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 학교는 지방 소도시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다. 8개 반으로 이루어진 한 학년 정원은 260~280명 수준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를 치르면, 국영수 과목이 대략 전국 평균점수 구간에 분포한다. 내가 맡고 있는 국어 과목에서는 1·2등급대 학생들이 반별로 서너 명 전후로 나온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런 성적 분포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번에 수능을 본 우리 반만 하더라도 과목별 등급 평균이 예년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다. 각 과목에 따른 등급별 분포자도, 상위 등급대에서는 그 수가 줄어들고 하위 등급대에서는 늘어난 양상을 보여준다. 우리 반에서는 국어 1등급이 한 명도 없었다. 국어 최고 등급은 2등급이었는데, 딱 한 명이었다.

요컨대 적어도 수능에 관한 한 우리 학교 학생들의 성적이 낮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학교나 교사가 제대로 못 가르쳐서일까. 하지만 학교교육과정은 수년째 별다른 변화가 없다. 최근 5~6년간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진행 방식도 해마다 거의 똑같다. 최근 교과 선생님들이 특별하게 수업을 게을리하거나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교사 구성도 거의 변동이 없다. 그런데도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 결국 다른 데서 성적 하락의 요인을 찾아야 하는 걸까.

지방 일반고, '선수층' 확연히 줄었다

방증으로 삼을 만한 사례가 몇 가지 있긴 하다. 무엇보다 '스카이(SKY : 이른바 국내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아울러 일컫는 말)에 진학할 만한 이른바 '선수층' 분포 범위가 확연히 줄었다. 스카이 외에 서울 주요 대학 수시 전형에 원서를 낼 만한 점수 분포를 갖고 있는 학생들도 많지 않다.

이건 우리 학교만의 사정이 아닌 듯하다. 가령 올해 이화여대 수시 1차 지역우수인재 전형의 경우, 군산 지역에 있는 여고 3개교에서 단 한 명의 합격생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학교별로 학교장 추천을 받아 6명 이내로 지원할 수 있는 이화여대 지역우수인재 전형은 실질적으로 지역 균형 전형이다. 해당 지역에서 합격생이 최소한 1명 이상은 나와야 전형의 취지에 맞는 것이 된다. 1단계 전형요소도 학생부 교과 성적이 80%나 되니 '지역우수인재'들에게 상당히 유리하다.

그런데도 군산 지역에서는 합격생이 '0'으로 나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전형 요소, 가령 1단계에서 20%를 차지하는 서류나 2단계에서 30%를 차지하는 면접 등에서 다른 학생들에 견줘 실력의 열세가 있었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른바 '선수층'의 물이 별로 안 좋은 게 아니었느냐는 것.

우리 학교 학생들의 수능 성적 하락을 학생 요인에서 분석하는 일이 조심스럽긴 하다. '학교'와 '교사 요인'의 중요성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 요인'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학생들의 학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교육정책 관련 요인이나 학부모들의 경제력·학력과 같은 요인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목고·자사고 우수학생 독식, 일반고 '슬럼화'

지난 이명박 정부는 학생·학부모들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해준다는 명목으로 고교 다양화 정책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애초의 목표와 달리 고교 다양화 정책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한 줄로 몰아 세움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고교를 서열화하는 폐해를 불러왔다. 그 결과 학교 서열 등급에 따라 학생들의 학력차가 뚜렷이 존재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지난달 12일, <연합뉴스>는 "자사고 신입생 절반, 중학교 내신성적 상위 20%"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뉴시스>도 "자사고-일반고 신입생 성적 격차 '심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인터넷에 띄웠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아래 '사걱세')이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서울 지역 자사고-일반고 신입생 중학교 내신성적'을 분석한 결과를 전하는 기사들이었다.

이들 언론 기사가 전하고 있는 사걱세의 분석 결과는 최근 학생들의 성적 하락 등으로 인해 '슬럼화'하고 있는 일반고의 위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외국어고나 과학고 같은 특수목적고(특목고)나 자사고는 입학 시부터 우수 학생을 독식함으로써 '선발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 반면에 일반고는 애초부터 출발선보다 뒤로 밀려만 상태에서 성적 경쟁을 시작한다. 특목고와 같은 특권적인 '귀족 학교'들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사걱세 분석 자료에 따르면, 일반고에서 중학교 내신 성적이 상위 20%에 드는 학생들은 18.1%에 불과했다. 49.7%에 이르는 자사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거꾸로 중학교 내신 성적 하위 50% 학생은, 자사고 5.1%에 반해 일반고는 50.7%나 되었다. 상위권 학생들의 태반이 자사고에 몰려 있는 반면 중하위권 학생들의 대다수는 일반고에 쏠려 있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중학교 내신 성적 상위 5% 이내의 학생들이 입학하는 특목고까지 합해서 보면, 일반고에서 '선수 학생 영입'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된다. 결국 우수 학생을 독식한 특목고와 자사고의 공세에 밀린 일반고는 입시에서도 불공정한 경쟁의 쓴맛을 톡톡히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입학 당시의 성적 차이가 입시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걱세의 분석 결과는 자사고와 일반고 사이의 계층 간 교육 불평등도 생생하게 확인시켜 준다. 사걱세가 서울교육정보연구원의 서울교육종단연구 1, 2차년도(2010~2011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반고에 다니는 자녀를 둔 아버지의 51.9%, 어머니의 34.8%가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였다. 반면에 자사고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72.9%, 어머니의 54.4%가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로 나타났다.

