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합을 앞두고는 참 이상한 일이 많았다. 평소 같았으면 계체량을 앞두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짜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는데 문득 광릉 수목원을 가자고 했다. 감량의 고통에 걸을 힘도 없어보였지만, 수목원을 오래도록 산책하며 말했다.

"경호야, 우리 앞으로는 멋있게 살자. 돈이 전부가 아니다. 어려운 후배들 도우면서 멋있게 살자." 

그랬던 형이 시합을 판정승으로 이기고 코너에 돌아와서는 쓰러지더니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뇌수술을 마치고 의식불명인 채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형이었지만, 내게 계속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 했다. 6남매 중 다섯째인 요삼이 형은 막내인 나에겐 늘 무서운 존재였다. 형이 주먹질도 마다 않으며 늘 매섭게 다그치고 혼내던 이유가 바로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그토록 무섭게 단련시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늘 든든했던 형 최요삼(위)과 최경호

아버지를 대신해서 늘 든든했던 형 최요삼(위)과 최경호 ⓒ 최경호


2008년 복싱 경기 후 뇌수술을 받고 세상을 떠난 고 최요삼 선수의 동생 최경호씨를 지난 1일 사당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최근 복싱 매니지먼트 사업에 뛰어든 사연을 들어보았다.

사고가 난 저녁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왜 시합이 끝났을 시간인데 전화들이 없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니?"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차 안에서 뇌수술을 받았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말씀을 드리니, "아이고, 이를 어쩌냐? 혹시라도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만약 그렇다면 장기 기증이라도 해야겠다. 아니, 내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그때 무심코 말이 나왔던 장기기증을 형이 뇌사 판정을 받은 후 실천하셨습니다. 형은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형의 신체를 나눠가진 6명의 환자들이 대신 건강한 삶을 살고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세계챔피언벨트를 동생과 함께 든 최요삼(좌)

세계챔피언벨트를 동생과 함께 든 최요삼(좌) ⓒ 최경호


지금도 꿈에 나타나 야단치는 요삼이 형

형을 보내고 반년 넘도록 방황을 했습니다. 장례식 때 도움주신 분들이 많았지만, 그분들 만날 용기가 안 났고, 연락을 두절하고 혼자 지내다가 답답하면 형이 뛰던 산을 혼자 무작정 달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형이 다녔던 동대문 쇼핑몰에 취직을 해서 최근까지 6년 가까이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고가 난 이후부터 지금껏 늘 형이 꿈에 나타납니다. 너무 생생하고 자주 나타나서 어떤 때는 실제로 형과 지난 밤에 대화를 한 듯 착각을 합니다. 꿈에서도 형은 늘 절 야단을 칩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냐, 왜 이렇게 게으르냐" 등등이죠. 요즘은 형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거니?" 또한, 그날 수목원에서 했던 얘기도 했습니다.
"경호야, 우리 멋있게 살자. 어려운 후배들 도우면서" 

꿈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이 무의식 중에 남아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전 요삼이 형이 늘 저를 지켜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무사히 직장 생활하는 삶에 만족하기 보다는 형 때문에 형을 위해 입문했던 복싱 프로모션 사업에 다시 복귀해서, 형이 못다한 복싱 부흥의 한을 풀고 싶었습니다.

 형의 매니저로 복싱 비즈니스에 입문했던 최경호

형의 매니저로 복싱 비즈니스에 입문했던 최경호 ⓒ 최경호


최경호는 지난 2005년 최요삼이 3년간의 공백을 깨고 링에 복귀하면서, HO스포츠매니지먼트사를 설립했다. 형 최요삼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여 다섯 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 승승장구했었다.

형 시합을 위해서 스폰서를 구하고, 경기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경기장 시설을 설치하고 점검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매번 멋지게 승리하는 형이 있어 힘든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형과 동업하면서 많은 추억이 남았다. 하지만, 그날의 사고로 인해 형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고, 복싱 매니지먼트사업도 중단되고 말았다.

