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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의 유래와 역사

 

석파정(石坡亭)은 서울미술관을 보고 난 다음에 들어갈 수 있다. 서울미술관 옥상이 석파정의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미술관을 나가면 서북쪽으로 근사한 한옥이 남향하고 있다. 이 건물이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석파정이다. 네 채의 기와집과 한 채의 정자로 이루어진 별서(別墅)였으나, 별당채는 홍지동 125번지로 이전되어 있다. 1958년 소전 손재형이 별당채를 구입해 홍지동 자신의 집 후원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손재형의 집은 현재 석파랑이라는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석파정을 조망하기 위해 별당 가운데를 흐르는 계류(溪流)를 건너 3층석탑 쪽으로 향한다. 계류의 바위에 소수운렴암(巢水雲廉菴)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구름이 모여들고 물이 깨끗한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구름은 사람을, 물은 마음을 상징한다. 계류를 건너면 언덕에 3층석탑이 있다. 2층 기단에 3층의 옥개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른 고려 초 석탑으로 추정된다. 3층석탑이 이곳에 오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만약 3층석탑이 제 위치라면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이 소수운렴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절이 있던 곳에 별장이 생겨난 것이다.

 

현재의 석파정은 조선 말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지었다고 한다. 김흥근은 안동 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8대손으로 1826년(순조 26년) 한림소시(翰林召試)로 벼슬길에 올랐다. 1864년(고종 1년)에는 판중추부사, 도제조 등에 이르렀고, 대원군의 집권과 함께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것은 김홍근이 김좌근 등과 함께 헌종, 철종 대 외척세력인 안동 김문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김흥근이 살 때 이곳의 이름은 삼계동(三溪洞) 정자였다고 한다. 그것은 별당의 서쪽 암벽에 새겨진 삼계동이라는 각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숙종 때 문신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조정만에서 김흥근까지 이 집의 소유주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흥근에서 흥선대원군으로 주인이 바뀐 것은 고종의 집권 후다.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이 삼계동 정자를 김흥근으로부터 헌납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이 정자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김흥근이 팔기를 거절하자 대원군은 아들 고종과 함께 이곳에 묵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흥근이 임금이 묵어 간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며 집을 나라에 바쳤다고 한다. 그 후 이 정자는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고, 자신의 호를 따서 별장의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꿨다. 석파정은 그 후 대원군의 후손이 6·25전쟁 때까지 살았다. 현재 석파정은 (주)석파문화원 소유로 되어 있다. 

 

안채, 사랑채 그리고 별채

 

이곳 3층석탑 아래에서 석파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서쪽 산자락으로 중국풍 정자가 있다. 그 오른쪽으로 역시 중국풍의 별당채가 있었다. 그런데 이 건물이 현재 석파랑으로 이전되어 있다. 그리고 정면 앞에 안채가 있고, 그 왼쪽으로 사랑채가 있다. 안채 뒤로는 별채가 있고, 안채 앞 계류 주변에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 우물이 있었음은 수조(水槽)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물의 이름은 월천정(月泉井)이었다고 한다.

 

나는 석파정 마당을 지난 건물 쪽으로 간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담장을 따라 가며 안채를 들여다본다. 안채의 뒤에는 장항아리가 두 줄로 놓여 있다. 한 층 위의 별채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가장 좋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방이 3칸, 대청과 마루가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채 앞 축대는 성곽에서 사용하던 돌을 옮겨 쌓은 것 같다. 왜냐하면 돌이 오래되었고, 같은 재질의 석루조(石漏槽)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 안채에는 2012년 8월 28일에 세운 서울미술관 개관기념 표석이 있다. 나는 안채 쪽문을 지나 사랑채로 나온다. 사랑채는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건물이지만, 서쪽의 한 칸을 앞으로 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랑채 옆에는 정말 멋진 소나무가 있다. 서울시 보호수 60호로 수령이 23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소나무는 2m 정도에서 가지를 옆으로 뻗어 올라가 크게 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큰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시인묵객들이 그 아래에 앉아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성재(成齋) 조병헌(趙秉鉉: 1791~1849)이 삼계동으로 상서(尙書) 김흥근을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있다. 성재는 1846년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847년 안동김씨와의 세도정치에 밀려 거제도와 나주(羅州)의 지도 등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849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런 그가 어떤 연유로 삼계동 김흥근의 정자를 찾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항아리 속 별천지에 높은 누각이 있어                 壺中別有一高樓