학교 유형별 가구 소득의 경우에서도 격차는 뚜렷했다. 2011년을 기준으로 일반고는 '400만원 미만'이 48.1%, '600만원 이상'이 23.2%인 반면 자사고는 '400만원 미만'은 27.2%, '600만원 이상'은 44.8%로 집계됐다. 부모의 학력과 경제력의 효과가 자녀들의 성적이나 학력 등 교육에 그대로 반영되는 교육 대물림 효과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데이터는 또 있다. 2012년 3월 14일, 백병부 숭실대 교수팀이 서울시교육청 정책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초등학교 학습부진 학생은 고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이 아버지 57.3%, 어머니 65.8%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중학생도 고교 졸업 이하 학력이 아버지 49.7%, 어머니 64.3%로 평균 절반 이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학습부진 학생들의 월 평균 총 가구 소득 또한 '200만원 이상 400만원 미만'이 41.0%로 가장 높았다. '200만원 미만'도 39.1%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3일 정부는 교육 서비스 분야 투자활성화 대책 명목으로 특권적인 '귀족학교'들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각종 교육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정부의 투자활성화 대책은 ▲ 외국학교법인과 국내학교법인의 합작설립 및 운영 참여 허용, ▲ 국제학교의 결산상 잉여금의 배당 허용 및 과실송금 허용 ▲ 방학 중 영어캠프 허용 등 영리 활동의 적극적 보장 등이 그 핵심이다. 이를 통해 국내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유학 수요를 흡수해 유학수지 적자를 축소하겠다는 게 정부의 목표다.

1년 학비 842만 원, 삼성고는 누구를 위한 학교인가

하지만 정부의 이번 대책은 기대하는 목표와는 달리 교육 분야를 시장화하면서, 특권적인 귀족 학교들을 우후죽순 늘리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삼성, 현대, 수자원공사, 하나은행 등 국내 대기업과 정부 산하의 공기업, 금융기관들이 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학교들은 특권적인 '귀족 학교'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다. 내년 3월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에 문을 여는 충남삼성고등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충남삼성고는 국내 최대 기업 삼성그룹이 설립하는 첫 번째 자율형사립고다. 내년 3월 개교하는 이 학교는 삼성 임직원 전형이라는 명목으로 학생 70%를 선발한다고 한다. 1인당 연간 학비도 8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웬만한 대학교의 등록금 수준에 맞먹는 액수다. 삼성 직원 자녀들을 위한 '특권 학교', '귀족 학교'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이들 국내기업들이, 학교를 매개로 확실하게 영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빗장을 풀어 준 이번 정부 대책으로 재미를 보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들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이 제주국제도시뿐만 아니라 8개의 경제자유구역, 5개의 교육국제화특구 등에서 '학교 장사'에 참여하는 '사업 구상'을 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유난스러운 교육열을 보이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성향을 고려할 때 수요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귀족 학교'들에 돈 많은 부잣집 출신의 성적 좋은 학생들이 몰려들 것임은 불문가지다.

일반고는 평준화 고교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고교의 65.7%를 차지한다. 외국어고나 과학고와 같은 특목고, '자율형·자립형' 등이 붙는 일부 공·사립고, 체육고·마이스터고 등은 자체 전형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한다. 한 마디로 비평준화 고교다. 이들을 모두 합친 비율이 35% 정도다. 결코 낮은 비중이 아니다. 고교 다양화 정책이 본격화한 이후부터의 상황이다. 우리나라 고교 입시의 골간인 평준화 정책이 근간에서부터 조용하면서도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는 이유다.

특권적인 '귀족 학교'의 부흥과 일반고의 쇠락은 국내 최고 학부인 서울대 입학 결과를 통해서도 방증된다. 서울대는 입학정원의 83%를 수시 모집으로 뽑는다. 지난 6일, 서울대는 지역균형선발전형과 일반전형, 정원 외 기회균형선발 특별전형 등으로 총 2684명을 수시모집으로 선발했다고 밝혔다.

이중 일반고 출신 학생은 전체의 46.3%에 해당하는 1243명이었다. 자사고·외국어고·과학고 등 '특별한 학교' 출신 학생들은 각각 405명(15.1%), 250명(9.3%), 233명(8.7%) 등이었다.

문제는 그간의 서울대 수시 모집에서 일반고 출신 합격자 비율이 올해 처음 전체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 올해의 일반고 출신 학생 비율 46.3%는 지난해의 54%(1448명)에 비해 7.7% 포인트나 하락한 수치다. 반면 자사고·외국어고 출신 학생 비율은 각각 2.3%·3.0% 포인트 증가했다.

특목고나 자사고와 같은 '귀족 학교'들의 약진은 필연적으로 일반고의 부진을 가져온다. 학교의 면학 분위기나 대학 입시 성적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결과적으로 '귀족 학교'의 확산은 공교육의 위상 약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대다수 국민의 눈에 공교육의 본령은 특목고가 아니라 일반고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만 해도 자사고의 학생 선발권 폐지를 검토하기까지 했다. 일반고 슬럼화 문제와 학교 서열화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사고 학부모들의 조직적인 로비와 방해 때문이었을까. 지난 10월 28일 교육부가 확정·발표한 '일반고 교육역량 강화방안'은, 애초의 약속과 달리 자사고의 학생 선발권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일반고 교육역량 강화방안'이라는 대책 이름을 무색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교육부는 공교육의 근본 토대를 허무는 '학교 장사' 정책을 '투자 활성화 대책'이라는 그럴 듯한 명목으로 도입하려 하고 있다. '자회사 설립을 통한 효율성 강화'라는 이름으로 '철도 민영화'를 감추는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정부와 교육부는 교육 불평등을 갈수록 심화시키는 특권 학교 정책을 즉각 폐기함으로써 교육 기회의 평등과 계층간 이동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귀족 학교', #특권 학교, #고교 서열화, #자사고, #특목고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