유명우와 손잡고 복싱 선진 시스템을 벤치마킹

 유명우의 세계복싱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함께 한 최경호(좌)와 지인진

유명우의 세계복싱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함께 한 최경호(좌)와 지인진 ⓒ 최경호


지난 6월 미국에서 있었던 유명우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 행사에 동행하게 된 건 복싱프로모션사업 위해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습니다. 팬들은 비록 은퇴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성원했던 복싱 선수들을 보기 위해 호텔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세련된 양복차림으로 팬들에게 나타나서 일일이 사인해주고 함께 사진 찍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유명우의 이름이 새겨진 차로 카퍼레이드를 했고 기념 마라톤 대회를 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도시 전체가 축제기간이 되는 걸 보고 이게 바로 미국 복싱 산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액식 기간 내내 전설의 복싱 선수들과 관계자들로부터 대회 운영방식, 경기장 시설 환경, 선수발굴 프로그램, 복싱 마케팅 등에 관해 금쪽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빈 해글러와 함께 선 최경호

마빈 해글러와 함께 선 최경호 ⓒ 최경호


한국복싱도 이제는 달라질 때가 되었다

한국복싱은 반드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선수들을 최우선으로 배려해야 합니다. 일례로 선수들이 시합을 앞두고 링 위에서 국민의례와 지역 스폰서 소개로 20분 넘도록 서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대회를 후원해준 스폰서를 알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늘어지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려버리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짧게 동영상으로 제작해서 화면에 내는 게 더 효과가 있습니다. 

8월 18일 중구구민회관에서 있을 김민욱, 홍서연, 이재성 시합에선 새로운 면모를 보일 예정입니다. 우선 무료 관중을 없앴습니다. 이미 10만 원 하는 VIP 티켓은 모두 매진이 되었습니다. 일반석과 확실히 구분하는 펜스를 설치하고 VIP들에게는 식음료와 기념품을 제공합니다. 흥행을 위해 라운드걸이 6명이나 등장할 것이고 일반관중을 대상으로도 각종 이벤트를 통해 경품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경기장 내에서도 고급스런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외식업체를 선정해놨습니다. 한 마디로 쾌적하고 세련된 경기장 환경에서 즐겁게 관람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YMW버팔로 프로모션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8월18일 경기 포스터

YMW버팔로 프로모션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8월18일 경기 포스터 ⓒ 최경호


하지만, 아무리 환경이 좋은들 선수들의 기량이 형편없으면 외면당할 것입니다. 김민욱, 이재성 등 기존 선수들을 세계챔피언, 동양챔피언 타이틀 매치에 나설 수 있도록 복싱 비즈니스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수 저변이 확대되어야 좋은 선수들을 선발할 수 있습니다. 한일 신인 대항전이 그 맥락이지요. 또한, 토너먼트 방식의 신인왕전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방송과 연계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형식으로 신인 때부터 스타로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팬들이 함께 지켜보고 성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기획 중입니다.

 6년이 지났지만 형 이야기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최경호

6년이 지났지만 형 이야기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최경호 ⓒ 이충섭


늘 밝고 앳된 표정의 최경호였지만 형 이야기를 떠올릴 때 마다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막내를 그토록 모질고 강하게 이끌었던 형의 빈 자리는 아직도 너무 커 보였다.

매맞아 번 돈으로 '너는 나처럼 맞는 운동을 하지 말고 박세리 같은 골프선수가 되라'며 3년간 해외유학을 보내주었던 아버지였고, 귀국해서는 형의 매니저로 함께 했던 둘도 없는 동업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빈자리를 유명우가 대신하고 있다. 유명우(YMW)버팔로 프로모션의 본부장으로 유명우 대표와 함께 하며 최요삼과 못 다한 한국 복싱의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싱으로 형을 잃고 복싱계를 떠난 지 6년 만에 다시 돌아온 최경호가 만들어갈 복싱 프로모션의 새로운 바람을 기대해본다.

 고인이 된 최요삼(좌)과 동생 최경호의 다정했던 모습

고인이 된 최요삼(좌)과 동생 최경호의 다정했던 모습 ⓒ 최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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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선수협의회 제1회 명예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전임강사 <저서>면접잔혹사(2012), 아프니까 격투기다(2012),사이버공간에서만난아버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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