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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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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주체적일 때 가장 행복하고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나는 보부상이다(9쪽. 첫 줄)"로 시작해서 "보부상의 아들인 네가 자랑스럽다(160쪽 7줄)"로 마무리된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인 족쇄를 제도적으로 끊고 민중이 세상의 주인으로 나서려는 첫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족과 친일 모리배가 불러들인 외세에 의해 실패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이 사실을 근거로 작가는 열세 살 아이가 아버지가 남긴 서찰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시대의 과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외세에 의해 실패하는 과정을 보면서 삶의 주체로 일어서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혁명에 실패한 지도자 전봉준이 일본군에 의해 압송되어 온 길과 반대로 아이는 도성(한성)에서 피노리까지 이르는 길에서 삶의 주체로 거듭난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를 보면 시대의 과제 앞에서 "선비적 정신과 상인적인 현실감각"을 이야기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이 떠오른다. 글자를 읽어 주는 것까지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상인(보부상)의 열세 살 아이는 결국 서찰을 전하고, 사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김대중씨는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 끝에 대통령이 된다. 시대의 과제 해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실존의 면에서 둘 다 성공한 삶이다.

"네 노랫소리에 약이 들어 있구나(15쪽 6 줄)."노래를 부르고 듣는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허기가 가시고 추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살면서 노래(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좋은 노래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사람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한다. 자기가 서 있는 바탕을 알게 하는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면 삶의 방향, 즉 운동성이 정해진다. 노래는 삶이요 힘이다.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부조리한 자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이다.

"嗚 呼 避 老 里 敬 天 賣 綠 豆(80쪽 9 줄)". "아버지도 네 어미 생각이 많이 난다(26쪽 14 줄)."며 길에 아이를 홀로 남긴 아버지가 남긴 서찰의 내용을 열세 살의 아이가 알아맞히는 시간의 흐름은 무지에서 인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자 세상에 주체로 서가는 자리매김이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그 과정에서 그냥 되는 것은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놀라운 것은 그 대가를 선택하는 것도 주체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아이야, 날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사고 안 사고 결정하는 것은 너다. 그게 너한테 중요한 거라면 너한테서 중요한 것을 나에게 주는 건 당연하다(43쪽 15~17 줄)."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돈이 수단으로 작용할 때, 인생은 고귀해진다.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돈을 버는 것이 전부인 보부상(상인)에서 돈을 수단으로 활용하여 정치에 뛰어드는 삶의 주체로 거듭난다.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피에 젖은 손을 들어, 내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다가서려하자, 일본 군사가 막아섰다. 그때 말을 타고 있던 일본 군사가 보내 주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며 천천히 녹두 장군에게 다가갔다(155쪽 1~5 줄)."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외세 때문에 실패한 동학농민혁명을 그 사건의 정점에 있는 전봉준이 아니라 열세 살 아이의 시선으로 기록한 처절한 기록이다. 그리고 폭력에 기반한 비 인간적인 사회구조에서도 주체로 서는 인간이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말한다.

"장군님을 만나러 오는 동안 처음으로 행복했어요."
"그래, 나도 널 만나서 행복하구나." - 155쪽 17~18 줄

우리는 세계에서 같은 언어와 글을 쓰면서도 분단되어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지점에 운명처럼 자리한 한반도가 지금 요동치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는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우리는 다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158쪽 1~4 줄)."

다시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넋두리로 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

한윤섭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푸른숲주니어(2011)


태그:#서찰을 전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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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놀게하게 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초등학교교사. 여행을 좋아하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파행적인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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