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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책이나 TV에서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 예컨대 부시맨이나 피그미 족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이미지는 '문명의 세례를 못 받은 야만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항상 벌거벗고 다니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고, '현대 문물'을 이해 못 하는 그들의 이미지는 대중매체에서 더욱 확대재생산됐다. 심지어 그들을 '식인종'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민족이 그런 '미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들의 '무능함과 야만성' 때문이 아니란 걸 나는 너무나 늦게 알았다. 중세와 근대에 걸쳐 유럽 제국주의 열강은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자원을 수탈해 갔다. 한편으로 아프리카 민중이 열강의 지배를 받게 된 건 그들이 무능하고 야만적이기 때문이란 선전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열강의 아프리카 지배의 산물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민중을 괴롭힌다. 또, 유럽 열강이 지어낸 '아프리카인들은 미개인이자 야만인'이란 이미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겉그림.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겉그림.
ⓒ 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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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프리카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도 그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자원을 수탈당한 걸로도 모자라, 한(韓)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문명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종족'으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제국주의 열강은 일본의 그러한 악선전에 사실상 동조했다. 이숲 교수는 저서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에서 구한말 우리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이러한 비극에 대해 강조한다.

왜 세계는 일본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한국의 목소리를 무시하는지, 매켄지가 분노한 것은 일본의 음모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도 강한 자들끼리 뭉쳐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약자를 무시하는 세계 권력의 메커니즘이었다. 세계열강은 이 '버림받은 민족'의 희생을 노골적으로 원하고 있었다. 세계는 모두 '한국을 우려먹는 하나의 거대한 행복한 가족'이었다. - 302쪽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조선을 잘못 판단한 영국의 제국주의자

19세기 말~20세기 초 당시 조선에 대한 열강의 인식은, 어린 시절 내가 아프리카인들을 바라보던 인식과 비슷했다. 책에 나오는 미국인 윌리엄 그리피스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 사람들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는 야만의 대표적인 모습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서양인들은 판단했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에 대비되어 '문명국'으로 칭송 받았다.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던 영국인 헨리 드레이크는 "일본만이 동양에서 유일하게 '자치'에 적합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훗날 인도 총독이 되는 영국의 정치인 조지 커즌은 조선에 대해 '오만과 편견'을 가득 품은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된다. 저자는 커즌이 한국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실존'이 아닌 '집단'으로만 보려 했다고 판단했다. 영국의 제국주의자인 커즌의 입장에서, 한국인에 대한 판단은 식민지배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수준까지만 가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즌은 한국인에 대해 편견 없이 보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한국인은 무관심, 불감증, 무기력, 유약함, 자기만족적인 나태함, 치료 불능의 게으름 등등, 온갖 좋지 않은 점뿐인 존재였다. 심지어 그러한 특성들을 '아시아적 병폐'라 논하면서 전체 아시아인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한국'만을 보여주고 싶었던 커즌과 드레이크 등의 오만과 편견은 사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인들과 직접 교류했던 극소수의 외국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구 열강 사람들이 지닌 문제였다. 그들에게 한국은 자신들의 '제국'과 비교해서 지극히 초라한 나라였을 뿐이다. 아울러, '문명과 야만'이란 이분법적 도식으로 '야만인'인 한국인들을 깊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문명과 야만'의 도식은 서구인들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민족을 잘못 보게 만드는 강력한 편견 요소로 작용했다.

체험과 소통으로 '진짜 한국인'들을 만난 매켄지

저자 이숲 교수는 그러한 '오만과 편견'을 극복한 대표적 인물로 프레드릭 매켄지를 든다. 앞서 언급한 커즌이나 드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이었던 매켄지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체험을 중시했던 그는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함부로 쓰려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일본이나 서구열강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한국에 대한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의병들을 만나기 위해 험한 여정도 마다치 않는 등 '진짜 한국인'을 만나고자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 결과 매켄지는 당시 한국인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사고하고, 인류의 정의와 진보를 믿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들'이라고 인식하는 데 이르렀다.

매켄지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가 다른 세계, 다른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회 구성원들과의 가감 없는 소통이 중요함을 매켄지는 몸소 보여줬다. 만약 직접적인 체험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그 사회에 대해 기존의 단편적 자료들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것만큼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오만과 편견의 징후는 심히 우려스럽다. 일부 외국인 노동자들의 범죄를 보며 '동남아인이랑 조선족은 전부 다 범죄자'라고 생각한다. 또 이슬람권 국가들에 대해선 '테러리스트'이자 '호전광'이란 인식이 강하다. 반대로 서구 선진국들에 대해선 아직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오만과 편견은 북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최고조에 달한다. 북한을 그저 '빨갱이'이자 '쳐부숴야 할 주적'으로만 바라보면서, 북한과 평화적으로 대화하고 타협하자는 이들에 대해 '종북'이란 올가미를 씌운다. 어떤 사회가 가진 문제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하는 게 아닌 그 사회에 대한 맹목적 편견, 그리고 우월감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과거 커즌이나 드레이크 등이 보인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강대국의 각 나라에 대한 '성격 규정'은 현재진행형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특정 사회들에 대한 강대국의 '성격 규정'이 현재진행형이란 것이다. 지난 2002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듯,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고 다른 사회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슬람권과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강대국의 논리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강대국의 주류 언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슬람권과 북한,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이슬람권 각지에서 벌어지는 자살 폭탄 테러 등 저항세력의 활동을 그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게 대표적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싸우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류 언론은 그것을 받아쓰기에 바쁘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은 '호전적인', 그리고 '야만적인' 나라들로 이미지가 굳어진다.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의 저자는 일본 등 외세에 의해 오인된 한국,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우리 스스로 다시 바라보자고 이야기한다. 나는 우리나라만 다시 바라보는 걸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대국의 시각에서 우리 바깥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우리 스스로의 시각'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 '우리 스스로의 시각'은 어떤 오만과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때, 그리고 순수하게 그 사회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제대로 설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서평 응모글입니다.



스무 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이숲 지음, 예옥(2013)


태그:#스무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프레드릭 매켄지, #조지 커즌,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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