계류 옆 소나무 아래 선비가 가을을 즐기네.         挾澗松濤士見秋

산 속에 들어 풍경을 즐기며 세속의 때를 벗고      弘景居山無俗累

글월이 사물과 감응해서 시심이 솟아나네.           文通感物惹詩愁    

 

별도로 떨어져 있는 중국풍 정자와 별당채 이야기

 

석파정은 계류와 큰 바위 그리고 장송(長松)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뒤쪽 큰 바위에는 삼계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다시 서쪽 편으로 더 올라가면 별당채가 있었다. 그 별당채는 중국풍이어서 우리 건축물과 달리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고, 측면 벽에 박공이 없다. 그리고 벽에는 원형의 창이 달려 있다. 바로 이 집이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스케치 형식으로 표현되어 나온다. 

 

이를 통해 추사 김정희가 김흥근의 집에 드나들면서 이 별당채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는 또한 장경(張庚: 1685-1760)의 '소림모옥(疏林茅屋)'과 사사표(査士標: 1615-1698)의 '호산람승(湖山攬勝)'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그 중 '호산람승'은 호수와 산으로 이루어진 좋은 경치를 유람하는 내용이다. 근경으로 몇 그루의 버드나무와 아카시 나무를 표현했으며 그 사이에 빈 정자가 있다. 추사는 바로 이 그림에서 '세한도'의 모티브를 얻었다. 그러면서 버드나무와 아카시 나무를 소나무와 잣나무로, 사모지붕의 정자를 중국식 별당으로 바꿔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조각이 있는 잔디 정원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다

 

나는 이제 석파정을 떠나면서 잔디 정원을 살펴본다. 정원의 한쪽에 장명등이 하나 서 있다. 어느 무덤 앞에 서 있어야 할 것이 이곳에 와 있다. 잔디 정원에는 현대적인 예술품이 하나 서 있다. 짐 다인(Jim Dine: 1935-)의 조각 작품 'Night Field, Day Field'(1999)다. 낮과 밤을 상징하는 두 여인이 나란히 서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기본 구도는 밀로의 비너스를 따랐다. 거기다 조형성과 색감이 뛰어나다. 그래선지 높은 예술성이 느껴진다.

 

짐 다인은 1957년 오하이오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해프닝(Happening)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2년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앤디 워홀(Andy Warhol) 등과 함께 팝 아트(Pop-Art) 작업에 참여한다. 60년대 그는 팝 아티스트로서 일상성과 상업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팝 아티스트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1963년 11월 <아트뉴스(Art New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인기 있는(popular) 이미지만 다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풍경의 일부로서 인기 있는 이미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팝 아트는 내 작업의 일부일 뿐입니다. 인기 있는 이미지들보다 오히려 더 관심이 있는 것은 개인적인(personal) 이미지들입니다."

 

파퓰러보다는 퍼스널을 강조한 그는 70년대 들어 드로잉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80년대에는 조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Night Field, Day Field'도 조각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2007년 여름 그는 시카고에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차가운 지구, 좀 더 차가운 별을 만들기 위한 뜨거운 생각들"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한 그림, 조각, 책으로 피노키오를 표현하면서 동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짐 다인의 조각이 있는 이곳 잔디 정원에서는 북악산이 건너다보인다. 북악산 줄기를 따라서는 서울성곽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백악산 남쪽 한양을 수도로 정한 것이 1394년이다. 그 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내사산(內四山)을 따라 도성을 축조하였으니, 그것이 지금의 서울 성곽이다. 그리고 서울성곽의 북쪽에 자리 잡은 서울의 주산이 백악산 또는 북악산이다. 과거 기록에는 백악산이 더 많이 나오나 현재는 북악산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석파정은 서울의 북서쪽 창의문(彰義門) 너머에 있다. 창의문은 인조반정을 계획한 서인세력이 의를 드높인 문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창의문의 다른 이름은 자하문이다. 현재는 자하문 터널이 생겨 경복궁 쪽에서 부암동 쪽으로 좀 더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큰 맘을 먹고 넘어야 했을 것이다. 대원군은 평소에 운현궁에 머물다가, 그림을 그리거나 풍류를 즐기고 싶을 때 창의문을 넘어 이곳 석파정으로 행차했을 것이다.


태그:#석파정, #3층석탑, #김흥근과 흥선대원군, #별당채와 "세한도", #JIM D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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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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