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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戰犯)이라 하면 태평양 전쟁 도발의 주범 도조 히데키나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했던 조선의 청년들 중 전범이 있었다는 건 쉽게 상상이 안 간다. 바로 그 '조선인 전범'들에 대한 전시회인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 특별전이 지난 15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조선인 전범'이라 낙인찍힌 채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모임인 동진회(同進會) 주최로 열렸다.

1942년 5월 산호해와 미드웨이 제도에서의 전투 이후, 태평양 해역에서 일본군의 전황은 점차 불리해졌다. 일본군은 급박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총동원 체제를 강화했다. 이 시기에 일본 육군성은 미군과 영국군 등 연합군 포로감시를 위한 특수부대를 편성키로 결정했다. 동원된 사람들 중엔 조선인 청년 3016명이 있었다. 이들은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나서 동남아시아 각지로 파견됐다. 징용 대상으로 선정된 사람들에겐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1942년 5월말부터 일제는 본격적인 연합군 포로감시원 모집 선전을 벌였다. 사진은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자 <거듭되는 반도 청년의 광영, 군속으로 수천명 채용> 기사.
▲ 매일신보의 군속 채용 선전 1942년 5월말부터 일제는 본격적인 연합군 포로감시원 모집 선전을 벌였다. 사진은 매일신보 1942년 5월 23일자 <거듭되는 반도 청년의 광영, 군속으로 수천명 채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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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에 안 따르면 총살... 가지 않으면 죽음 밖에 없었다

(처음에 포로감시 일을 권유하는 걸 거절하고 나서) 구장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을 데리고 와서는 안 간다고 하면 "너희 집 배급을 전부 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배급을 중단하면 우리 가족 모두 굶어 죽으란 말입니까?"라고 하니까, "그렇다"라며 "천황폐하의 명령이니까 네가 명령에 안 따르면 총살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김완근 씨의 증언, 1994년 대일보상청구재판에서)

김완근씨는 인도네시아 자바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열대지방의 더위 속에서 식수는 빗물로 해결해야만 했다. 또한 일본인들은 그를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을 군마나 군견만도 못 하게 취급했다. 한편으로 일본인들은 연합군 포로들 앞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포로들은 우리가 뱀부 모리(Bamboo 森, 김씨를 괴롭힌 일본군 부사관의 별명)한테 맞는 것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포로들이 직접 접하는 건 결국 우리 포로감시원들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두 우리를 원망했을 거예요. (김완근 씨의 증언, 1994년 대일보상청구재판에서)

타이의 태면철도(泰緬鐵道) 건설 현장에서 포로 동원 일을 맡게 된 오행석 씨가 그린 포로수용소 실상. 사진 좌측 상단에 '영양부족, 부상, 호열자(콜레라), 마라리야(말라리아),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엔 일본군이 사망자 시신을 골짜기에 던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 포로수용소의 참혹한 실상을 표현한 그림 타이의 태면철도(泰緬鐵道) 건설 현장에서 포로 동원 일을 맡게 된 오행석 씨가 그린 포로수용소 실상. 사진 좌측 상단에 '영양부족, 부상, 호열자(콜레라), 마라리야(말라리아), 수만 명이 죽었다'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엔 일본군이 사망자 시신을 골짜기에 던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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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폭력과 무시, 연합군 포로들의 증오 사이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인들의 폭력과 무시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론 연합군 포로들의 증오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원치 않게 피해자이자 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일본군과 같은, 순전히 '피의자'일 뿐이었다. 1945년 10월~1951년 4월까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등 7개국이 주도한 B.C급 전범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재판관들이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 네덜란드 쪽 사람들로 이뤄진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조선인이 부당한 명령에 복종 안 할 수 없었던 입장임을 이해하는 관점이 없었다. 결국 조선인 23명이 B.C급 전범으로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한편 A급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인은 7명이었다.

전시 내용 중엔 일본이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어떤 수단을 썼는지에 관한 것들이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시모무라 통달(下村通達)'이었다. 이 명령은 1945년 9월 17일 육군대장 시모무라 사다무(下村定)가 내린 것으로, 동남아시아 각 포로수용소장들에게 연합군 측으로부터 심문 받을 시의 '모범답안'을 내놓은 것이다.

'모범답안'의 내용은 조선인과 대만인의 지휘 체계 편성이 뒤떨어져서, 일본군의 정당한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식이었다. 한편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은 식민지 민중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인에 대해 일본인과 똑같은 전범 취급을 했다.

김귀호씨는 '전범'이 되어 싱가포르 창이(Changi)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유서에 "전부 운명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떠납니다", "윙윙 날아다니는 모기 소리도 전범, 전범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라고 썼다.

김귀호 씨는 '전범' 판결을 받고 싱가포르 창이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조선인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형 전에 남긴 유서에 "운명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떠납니다"란 글을 남겼다.
▲ "운명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떠납니다" 김귀호 씨는 '전범' 판결을 받고 싱가포르 창이형무소에서 처형당한 조선인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형 전에 남긴 유서에 "운명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떠납니다"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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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운명이라 생각하고 웃으며 떠납니다"

처형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인들은 일본 도쿄 스가모(巣鴨) 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들은 석방 이후에도 석방된 게 아닌 삶을 살았다. 일본 정부는 그들이 이미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하여 생활 지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생활고에 더해 '전범'이란 낙인으로 인해 차별과 멸시도 당했다.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늘었다. 1955년 허영씨가 스스로 목을 맸고, 그 다음해엔 양월성씨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과 일본의 어느 언론도 이 문제에 관심을 안 가졌다.

평생 '안녕하지 못했던' 재일 한국인 전범자와 유족 약 70여 명은 1955년 동진회를 결성했다. 일본 정부의 차별적 행위에 분노한 동진회 회원들은 1955년부터 지속적으로 격렬한 시위와 진정서 제출을 이어갔다. 동진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보상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1991년 11월 12일 도쿄지방법원에 제기된 소송을 통해, 판결문에서 '한국인 전범의 피해를 인정하고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발표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동진회 회원들이 1956년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항의하는 동진회 회원들 동진회 회원들이 1956년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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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피해당사자 7명... 이들의 한 어떻게 풀 것인가

현재 일본에 남은 피해당사자 회원은 7명이다. 나머지 43명은 유족 회원들이다. 당사자들 모두 고령으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동진회는 지금 이 순간도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며 활동 중이다. 2007년 2월엔 한국 동진회가 결성되어, 일본 정부에 피해자 보상 및 사형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취하 요구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식민지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 받은 것도 모자라 '전범'이자 '부일협력자'로 존재로 규정 돼 버린 3016명의 사람들.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첫걸음은 우선 그들을, 그리고 그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앞으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1991년 동진회 회원들이 일본 이케가미 혼문지에 모여 찍은 사진.
 1991년 동진회 회원들이 일본 이케가미 혼문지에 모여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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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동진회, #제2차 세계대전,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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