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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그리 되신 거예요?"
"예."
"우리 남편도 교통사고인데 걷는 게 휘청거리고 불안해서 힘들어요. 아저씨는 팔 힘이 엄청 세네요. 부럽네요."
"……."


그 아주머니 부부가 자리를 뜨시고 난 뒤 팔 힘 좋으신 휠체어 아저씨가 투덜거리신다.

"난 그 정도만 되어서 설 수만 있어도 춤추고 다니겠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자랑질도 아니고…."

휠체어 아저씨는 하반신이 완전 마비라서 두 팔로 상체를 일으켜 옮기고, 스스로 휠체어를 밀며 다닌다. 그러니 팔 힘이 엄청 좋아지셨다. 아마 오래 되신 듯하다. 그 분도 가시고 난 뒤, 내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저 걷는 분 말고 휠체어 아저씨만큼만 두 팔에 힘 있어도 정말 행복하겠다. 할 수 있는 게 무지 많아질테니. 다들 부럽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편한 매트를 차지하려고 서로 서두르곤 했다. 그래서 5분이나 일찍 와서 기다리는 사람, 끝나기도 전에 미리 휠체어를 탄 채로 곁에 서있기도 했다. 더 북새통이 되는 교체 타임이지만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으려는 애쓰는 마음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 재활치료시간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편한 매트를 차지하려고 서로 서두르곤 했다. 그래서 5분이나 일찍 와서 기다리는 사람, 끝나기도 전에 미리 휠체어를 탄 채로 곁에 서있기도 했다. 더 북새통이 되는 교체 타임이지만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으려는 애쓰는 마음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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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자기가 타는 것도 아니고 휠체어에 실려 다니고, 소변 주머니를 차고 산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내는 장도 마비되고, 밥도 제 손으로 먹지도 못하는데 참 배부른 소리들만 하시네….'

그러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직전 병원에서 뇌종양과 폐암 말기로 남은 시간이 두 달이냐 석 달이냐를 의사와 계산하는 가족들과 지내다 왔기 때문에. 그 가족들은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다. 단지 환자와 가족이 눈 맞추고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만 보고 살기, 아래만 보고 살기….'

긴 3개월의 입원치료를 그런대로 마치고, 차로 국립암센터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겼다. 멀리 가면 응급시 빨리 대처하기도 어렵고, 정기적으로 검사 다니기도 힘들 거라는 의사선생님의 권유에 따랐다.

재활병원의 오전 한때, 수많은 휠체어의 들락거림으로 혼잡했다. 휠체어 타는 환자만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에 있던 종합병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투병 중이었다. 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기도 하면서, 운동을 마치고 나가는 사람과 그 자리를 들어오는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우리가 어디쯤에 서있는 처지인지 실감이 났다.

평생 불행하려면 위만 바라보며 살면 된다고 누가 말했다. 그럼 평생 나보다 어려운 사람만 바라보면서 살면 행복하기는 할까? 별로 그렇지 못하더라는 경험을 했다. 그동안 병실을 스쳤던 여러 사람들의 얼굴과 상태가 동시에 떠오른다. 행복해지기는커녕 마음이 아프다.

'눈 맞추지 마! 한번 눈 맞아 이 고생인데.'

기립성 저혈압으로 이 30분을 못 견디고 수시로 내려지곤 했다. 다리를 주물러 혈액순환을 시키면서 버텼다. 그 30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때 힘이 들어 이런 저런 우스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때는 놀려먹고, 어떤 때는 아이들 이야기를, 또 어떤 때는 미운 사람 흉도 보고.
▲ 경사침대, T- 테이블 치료시간 기립성 저혈압으로 이 30분을 못 견디고 수시로 내려지곤 했다. 다리를 주물러 혈액순환을 시키면서 버텼다. 그 30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때 힘이 들어 이런 저런 우스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때는 놀려먹고, 어떤 때는 아이들 이야기를, 또 어떤 때는 미운 사람 흉도 보고.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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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변함없이 테이블에 꽁꽁 묶여 세워진 아내가 마치 십자가에 묶인 예수님처럼 서 있다. 왜 사냐고도 물어 보았고, 날 위해서 오래 살아야 한다고도 해보았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걸어보나?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왜 쳐다봐?"
"……."

아내가 말없이 그냥 웃는다.

"싱겁긴! 그리고 눈 마주치지 마, 그놈의 눈 맞는 바람에 내 인생 이렇게 힘든데 또 눈 맞으면 안 돼!"

