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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마땅히 쉴 곳이 없는 병원 내부, 길게 복도만 덜렁 있고, 병실과 맞은편에 목욕실과 세면실이 있었다. 한쪽 벽에 있는 모뎀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병상일기를 적곤 했던 소파들, 병실과 복도만 들락거리다 병이 났던 2009년의 추석이 기억난다. 참 친절했던 과장님이 고마웠다.
 마땅히 쉴 곳이 없는 병원 내부, 길게 복도만 덜렁 있고, 병실과 맞은편에 목욕실과 세면실이 있었다. 한쪽 벽에 있는 모뎀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병상일기를 적곤 했던 소파들, 병실과 복도만 들락거리다 병이 났던 2009년의 추석이 기억난다. 참 친절했던 과장님이 고마웠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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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돌아다니는 동안 참 여러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정성 어린 가족도 있었고, 지쳐서인지 학대에 가까운 폭언과 구박을 하는 가족도 보았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나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나도 때때로 무서워진다. 아내가 투병을 잘해줄지도 문제이고, 내가 그 시간 동안 잘 견뎌낼지도 불안하다. 혹은 우리 두 사람이 다 잘 버틴다 해도 세 아이들은 또 괜찮을지, 병원비 마련이나 살림들은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불안한 일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서 몰려온다.

추석 날 뜬금없이 인도로 가고 싶었다. 서러움과 답답함이 묘하게 섞여서 몰려오는 쓸쓸함이 만만치가 않았다. 견딜 수 없어 휴대폰 메모 기능에 그 마음을 풀었다. 하소연하듯,

갠지스 강가로 가고 싶다/ 산 사람 죽은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갠지스 강에 몸을 담고 싶다// 찌든 마음도 내려 보내고/ 고단함에 너덜해진 육신의 찌꺼기도 씻어 보낼 수 있다면/ 탁한 물이면 어떻고 냄새나면 어떠랴// 푹 들어갔다 나올 땐/ 그분이 요단강에서 나올 때처럼/ 하늘이 열렸으면 좋겠다// 수증기처럼 가벼워져서/ 하늘로 날아가고 싶다 자유롭게/ 형체도 없이 무게도 없이

며칠 내내 병원이 자꾸 벽이 좁혀오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더니 기어이 밤부터는 숨도 쉬기가 불편해질 정도로 심해졌다. 좁은 병동, 복도는 서 있기도 어색하게 덜렁 길기만 하고, 바깥은 온통 아스팔트 차도에 뒤쪽은 아파트 산성, 비는 왜 그리 부슬부슬 내리는지 개지도 그치지도 않는 날씨가 공연히 미워져서 트집 잡으며 투덜거렸다.

간밤엔 아내의 뇨검사에서 피가 섞여 나온다고 하더니 아침엔 소변이 안 나왔다. 호스를 쥐어짜내다가 무리하게 호스를 잡아당겼나보다. 요도에 상처가 났는지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안 좋은 기분은 더 안 좋은 일을 부른다더니, 이래저래 속상하고 찌뿌둥한 몸과 며칠이나 감기지 못한 아내의 머리가 자꾸 거슬렸다.

"자! 오늘은 머리 감고 목욕하자! '새삥'으로 만들어주겠다! 음하하하."

아내에게 큰소리를 쳤다. 사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후 재활운동을 마치자마자 아내를 샤워실로 데려갔다. 3단으로 접었다 폈다 하는 플라스틱 의자 겸용 침대 하나만 덜렁 있는 욕실에서 혼자 힘으로 낑낑 환자복을 벗기고 머리 감기고 뒤집어가며 씻겼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것도 서투른 남자에게는 힘들다. 하물며 어른, 그것도 몸도 세우지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사람을 혼자 씻기는 건 정말 힘들다. 비누칠을 한 아내의 몸무게는 그냥 몸무게의 서너 배로 무겁게 느껴졌다. 어디 잡을 데도 없는 상태라 더했다.

낑낑거리며 끝났다고 옷을 입히는데, 이상하게 뻘건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게 뭐야? 자세히 보니 피다. 이미 떨어진 피가 군데군데 모여서 퍼지고 있고, 당황한 나는 얼른 대충 입히고 침대로 데려와 눕혔다. 자세히 보니 엉덩이 두 군데나 살이 벌어져 찢어지고 피가 나고 있었다. 아마 욕창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뒤집고 씻기다가 살이 터진 것 같다. 간호실에서 받아온 약도 바르고 옷도 다시 갈아입혔다.

"나 좀 끌고라도 가줘...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재미없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만 반복하며 내 머리를 쥐어박는데 아내는 "괜찮다, 괜찮다"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가 미워 못 견디겠다. 시간 되어 들이닥친 저녁밥을 떠먹이다가 결국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1년이 넘도록 아내를 목욕시켜오면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모든 쌓인 힘겨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병원생활과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 지쳐가는 내 체력, 쌓인 피로감으로 많이 속상했었나보다, 동시상영을 해대는걸 보니….

"당신 혹시라도 다음 세상에 갈 때는 나 꼭 좀 데려가줘, 끌고라도 가줘….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재미없다."

