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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을 구했다. '서교동에 집이 나왔는데 좀 오래되긴 했어도 내부는 리모델링해서 깔끔하다'는 연락을 받고, '곰씨(예비 남편의 애칭)'와 퇴근 후 부동산을 찾았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이끄는 곳은 우리가 2주 전에 처음으로 봤던 그 빌라다. 게다가 층수까지 같다. 당시 집 내부를 보고 뜨악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설마 또 그 집?' 했는데 부동산 실장님이 맞은 편 집문을 두드린다. 갓난아이를 안은 앳된 얼굴의 여자 분이 문을 열어준다. 아이가 생글생글 웃는다.

리모델링을 해서일까. 지난번에 봤던 집이랑 비슷한 구조일 텐데 내부가 완전히 달라 보인다. 10평 조금 넘는 작은 집이긴 하지만 둘이 살기에는 문제없어 보이고, 신축은 아니지만('좀 오래됐다'더니, 1989년에 지어진 집이었다) 깔끔한 편이다. 비용도 예산으로 책정해놓은 것보다 1000만 원이 싸다. 무엇보다 집 위치가 가장 마음에 든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가깝고, 지하철역이 멀지 않아 곰씨 출·퇴근도 편할 것 같다.

집을 보고 나와 곰씨와 동네를 서성댔다. '그냥 이 집으로 할까. 아니야, 마음에 드는 집 나올 때까지 몇 개월 동안 집 보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좀 더 기다려 볼까. 이번이 겨우 세 번째 부동산 방문이잖아. 너무 급한 거 아닐까. 그런데 많이 보러 다닌다고 더 좋은 집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렇게 걷다 생각해보니 정작 중요한 걸 깜빡했다.

"맞다! 물 잘 나오는지 틀어봤어야 했는데."
"환기 잘 되는 지랑, 보일러 잘 돌아가는지도."
"세입자 입장에서는 집이 나가야 하는데, 당연히 잘 된다고 하지 않을까(웃음)?"
"일단 다시 한 번 가보고 결정하자."

둘 다 전셋집 구하는 건 처음이니 아무래도 서툴다. 쭈뼛쭈뼛. 곰씨는 '기자정신을 발휘해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매의 눈'으로 꼼꼼히 다시 봐도 나쁘지 않다. 부동산에 집을 계약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와, 보너스를 이렇게 현금으로?...'헉' 

며칠 후, 가구와 가전제품을 알아보기 전에 집 치수를 재러갔다. 철물점이 보이지 않아 동네슈퍼에서 철자를 샀는데 어째 영 부실하다. 퇴근 후라 양복을 입고 온 곰씨와 땀을 뻘뻘 흘리며 치수를 재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렇게 나왔는데 아뿔싸,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를 안 쟀다. 아기 때문에 다시 가기도 그렇고... 일단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곰씨가 "예전에 봐둔 집이 있다"며 초밥집에 가자고 했다. 

초밥을 폭풍 흡입하고 있는데 곰씨가 자기네 회사이름이 적힌 봉투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부터 보너스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니 혹시 보너스? "보너스야?"라고 물으니, 곰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와, 보너스를 이렇게 현금으로 챙겨오고...' 감동하며 봉투를 열었더니 돈이 아닌 종이가 들어있다.

보너스인 줄 알았던 봉투 속에는 결혼제안서가.
 보너스인 줄 알았던 봉투 속에는 결혼제안서가.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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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안서'

안녕! 오래간만에 글을 쓰려고 하니 시작하는 것도 어렵네. 편지를 자주 써야 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이렇게 쓰는 게 쉽지 않네. 앞으로는 이렇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라 평소에도 생각이 나면 한 통씩 써봐야겠다. 손편지는 카톡이나 전화 따위랑은 다르니깐 평소에 전할 수 없던 할 수 없던 말들도 전할 수 있으니깐...