또 웃는 아내, 하긴 어디 이게 눈 한번 맞았다고 누구나 겪는 일도 아닌데 심한 비약이다. 그럼 세상에 성할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런데 눈 맞아 고생한 한 사람을 안다. 영화 <슈퍼맨>의 주연을 했던 크리스토퍼 리브의 아내 다나 리브. 1992년 <슈퍼맨>의 스타 크리스토퍼 리브와 결혼한 후, 1995년 리브가 말에서 떨어져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고 2004년 10월1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9년을 곁을 지켰다.

사고 직후 크리스토퍼 리브는 병원으로 달려온 다나에게 "이것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도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결혼서약 이상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나는 "나에게 당신은 언제나 당신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 다나는 투병기간 동안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리브의 재활을 도왔다.

2004년,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다나 리브는 자신이 폐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남편을 간병하는 동안 늘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1년 반을 힘내서 투병을 했지만 2006년 3월6일 사망했다. 힘든 9년간의 간병기간이 그녀를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들게 하고 면역기능을 떨어뜨렸을까를 생각하니 내게도 두려움이 몰려온다.

전직 대통령 클린턴과 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다나 리브에 대해 "강인함과 기품의 본보기"였다면서 "역경에 꿋꿋이 맞서면서 헌신적인 아내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나와 아내도 혹시 세상을 떠난 뒤에 아이들과 이웃, 친구들에게 그런 평가를 들을 수 있을까? 아내는 해당되겠지만 솔직히 나는 자신도 없고, 자주 무너지면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응급실로 가는 길, 재미없네요.'

오늘 또 응급실로 뛰어간다. 하도 자주 해보는 일이라서 만성이 될 만도 한데 여전히 두렵고 불안하고 속상하다. 열심히 발버둥 치고 몇 달 걸려 쥐꼬리만큼 좋아지게 해놓으면 한 입에 톡 털어 먹는 재발 후유증, 참 속상하다. 그리고 동시에, 비어가는 통장의 잔고처럼 줄어가는 체력을 느낀다.

아내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온 후 며칠 괜찮더니, 또 열이 오르고 두통과 울렁거림이 계속되었다. 버티다 열이 39도를 넘어 할 수 없이 다시 먼저 있던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MRI를 찍고 등에서 척수액을 뺐는데 뇌수막염까지 검사해야 할 것 같다는 선생님 설명에 기운이 쫙 빠진다.

그래도 지금까지 받은 치료가 완전 무의미하지는 않은 것이, 사지에 힘이 빠지는 정도가 예전 재발보다는 많이 양호하고 천천히 떨어지는 걸로 보이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래도 이제 응급실은 그만 가고 싶다. 정말, 정말….

'70억 인구 중에 만난 당신.'

3일의 스테로이드 주사 처방을 받았다. 입원실도 없어서 주사실에서 3일을 출퇴근으로 맞기로 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가까운 곳 재활병원에 입원하라고 하셨나보다. 그 중 하루 주사치료를 마치고 다시 돌아 온 재활병원, 병실 조용한 방에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밥시간이 되어 작은 식판 하나를 받았다. 통 밥을 먹지 못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다가 문득 이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목이 메었다.

"우리가 함께 한솥밥 먹은 지 참 오래 되었지?"
"……."
"생각해보니 당신과 한솥밥 먹은 지가 20년이 넘었고 이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 가장 많이 밥 먹은 사람이 당신이네!"

아내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솥밥을 20년 넘게 먹은 유일한 동반자! 일찍부터 세상에 떨어져 나와 혼자 사는 바람에 부모도 형제도 아닌 부부가 그렇게 되었다. 같은 날 태어나지도 못했고 같은 날 가지도 못하지만 세상의 어느 한 부분을 함께 지나가면서 울고 웃으며 보낸 세월들, 그저 동반자라는 타이틀 하나 때문에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어쩌면 진짜 출발은 지금 부터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소중한 사람인 것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이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거나 결혼기념일이 되어야하는지도, 그래서 '아플 때나 병들었을 때…'라는 결혼서약서 이상의 상황이 몰려왔지만, 나도 크리스토퍼 리브의 아내 다나 리브처럼 '내겐 언제나 당신은 당신일 뿐!'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 기적은 / 다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 사랑하는 아내와 / 하루 하루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은 / 날마다 기쁨이고 기적입니다"
- 크리스토퍼 리브

덧붙이는 글 | 2010년 1월 이후 국립암센터 가까운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



태그:#아내, #희귀난치병, #슈퍼맨의 아내,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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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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