말해놓고 생각하니 참 쓸데가 없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보호자도 되고 능숙한 보호자도 될 수 있을까? 마음 고생 자체를 견디는 것만도 내게는 버거운데, 몸으로 시시각각 닥치는 구체적인 간병업무는 전문성을 요구하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오르막이다.

그러나 어쩌랴,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곁을 둘러보아도 정말 교대해줄 아무도 없이 단 둘뿐인 상황이다. 그 중 멀쩡한 한 사람인 내가 자리를 피하면? 남은 한 사람인 아내는 병원을 나가는 건 고사하고 제자리에서 돌아눕지도 못하는걸.

재활치료중, 지하실에 치료실이 있었다. 날마다 시간을 맞추어 2층에서 엘리베이터로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잠시 누워 쉬다가 또 내려가서 데리고 올라오고, 그렇게 날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건물 안에서 낮이 가고 밤이 오고, 또 다시 낮이 가고 밤이 오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재활치료중, 지하실에 치료실이 있었다. 날마다 시간을 맞추어 2층에서 엘리베이터로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잠시 누워 쉬다가 또 내려가서 데리고 올라오고, 그렇게 날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건물 안에서 낮이 가고 밤이 오고, 또 다시 낮이 가고 밤이 오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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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때로는 마음을 다해도 안 되고, 참는 걸로도 해결 안 되는 구체적 고통도 온다. 그럴 때는 방법이 없다. 고스란히 그 소나기 다 맞으면서 도망가지 않고 머물러주는 것밖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크고 작은 병원들마다 환자와 가족들, 간병을 하는 분들이 이런 씨름들을 하고 있을 거라 짐작이 된다. 마음 졸이고, 병의 각종 증상들에 낯설고 두려워하면서 하루씩을 보내겠지. 간병하다보면 때로는 자신감도 잃고, 속상하기도 하고, 그러다 예민해진 환자와 다투기라도 하는 날이면 차라리 내가 아플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곁에서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정말로 필요하다.

'바람이 거세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우산도 소용없는 법이다. 그때는 그저 곁에서 같이 오는 비를 흠뻑 맞아주는 것도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디는 큰 힘이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그만 둘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 사이에만 가능한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곁에 있어주다 보면 의사보다 더 빨리 환자의 상태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비록 고치지는 못하지만 의사보다 더 환자와 공감하고, 의사보다 깊이 고통을 알아주는 가장 최고의 보살핌, 사랑의 간병이 가능해진다.

'온 가족이 해방되는 길, 눈 딱 감고 며칠만 내버려두면...'

추석 때 두 아이들이 충주에서 출발해 용인에 있는 병원에 왔다. 많이 반가웠고 무엇이든 사먹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사먹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온 날부터 3일 내내 집사람과 나는 교대로 감기 몸살로 누워 지냈다. 사흘 뒤 장인어른이 또 병원으로 왔다. 그러나 이미 집사람은 아이들이 돌아가기 전부터도 재발 증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해서 힘들어하는 중이었다.

장인어른을 간신히 보내드리고 나니 더 심해지는 증상. 밥도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하고 밤새 잠도 못 잔다. 속은 메슥거리고 헛구역질만 하고, 결국 또 다시 재발했다. 벌써 7번째.

결국은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해야만 했다. 얼마 전 죽어도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욕하고 속으로 다짐하고 떠났던 미운 병원 응급실을 또 들어가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치 욕하고 침 뱉은 물을 다시 마셔야만 하는 사람 꼴이 되었다. 그래도 어쩌랴, 아내는 힘들어하고 딴 병원은 어느 병원 환자였는지 묻고 나면 받아주지도 않으니, 응급실은 더더구나.

응급실 거쳐 또 중환자실, 이틀 뒤 일반병동으로 옮겨졌다. 간신히 심해지던 증상이 줄어드나 했더니 이번에는 당뇨수치가 상승! 200 후반을 오락가락하더니 마침내 300을 넘어섰다. 몇 번이나 입원하는 동안에도 아직 한 번도 맞지 않았던 인슐린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이번 스테로이드 주사는 반응이 지나친 지 얼굴이 붓고 가렵고 피부가 벗겨지면서 벌겋게 피어오른다.

이제 우리도 지쳐가는 것일까? 아내가 사소한 일로 자꾸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소리를 해서 나도 한마디 해버린 게 결국 맞불이 되었다. 그럴 때면 속에서 막 치밀어 오르는 속삭임이 있다. 내 속에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야 이제 그만두지? 낫지도 않을 걸 뭘 그리 계속 버텨? 차라리 빨리 끝이 나는 게 온 가족들이 다 해방이 되는 길이야! 그냥 눈 딱 감고 며칠만 내버려두면 간단할 걸?'

악마가 내 속에 들어온 걸까? 힘들 때마다 스치듯 지나갔던 나쁜 생각들이 또 몰려온다. 그럼 나는 아이들, 특히 이 순간도 혼자 방에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중1 막내 딸아이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 같은 결심을 반복한다. '한 번만 더, 딱 하루만 더 견뎌보자'라고.

덧붙이는 글 | 2009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겪은 이야기입니다.



태그:#간병, #난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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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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