에서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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