앞에 특별한 일이라고 했는데, 사실 오늘은 우리가 연인이 되기로 약속한지 3000일이 되는 날이야(알고 있었니?) 처음 야학을 퇴임하고 너에게 편지로 고백을 하고, 피씨방에서 연락을 기다리던 때에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한데... 3000일이라니... 3000일이라니... (젠장...은 아니지...) 믿기지가 않네.

여기까지 읽고 '헉'했다. 프러포즈 편지를 보너스로 착각한 것도 민망했지만, 오늘이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3000일이라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타고난 '숫자바보'인 나는 아직도 '우리가 연인이 되기로 약속한 날'이 2005년 4월 9일인지, 4월 10일인지 늘 헷갈린다(미안하다, 곰씨야).

플라스틱으로 만든 만 원짜리 꽃반지

곰씨와 나는 대학 1학년, 야학 '강학(講學)'으로 만났다(우리가 봉사활동을 했던 야학에서는 교사를 '강학', 학생을 '학강'이라고 불렀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다). 곰씨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들어와서 '퇴임'도 한 학기 빨리했다. 퇴임식을 하던 어느 봄날 술자리에서 곰씨는 내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3000일이 넘는 기나긴 인연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몇 개월 후 곰씨는 군대에 갔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곰씨는 군대에서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일주일에 한 번씩 호주로 보냈다. 외롭던 타지 생활에서 곰씨의 편지는 가장 큰 위로였다.

예전부터 3000일이 되는 날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멋지게 너에게 청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밖에 못하는 것이 뭐 아쉽기는 한데 미안하지는 않지만(니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한 거야...) 그래도 다들 하는데, 나도 확인 좀 받아놓으려고. 이렇게 껍질 없이 알맹이로만 너에게 확인을 받아보려고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랑 결혼해줄래."

뭐 다음생애 같은 거 많이 생각해보고 또 믿지도 않고 그 때까지 너와 함께 할게,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너와 함께 할게. 너도 그래줄 수 있겠니? 계속해서 내 삶의 지표가 되는 친구로 남아줄 수 있겠니? 정말 나와 평생을 매일 함께할 수 있겠니?

결혼준비를 하면서 나는 곰씨에게 '프러포즈는 하지 말자'고 거듭 말했었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진심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혼 날짜까지 다 잡아놓고 따로 또 프러포즈 이벤트를 한다는 게 어쩐지 나는 좀 멋쩍었다. 보통 프러포즈 이벤트는 남자쪽에서 준비한다는데, 이것도 나는 잘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는 이미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올해 초봄이었던가. 당직을 마치고 곰씨와 만났는데 곰씨가 꽃을 들고 나타났다. '꽃 선물 받고 싶다'고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공덕동 전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몇 번이나 꽃을 들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널 사랑하는 평생의 친구가'로 끝나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 많은 나는 또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곰씨는 '반지를 준비했다'며 플라스틱으로 된 만 원짜리 꽃반지를 꺼냈다.

"내가 너한테 처음 사줬던 귀걸이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서 샀어. 이거 세수할 때 끼거나 너무 자주 끼고 다니면 안 돼. 녹슬어(웃음)."

곰씨가 결혼제안서와 함께 건네준 만 원짜리 꽃반지.
 곰씨가 결혼제안서와 함께 건네준 만 원짜리 꽃반지.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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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는 하지 말자'고 '쿨하게' 말했지만 이렇게 막상 진심어린 편지와 반지를 받으니 기뻤다. 동시에, 고백도 프러포즈도 이렇게 매일 받기만 해서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걸그룹은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제 여자분이신데...여자가 먼저 키스하면 잡혀가는 건가... 이제 그래도 돼, 니가 먼저 시작해'라고 노래하던데(그러면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나와 왜 그리 엉덩이를 흔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도 좀 더 적극적으로 곰씨의 진심에 보답할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태그:#소박한 결혼, #프로포즈, #신혼부부, #집구하기, #소박한 결혼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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